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7화 (317/615)

317화 전쟁 포로 (2)

하루 전.

캐롤이 고문실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받을 그때, 조나단 기사단장의 보고로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것 참, 곤란한 문제군요.”

콘라드 자작이었다.

전쟁 포로.

내용을 읽자마자, 이게 얼마나 예민한 사안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드미트리는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다. 이 시기에 전쟁 포로의 존재를 들먹이며 크로노스 제국을 공격한다면, 전보다 더한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게다가 전쟁 포로의 존재는 짧은 통신으로 추측하는 것일 뿐. 실질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겨우 이 정도의 근거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증거를 인멸하면 그만이다.’

벌써 골치가 아팠다.

국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때.

포로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크로노스의 명백한 잘못인데도 드미트리가 불리해질 수도 있다.

아직.

대륙에는 크로노스와 발할라라는 양대 산맥이 건재하다.

드미트리의 섣부름은 그들이 연합할 가능성을 내줄 수도 있고, 지난 전쟁과는 다르게 두 제국의 공격을 받는 상황은 드미트리로서는 매우 곤란했다.

문제는 증거가 있다고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휴전을 백지화시켰을 때, 그로부터 비롯되는 혼란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포로의 숫자는 많아야 수백. 로만 드미트리 님은, 진실을 들추는 걸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머리를 굴렸다.

드미트리에는 악역이 필요하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명분을 바란다면, 콘라드 자작으로서는 그 명분을 내줄 역할을 기꺼이 자처했다.

콘라드 자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문제는 섣부르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짧은 통신은 전쟁 포로의 가능성을 암시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를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크로노스 제국에게 포로의 존재를 물었다간, 그들은 본인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조건 증거를 인멸해 버릴 것입니다. 그때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포로들이 존재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인 드미트리는 우습게 될 것이며, 크로노스는 발할라의 지지를 끌어와 저희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번 일은 조심스럽게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콘라드를 따르는 귀족들이 힘을 보탰다.

겨우 수백.

드미트리 전체를 생각한다면, 수백은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을 살리겠다고.

전체를 혼란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콘라드 자작은 본인이 이기적이고 정말 쓰레기 같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깨끗하고 정의로운 존재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기꺼이 악역을 받아들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잔인한 결단을 필요로 한다면, 자신이 먼저 언급한 것은 큰 힘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하는 우선순위를 확인했다.

크로노스 제국의 포로들을 모조리 죽이는 행위는, 적군에 붙잡힌 ‘포로’의 존재로 인해 다수가 위험에 빠지는 상황을 허용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포로의 존재들로 인해, 드미트리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툭.

“읽어라.”

로만 드미트리가 무언가를 던졌다.

조나단 기사단장이 가져온 보고서가 아니었다.

콘라드 자작은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이면서도, 로만 드미트리가 던진 서류 뭉치를 찬찬히 살폈다.

내용을 읽을수록.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침묵을 지키는 귀족들은, 일련의 상황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하아.”

서류를 내려놓았다.

숨을 크게 내뱉은 콘라드 자작이, 놀란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설마, 포로들의 존재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 * *

전쟁이 끝나고.

로만 드미트리는 루카스에게 여러 명령을 내렸다.

그중, 포로와 관련한 것들도 있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포로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여 준 행보로 인해 악의적으로 포로의 존재를 감추었을 수도 있다. 루카스. 정보원들을 풀어, 크로노스 제국에 드미트리의 포로들이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라. 만약 전쟁 포로들이 존재한다면, 절대 먼저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라.”

두 달 전.

루카스는 이미 움직였다.

포로의 존재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도 예민한 문제임을 알기에 포로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겼고, 채석장에서 일하는 포로들은 죄수로 위장시켜 버렸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크로노스 내부에서 정보원들이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은 철저하게 신분 조사를 진행하면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인물들을 걸러 냈고, 그로 인해 제국 내에서의 정보망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며칠 전.

캐롤이 마법 통신을 보내기 전에, 루카스는 이미 포로의 명단과 확실한 증거들을 확보한 상태였다.

판은 깔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준비를 끝낼 즈음, 때마침 캐롤은 자신들의 존재를 밝혔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콘라드 자작. 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는 전장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크로노스 제국의 포로들을 모조리 죽이며 내 입장을 확고하게 밝혔다. 그때는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내 가치관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포로.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존재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존재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너희 모두에게 묻겠다. 내가 왜, 포로 교환을 배제하고 적들을 몰아붙였다고 생각하나.”

“…….”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뻔했다.

막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붙잡힌 아군은 승리를 방해하는 짐에 불과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국가 유공 제도를 도입할 만큼 희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정에 휘둘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을 지지했다.

실제로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제국을 쓰러트리지 않았던가.

포로라는 역린을 괜히 들쑤셔,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길 바랐다.

만약.

포로의 존재를 언급하고도 그들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때는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

말 없는 시선에.

로만 드미트리가, 수뇌부들을 바라보았다.

“전쟁 도중에는 포로의 존재에 휘둘릴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승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런데 그들을 살리겠다고 더한 희생을 자처하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버린 멍청한 판단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를 외면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하는 이유는, 승자(勝者)의 발언이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그때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기에 포로들을 무사히 돌려받을 힘이 있다.”

패배했다면.

포로들을 돌려받기는커녕, 백성들 대부분이 노역에 끌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승리했다.

협상 테이블에서, 크로노스 제국은 먼저 말하지 않았는데도 포로들을 풀어 주었다고 실토했다.

그 차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승자의 이점을 알았다.

우위를 점해야만, 역설적이게도 포기했던 포로들을 살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우리는 희생을 발판 삼아 승자가 되었다. 지금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전쟁 도중에는 포로들의 존재를 외면했으나, 전쟁이 끝나고는 내 사람들을 돌려받기 위해 승자의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승리했다. 드미트리는 더는, 크로노스의 만행을 방관할 이유가 없다.”

사납게 말했다.

수뇌부들이 동요했다.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의 포로들을 죽인 이유는, 단순히 짐을 제거하기 위한 판단만이 아니었음을.

“병력을 집결시켜라. 서부 전선 너머에 존재하는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나는 기꺼이 전쟁을 감행할 것이다.”

역설적이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포로를 포기했고.

전쟁이 끝나고는 그들을 위해 전쟁을 결심했다.

하지만.

전쟁 포로들을, 드미트리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말에, 드미트리의 수뇌부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중에는.

열정적으로 소리치는, 콘라드 자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희생.

참으로 복잡한 문제였다.

하지만 전생의 경험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확고한 기준을 부여했다.

‘삶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왔을 때의 나는,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단순히 약육강식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마교는.

잔인했다.

백중혁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된 적이 있었는데, 목적은 이루었으나 적들에게 쫓기면서 목숨이 위험했다.

하지만 마교는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그들의 지시임을 부정해야 했기에, 백중혁이 죽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팔에 화살이 박히고.

등이 베였다.

아직은 젊었던 그때의 광마는, 백중혁을 지키겠다고 화살을 여러 발 맞았다.

벼랑 끝이었다.

죽음에 몰린 상황에, 광마는 아득바득 이를 갈며 말했다.

“주군!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쓰레기 같은 윗대가리들을 모두 쓸어 버리고 주군이 반드시 마교의 정상을 차지하십시오. 마교를 위해 희생하는 일? 억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마교는 강자존(强者存)의 세상이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이 세상에서, 대체 그 강함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웃겼다.

백중혁의 아버지는 무림 제일의 강자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결국은 본인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비열함을 보였다.

부끄러운 일이다. 백중혁이 바라는 강함과는 달랐다.

백중혁은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강함을 바랐다.

힘을 얻는다면.

비열해지고 싶지 않았다.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이 더러웠을지언정, 정상의 자리에서는 권력에 취한 얼간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광마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마교의 정상을 차지하는 날. 약육강식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지언정,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사람만을 챙기는 일이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기적으로 살기 위해, 나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강해질 것이다.”

이기적인 삶.

백중혁의 목적이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조금도 타협이 없는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바랐다.

마교도.

사파 무림도, 정파 무림도.

백중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지금은.

크로노스 제국이든, 발할라 제국이든, 아니면 심연 너머의 그 누군가든.

현생 또한, 이기적인 삶을 위해 조금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 * *

국경을 넘었다.

드미트리의 돌발 행동에, 크로노스 제국은 비상이 걸렸다.

뎅뎅뎅-

“적이다!”

“적들이 국경을 넘었다!”

크로노스 최전방 방어 진지.

그곳이 발칵 뒤집혔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성벽 위에 자리를 잡았고, 지휘관인 뮤네즈 백작은 황급히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로만 드미트리가 전쟁 포로의 존재를 확인한 것 같습니다. 일단 협상을 유도해 보십시오. 만약 극단적으로 나온다면,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증거를 완벽하게 인멸하겠습니다.]

“젠장!”

뮤네즈 백작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전쟁 포로.

그들을 빼돌릴 당시, 뮤네즈 백작은 웬만해서는 드미트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다는 의견을 말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가 두려웠다.

괜히 문제가 생길 빌미를 제공해서, 후에 상황이 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뮤네즈 백작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전령을 보냈다.

끼익.

쿵.

문이 열렸다.

백기를 내건 전령은, 말을 타고서 진군하는 드미트리군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서걱!

둥그런 물체가 하늘에 떠올랐다.

전령이 대화를 시도하려고 다가가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단칼에 전령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피가 튀었다.

바닥으로 번지는 핏물에, 말은 울음을 터트리며 황급히 성으로 도망쳤다.

말을 잃었다.

설마, 백기를 내건 전령조차 죽일 줄은 몰랐다.

척척-

드미트리군이 걸음을 멈추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 나와서는, 성벽 위에 존재하는 뮤네즈 백작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휴전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더러운 입으로 협상을 제안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딱 2시간 주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로들을 모두 데려오지 않는다면, 장담컨대 너희들을 곱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섬뜩한 말이었다.

이어서.

“포로들을 죽이거나, 증거를 인멸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이미 그와 관련한 증거는 모두 확보한 상태다. 단 한 명이라도 빠트린다면. 그때는, 드미트리와의 전쟁을 원하는 것으로 알겠다.”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통보.

말을 끝내고 물러나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뮤네즈 백작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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