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전쟁 포로 (3)
이번 사건.
일개 귀족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드미트리와의 전쟁으로 직결될 수도 있는 상황에, 뮤네즈 백작은 곧바로 멤피스 후작에게 마법 통신을 연결했다.
[……현재 이런 상황입니다. 되도록 전쟁 포로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미 증거를 확보했다는 발언으로 보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간 보여 준 행보대로라면, 정말 휴전 협상을 결렬시키고 공격을 감행할지도 모릅니다.]
황당한 보고였다.
크로노스 제국.
모두가 인정하는 강대국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크로노스가 어떤 부당한 일을 저질러도 감히 항명하지 못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먼저 휴전 협상을 결렬하면서까지 위협을 가했다.
세상이 변했다.
연속되는 패배는 크로노스의 위상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이와 같은 상황을 경험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멤피스 후작이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감히 예고도 없이 국경을 넘어서다니. 크로노스 제국의 법도대로라면, 처참하게 응징하는 것이 제국다운 대응이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크로노스 황제는 안식에 들어갔다.
빈자리를 대신해서 명령 체계의 전권(全權)을 멤피스 후작에게 일임했지만, 멤피스 후작의 마음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크로노스 황제는 앞으로 일 년간은 철저하게 방어적인 태도로 외교를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에, 드미트리와의 전쟁은 크로노스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크로노스는 지금 일 년 뒤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계획을 그르칠 수는 없지. 문제는 이번 일마저 우리가 한발 물러난다면. 로만 드미트리, 그 건방진 녀석의 콧대가 하늘을 찌르겠지.’
탐탁지 않았다.
휴전 협상을 체결하고.
주변에서 말이 많았다.
크로노스의 위세가 꺾였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보며, 멤피스 후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참았다.
찬란한 미래가 있기에, 지금은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다.
“뮤네즈 백작. 크로노스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안식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드미트리와의 분란 같은 문제로 황제 폐하의 안식을 방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것까지야 없지. 다만, 이번 문제를 적당히 마무리했으면 좋겠는데. 드미트리의 포로들은 전부 ‘동부 지역’의 귀족들이 노역에 활용하는 상황이니, 그들의 일탈로 상황을 마무리한다면 드미트리의 분노를 억누를 수 있겠지.”
화면 너머.
뮤네즈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부에 보고하면서, 그는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포로를 내주지 않고 전쟁을 택하리라고 생각했다.
동부의 귀족들.
그들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맥히튼 남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명령대로 포로들을 노역에 동원했고, 그에 대한 책임은 크로노스 제국이 짊어지리라고 믿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나라에서 지시한 일을 개인이 짊어지게 만드는 것은, 상황에 따라 뮤네즈 백작 또한 그렇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뮤네즈 백작.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세상의 이치란 게,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역겨움을 삼켰다.
드미트리는 수백의 포로를 구하겠다고 전쟁을 감행했는데, 크로노스 제국은 미련 없이 제국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버리라 말했다.
정체성에 혼란이 일었다.
우리도 드미트리처럼 국가가 책임을 짊어지면 안 되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의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크로노스의 역사는.
피와 시체로 이룩했다.
그 잔인한 역사에, 뮤네즈 백작은 승자로서 살아남고 싶었다.
* * *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뮤네즈 백작과의 통신을 끊은 맥히튼 남작은, 신경질적으로 마법 통신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콰직!
“이런 개새끼들이! 뭐?! 황제 폐하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 전쟁 포로 문제를 동부 귀족들의 개인 일탈로 처리하라고? 이건 나보고 그냥, 로만 드미트리에게 죽으라는 의미잖아!”
마법 통신기가 처참하게 부서졌다.
고가의 물품이 산산조각이 났는데도, 지금 맥히튼 남작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
전장에서 그의 행보는 섬뜩할 정도다.
적으로 분류되는 존재들을 절대 살려 주는 법이 없었고, 크로노스를 대표하는 대단한 검사들도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의 분노를 감당하라니.
게다가 뮤네즈 백작이 대화를 위해 전령을 보냈는데, 곧바로 머리를 날려 버렸다는 충격적인 말도 들었다.
암담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일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하게 제이슨을 불러들였다.
“제이슨.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겠나.”
“……이번에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동부 귀족들의 개인 일탈로 결정해 버린 지금, 저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로만 드미트리가 자비를 베풀길 바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명령에 응하지 않으면 반역도로 머리가 날아갈 것이고, 명령에 응하면 로만 드미트리가 우리를 죽이려 할 겁니다. 그렇다면 순순히 요구하는 대로 포로들을 갖다 바치고, 최대한 분노를 누그러트려야만 합니다.”
“제길!”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대체 왜.
자신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한단 말인가.
포로들을 공짜 인력이라며 신나 했던 자신의 모습은 잊은 채, 황급히 제이슨의 말대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한 놈도 빠짐없이 포로들을 전부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10분 뒤.
포로들이 끌려왔다.
바닥에 내던져진 포로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맥히튼 남작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들로서는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보통 밖으로 끌려오는 이들은 대부분 고문실로 향하기에, 그들의 표정에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보였다.
그들은 애써 이를 악물었다.
먹지 못해 야위고 학대를 받아 약해진 몸뚱이로는 이렇다 할 반항을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죽는 순간까지 얕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캐롤의 사건으로.
다들 악에 받쳤다.
눈을 부릅뜨는 그들을 보며, 맥히튼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로는 로만 드미트리의 분노를 자극할 뿐이다. 지금 당장, 이 녀석들을 데려가 전부 씻겨라!”
포로들의 몰골이 너무 처참했다.
남작의 명령에.
병사들은 포로들을 다시 끌고 갔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러워진 몰골이야 씻기면 그만이지만, 캐롤과 같은 ‘고문’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들은 당장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특히 괴사가 진행되고 있는 피부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상처 부위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확인하자마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뻔했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참을 고민하는 모습에, 제이슨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문을 받은 녀석들은 몰래 숨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포로들은 제가 어떻게든 입막음을 해 보겠습니다. 일단 한고비를 넘기고 나면, 로만 드미트리도 손을 쓸 방법이 없을 겁니다.”
“뮤네즈 백작의 말로는 증거가 있다던데.”
“설마 그걸 믿습니까? 저희는 포로들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겼습니다. 마법 통신 때문에 꼬리가 밟혔지만, 그렇다고 포로의 명단을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크흠.”
침음성을 삼켰다.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단은, 제이슨의 말처럼 당장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알겠다. 이 녀석을 비롯한 상태가 좋지 않은 녀석들은, 포로 명단에서 제외하라.”
* * *
2시간 뒤.
약속대로 동부의 귀족들은 포로를 대령했다.
방어 진지 앞.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도열한 적들의 모습에, 맥히튼 남작은 두려움을 삼키며 대표로 나섰다.
“……드미트리의 포로들을 전부 데려왔습니다. 일단 먼저, 포로의 존재를 숨긴 일을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것은 아닙니다. 휴전 협상을 체결했을 때 드미트리의 포로들을 풀어 주려고 했으나, 상황이 꼬이다 보니까 포로들의 존재를 말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바로 눈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눈빛은, 같은 인간인지 의심이 생길 정도로 섬뜩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개인의 실수입니다. 뒤늦게라도 포로의 존재를 밝혔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휴전 협상을 이미 체결했다는 말에 덜컥 겁이 들었습니다. 저희의 실수로 어렵게 진행한 휴전 협상이 엎어질지도 모른다고 착각했습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벌하시고 크로노스 제국과의 관계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크로노스는 평화를 바랍니다.”
웃긴 일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귀족이.
타국과의 평화를 말했다.
어느 나라에서든 행패를 부리는 것으로 유명한 족속들이 바로 크로노스의 귀족이었는데,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는 살기 위해서 어떤 말이던 내뱉을 수 있었다.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제일 많은 포로를 보유했기에 맥히튼 남작이 대표로 나섰지만, 마음 같아서는 걸음을 돌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번 일을 잘 수습해야만 권력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수차례 내뱉는 사과.
조금씩 안도감이 일었다.
상대의 덤덤한 반응에, 사과를 받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내가 뭐라고 말했지?”
“……예?”
“내가 분명히 단 한 명도 빠트리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황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변명하려는 순간.
짜악-!
엄청난 충격이, 그의 얼굴에 작렬했다.
* * *
말릴 새도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멱살을 틀어쥐다니, 앞으로 끌고 와 수차례 뺨을 날렸다.
짜악!
짜악, 짜악!
피가 튀었다.
이빨이 날아갔다.
처음에는 양손을 휘저으며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했지만, 몇 대 얻어맞자 동공이 풀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바닥에 쓰러질 수도 없었다. 멱살을 붙잡은 손에 매달려, 강제로 얼굴을 내주었다.
짜악!
얼굴이 돌아갔다.
손바닥을 뗄 때면, 진득한 피가 딸려 나올 정도였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지금, 이곳.
크로노스의 영토다.
최전방 방어 진지가 바로 앞에 있고, 성벽 위로는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끝냈다.
게다가 제이슨을 비롯한 호위 병력도 따라나선 상태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할 수 있는데도, 그들은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았다.
특히.
제이슨은 공포가 더했다.
바로 코앞에서 자신의 주인이 죽어 가는데도, 감히 검을 뽑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검을 뽑으면 난 이 자리에서 죽는다.’
로만 드미트리 너머로.
자신을 주시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드미트리의 섬광, 드미트리의 악귀라 불리는 그들은 싸늘한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만 드미트리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히 무방비의 상태로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겁에 질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크로노스의 영토에 들이닥쳐 폭력까지 행사하는 존재를, 일개 기사인 자신이 대적할 수는 없었다.
시선을 피했다.
참담한 광경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짜악!
힘이 풀렸다.
축 늘어진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멱살을 움켜쥔 채로 성벽 위에 있는 뮤네즈 백작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2시간의 여유를 준 이유는 이런 같잖은 사과나 받기 위함이 아니다. 포로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나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기에, 너희에게 상황을 되돌릴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너희가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가 왜 너희를 살려 줘야 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맥히튼 남작의 머리를 꺾어 버렸다.
뚜둑.
머리가 돌아갔다.
비명도 없이, 맥히튼 남작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대놓고 크로노스의 귀족을 죽이다니.
포로들을 갖다 바칠 때만 하더라도, 크로노스의 사람들은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건.
“뭐 해? 내 사람들 데려오지 않고.”
너무나도 큰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