324화 파란만장한 승급식 (3)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드미트리 가문.
난세(亂世)에 기회를 잡아 남작의 작위를 얻었을 뿐, 사실 드미트리의 근본은 일반 평민에 불과했다.
한때는 드미트리 공작도 높은 자리를 넘본 적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혼사를 진행하며 귀족으로서 자리를 잡길 바랐지만, 권력자들의 세계는 자신의 그릇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권력을 넘겼다.
로만 드미트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최근에는 뒷방 늙은이처럼 아내와의 삶에 충실했다.
그런데 다니엘 카이로의 충성 맹세라니.
바로 알겠다고 대답하기에는, 드미트리 공작의 그릇은 작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카이로가 신하의 나라로 남겠다니요. 드미트리는 카이로 왕국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저 역시도 바라는 바입니다만,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받아 달라는 건 아닙니다. 신하의 나라가 되는 것은, 드미트리가 제국의 칭호를 얻었을 때입니다.”
“하지만……!”
“드미트리 공작님.”
다니엘 카이로가 차분하게 말을 끊었다.
지금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는 고민과 신하들과의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
“카이로스에 도착하고서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거리에 몰려든 카이로 왕국의 백성들은, 드미트리를 카이로의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같은 뿌리를 두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국가의 안위를 보장해 준 나라기에, 그런 나라가 카이로와 같은 뿌리를 두었기에, 백성들은 조금의 편견도 가지지 않고 드미트리를 진심으로 반기는 것입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백성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들은 카이로의 국왕인 자신이 행차할 때도, 저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정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특별하다.
국왕의 영향력을 넘어서, 카이로 왕국에 강한 존재감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 때문입니다. 크로노스는 대륙 정벌의 야망을 드러냈고, 지난 전쟁에서 카이로 왕국으로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전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의 전쟁은 왕국 연합이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연합의 힘이 승리를 이끌었다기보다는 로만 드미트리 님 개인의 능력이 판을 뒤집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게 현실이었다.
카이로는,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만약 크로노스 제국이 동시다발적으로 왕국 연합 전체를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로만 드미트리 님이 버티고 있는 전장에서는 승리할지 몰라도, 크로노스 제국의 압도적인 전력은 나머지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 분명합니다. 드미트리 공작님.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서 중립(中立)은 무책임한 태도일 뿐이고, 하나의 노선을 택해 확실하게 대비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카이로 왕국은 현실을 수긍했을 뿐입니다. 카이로의 백성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저는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의 야망에서 저희를 지켜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드미트리를 믿었다.
그들에게 카이로의 미래를 맡기는 상황에서, 언제까지고 이런 모호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드미트리는.
언제고 제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어차피 다가올 미래라면, 다니엘 카이로는 빠르게 본인의 위치를 자각했다.
“어쩌면 제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드미트리에게 크로노스를 감당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지만, 만약 드미트리가 제국으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면. 카이로 왕국을 받아 주십시오. 드미트리가 제국의 칭호를 선포하는 날, 저는 기꺼이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결연한 의지였다.
단호하게 말하는 카이로 국왕을 바라보며, 드미트리 공작은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격변(激變)의 시기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니엘 카이로의 간절함은, 격변의 흐름에서 카이로가 휩쓸려 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후우.”
숨을 크게 골랐다.
한참을 고민하던 드미트리 공작이, 대화를 담담히 지켜보고만 있는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로만. 네 생각은 어떠냐.”
로만 드미트리.
선택은 결국, 그의 몫이었다.
* * *
드미트리의 전권.
로만 드미트리에게 있었다.
드미트리 공작으로서는, 이번 문제가 뒷방 늙은이에 불과한 자신이 판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어려운 문제다.
선택을 떠넘겼고,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카이로 국왕 폐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크로노스 제국의 목적은 명확하고, 단순히 왕국 연합의 안전을 바라는 것만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렸을 때 쟁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크로노스가 거대한 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너진다면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자리를 누군가가 통제하지 않는 한 혼란은 끝나지 않습니다.”
비슷한 예로.
오델리아 왕국이 있었다.
오델리아는 크로노스 제국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만큼의 약소국이었지만, 오델리아 왕실이 무너진 것만으로도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오델리아는 무법지대가 되었으며,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난민의 신분으로 국경을 넘었고, 한 나라의 붕괴는 대륙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오델리아도 이 정도인데.
크로노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안전을 도모하는 전쟁이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도 대비해야만 했다.
“크로노스의 공백을 발할라가 모두 흡수한다면, 광기 어린 발할라 황제에 의해 똑같은 혼란만 반복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전을 보장받는 것만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제국을 무너트렸을 때. 누군가는 강력한 통제력으로 혼란을 휘어잡고 대륙을 평정해야만 합니다. 상대가 크로노스든, 발할라든. 분란을 만들 여지를 완벽하게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엘 카이로.
드미트리 공작.
둘은 로만 드미트리의 진심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어렴풋이 그가 하늘을 바라본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눈동자가 조금씩 떨렸다.
“제가, 그 역할을 맡겠습니다.”
겸손 따위는 없었다.
처음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정상을 바랐다.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린다면, 그 혼란을 집어삼켜 대륙을 평정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카이로의 국왕이.
드미트리의 주인이.
자신에게 선택권을 맡긴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충격에 빠진 그들을 바라보며 명확히 말했다.
“제가, 왕국 연합을 이끌고 크로노스 제국을 넘어 대륙을 평정하겠습니다.”
* * *
대화가 끝났다.
충격적인 내용이 오고 간 이후, 두 사내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각자의 생각을 말했다.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나 로메로 드미트리는 네 판단을 믿고 따를 것이다.”
드미트리 공작의 말이었다.
그리고 다니엘 카이로는.
“……사실 오늘의 만남을 가지기까지, 만약 드미트리가 저와 생각이 다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속이 시원해지네요. 로만 드미트리 님. 당신이 그렇게 확고하게 결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 다.
생각보다 표정이 밝았다.
앞으로의 미래가 확고하게 정해지는 상황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그들과 헤어지고.
저벅저벅.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복도를 걸었다.
카이로.
드미트리.
그리고, 자신을 믿는 수많은 사람.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을 신뢰하지만, 정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의 대화는 일종의 다짐이었다.
다니엘 카이로와 드미트리 공작이 짊어진 짐을 대신 떠안으며,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직접적으로 밝혔다.
둘의 표정이 밝았던 것은.
책임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험난한 시련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정점의 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다.
복도를 걸었다.
홀로 걷는 걸음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남들은 감당하지 못할 시련.
익숙했다.
전생에 그랬듯.
현생(現生) 또한, 로만 드미트리는 군림하는 존재로서 정점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 * *
혼란했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승급식 당일이 되었다.
행사는 카이로스의 광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서 광장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모두 로만 드미트리를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주변을 통제했고, 어느덧 행사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승급식의 사회자.
앨빈 남작은, 긴장한 기색으로 차례를 준비했다.
“후, 떨리네.”
이번 행사.
원래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의 승급식은 매년 수차례 진행되는 일이고, 그렇기에 사람들이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로렌 드미트리의 존재로 상황이 뒤바뀌었다.
조금씩 그를 향한 관심이 커지더니, 드미트리 포로 사건을 기점으로 행사에 참석하겠다는 귀족들이 많아졌다.
드미트리.
그들의 위상이 변했음을 의미했다.
크로노스를 버리고 드미트리로 갈아타려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어 보겠다고 발악했다.
“대본은?”
“여기 있습니다.”
행사 관계자를 통해 대본을 받았다.
미리 어떤 멘트를 해야 할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는데, 대본을 확인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말해야 한다고?!”
“이게 참. 저도 곤란합니다. 아카데미 전통대로라면 승급식 자리를 빛내 주는 귀한 분들의 이름을 전부 언급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일단은 전통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사람들의 관심이 큰 줄은 알았다.
하지만 대본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예상한 수준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
결국.
행사는 시작되었다.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자리한 상황에, 사회자는 순서에 따라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의 승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본격적인 순서를 진행하기에 앞서,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분들의 이름을 말씀드리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숨을 크게 골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아직,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카이로 국왕 폐하, 드미트리 공작 저하가 자리해 주셨으며, 그라셀 남작님, 콘라드 자작님, 아델리안 백작님, 로렌스 자작님, 볼트 자작님, 발렌티노 후작님, 파비우스 백작님, 베일 자작님, 링고 자작님, 베르디 백작님, 라르손 남작님, 자르반 후작님…… 크리스틴 백작님, 포스베리 남작님, 드락슬러 백작님, 사미르 백작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숨이 차올랐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었지만,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팔락.
대본을 넘겼다.
다음 페이지를 빼곡히 메운 이름들.
이와 같은 수준의 명단만, 무려 다섯 장이 더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호명.
사람들이 감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는 사실을 떠나, 명단의 면면만 보더라도 화려했다.
확실했다.
이번 행사는,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 * *
행사도 어느새 끝을 향했다.
승급 대상자들을 공개적으로 축하하는 자리를 끝내고, 앨빈 남작은 이제 승급식이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이것으로 승급식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짝짝짝-
짝짝짝-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역대급 규모에 심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행사를 문제없이 끝마쳤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앨빈 남작은 무대에서 내려갔다.
승급식의 모든 순서가 끝났기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지만, 각국의 귀족들은 그 누구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어색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행사.
단순히 얼굴만 비추려고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로렌 드미트리의 승급식이라면 드미트리 일가가 참석할 테고, 축하 선물이라도 건네주면서 말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로렌 드미트리 주변으로 그의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드미트리 공작과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확인하자, 사람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기이한 장면이었다.
행사 소품을 정리하는 사람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귀족들.
그렇게.
드미트리 가문의 환심을 쟁취하기 위한, 각국 귀족들의 눈치 게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