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5화 (315/615)

315화 역작(力作) (6)

모두가 떠난 자리.

크리스는 홀로 남아, 복잡한 얼굴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왜 이 길로 들어섰을까.’

기억 저편.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떠올랐다.

시체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전쟁터에서, 어린 크리스는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울었다.

그때의 크리스는 세상이 끝난 줄만 알았다.

부모가 칼에 찔리고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은 그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조나단 기사단장이 손을 내밀었을 때 울음을 참으며 다짐했다.

강해지겠다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을 경험하지 않도록, 그 누구보다도 강한 검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최근.

크리스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디에고를 쓰러트리며 대륙 랭커급의 강자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전장에서 만나는 적들은 드미트리의 섬광이라는 칭호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원하던 목표에 근접하고 있었다.

예전과 똑같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케빈의 순수한 열망을 목격하자 머릿속에 큰 파문이 일었다.

정말 만약에.

로만 드미트리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하면 자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케빈처럼 현실을 부정하듯 울음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며 완전히 매료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패배는 당연했다.

30만 대군을 상대로도 물러섬이 없는 괴물을 대체 어떻게 쓰러트린단 말인가.

아직도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서겠다는 목표는 그대로였지만, 그게 현실성이 없는 목표라는 사실을 크리스는 모르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현실과 타협해 갔다.

자신은 과거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을 만큼 강해졌고,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서지 못하더라도 비난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차세대 대륙 제일검이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단 한 명의 예외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의 힘은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기에, 그에게 굴복하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씨발.”

짜증이 치밀었다.

화가 났다.

압도적인 존재를 마주하며, 어느새 자신은 나약해져 버렸다.

케빈의 울음이.

자신을 넘어서겠다는 순수한 열망이, 크리스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나도 이룰 수 없는 허무맹랑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크리스는, 검사로서 제일의 칭호를 얻기 위해 끝까지 발악할 것이다. 상대가 내가 진심으로 인정하는 로만 드미트리일지라도. 케빈과 마찬가지로, 나는 현실의 벽에 순순히 순응하지 않을 것이다.’

역겨움을 삼켰다.

처음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꽉.

검을 움켜쥐었다.

지금부터는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목표를 넘어서기 위해서.

더욱 악착같이 강해질 것이다.

* * *

치료실.

케빈의 상처 부위를 확인하며, 치료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쯧. 대체 왜 매번 이렇게 몸을 함부로 쓰시는 겁니까? 그나저나 크리스 님도 참 대단하시네. 어떻게 내부 장기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예술적으로 살만 베어 냈네요.”

치료사가 조잘조잘 떠들었다.

상황은 얼추 들었다.

크리스와 케빈이 실전 같은 대련을 진행했고, 그 결과가 피로 물든 케빈의 모습이라는 걸 말이다.

치료사가 말했다.

“케빈 님은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크리스 님은 처음 드미트리에 도착했을 때부터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이쁘장하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독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조나단 기사단장님의 가르침을 받고 금방 ‘마나’를 깨우쳤을 때는, 드미트리에 검술 천재가 탄생했다면서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분은 천재입니다. 로만 도련님을 만나서 날개를 달았을 뿐이지, 혼자만의 힘으로도 분명히 대성했을 분입니다.”

수년 전.

그때도 크리스는 천재라고 불렸다.

우물 안에서의 평가였을지라도, 이른 나이에 오라를 각성한 크리스는 케빈과는 근본이 달랐다.

“케빈 님도 대단하십니다. 크리스 님은 보통 대련에서 상대를 해치지 않는 편인데, 피를 보지 않고는 제압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렇게 피를 본 게 아니겠습니까. 케빈 님이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아마 다른 검사들이었다면, 이런 몰골이 되기도 전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기절했을 겁니다.”

치료사의 말.

더는 들리지 않았다.

케빈의 생각은, 드미트리에 도착했을 때부터 천재라고 평가받았던 크리스의 과거에 고정되었다.

‘나와는 근본이 다르다.’

천재.

이미 기반을 갖춘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에 반해.

자신은 보잘것없었다.

블러드 팽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어린 소년에 불과했고, 검이라고는 제대로 잡아 보지도 못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다.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근본부터가 천재라고 평가받았던 크리스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늘.

케빈은 벽을 보았다.

반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일격에 당하고도, 크리스의 전력을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담했다.

열등감의 실체는 초라했다.

범접할 수도 없는 상대에게, 지저분하게 엉겨 붙은 꼴이 되었다.

‘앞으로 주군의 곁에는 크리스와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겠지. 페르난도, 아레스, 프레드. 이미 랭커로서 명성을 떨친 사람들이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주군의 가르침을 받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낼 거야. 그때마다 나는 어떤 핑계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출발점이 다르기에, 그들이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맞을까. 그렇게, 나는 조금씩 밀려나는 걸까.’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과거가 그들처럼 대단하지는 않을지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가장 신뢰하는 존재로서 남고 싶었다.

그것은 순수한 열망이었다. 삶의 구렁텅이에서 처음으로 빛을 마주했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케빈의 삶에서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것을 선물했다.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자신을 가장 먼저 떠올렸으면 했다.

‘내 근본이 초라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일 년이 걸리든, 십 년이 걸리든. 주군을 제외한 모두를 반드시 넘어서겠어. 나는 이제, 패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었다.

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문득.

하나의 목표를 떠올렸다.

‘통제(統制)의 단계.’

귀혼마공.

그것을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의 차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아델리안 경매장.

그곳은 지금 초비상이었다.

아델리안의 VVIP.

로만 드미트리가, 블레이즈에 이은 새로운 신상 ‘써드 노-네임’의 경매를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써드 노-네임은 아델리안 경매장 역사상, 역대급의 낙찰액을 갱신할 것이 확실한 물건이야. 특별히 VIP 고객들에게도 모두 연락을 돌린 상태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마. 만약 성공리에 경매를 끝낸다면. 모두에게 상여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지.”

“알겠습니다.”

경매장 관리인 모리스의 말에.

직원들은 비장한 표정을 보였다.

이른 아침.

경매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모리스가 초대했다는 VIP들뿐만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새로운 신상을 발매했다는 소식에 일반 사람들도 몰려든 것이다.

그러나 모두 경매장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다.

이번 경매는 단독으로 진행되며 최소 100골드부터 가격을 책정하기에, 일반인들은 출입시키지 않았다.

경매장 안.

사람들이 들어찼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사회자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아델리안에서 선보일 작품은, 블레이즈로 크나큰 화제를 일으켰던 로만 드미트리 님의 새로운 신상 ‘써드 노-네임’입니다. 일단 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써드 노-네임은 강도 테스트에서 완벽한 합격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새로이 개발한 마나 감응 테스트에서 놀라운 결과를 보였습니다. 기존에 사용했던 마나 감응 아티팩트는 10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블레이즈가 만점을 받은 이후로 더욱 빡빡한 기준을 적용하는 대신 5단계로 분류되는 새로운 테스트기가 개발되었습니다. 개발자들은 새로운 테스트기를 선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5단계의 마나 감응도를 보여 준다면, 단언컨대 세기의 보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고요.”

웃음을 보였다.

분위기를 끌어올린 이후, 사람들이 기대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맞습니다. 써드 노-네임은, 새로운 테스트기를 통해 무려 5단계의 마나 감응도를 인정받았습니다!”

“와.”

“역시.”

사람들이 감탄했다.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명검을 세상에 선보였다.

분위기는 충분히 달아오른 상태.

사회자는 VIP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써드 노-네임의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격은 100골드입니다.”

그때였다.

척.

한 사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낙찰에 응하겠다는 신호와 더불어, 100배를 뜻하는 신호까지.

순간.

사회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1번이, 시작부터 1만 골드를 선언했습니다.”

1만 골드.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1번이라 불린 존재에게 집중되었다.

* * *

익숙한 얼굴이었다.

1번이 탐욕의 수집가라고 불리는 발렌티노 후작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발렌티노가 어떤 인물인가.

1만 골드는, 명백한 의도를 드러냈다.

“들어와. 돈으로 찍어 눌러 줄 테니까.”

회의를 끝내고.

발렌티노 후작은 보석 사업을 철수했다.

미리 써드 노-네임이 시장에 풀리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지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주변 인물들로부터 자금을 융통했다.

혹시라도 돈에 밀려 패배하는 상황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 것이다.

실제로 발렌티노 후작은 총알을 1만 골드 이상을 확보했고, 시작부터 1만 골드를 부르며 기선을 제압했다.

경매 전.

가신들은 말했다.

다 좋은데, 시작부터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있냐고.

천천히 올리면서 최대한 싸게 받자고 제안했지만, 발렌티노 후작은 단호하게 그들의 말을 거절했다.

써드 노-네임은.

최고가를 갱신할 가치가 있었다.

수집가로서, 자신이 탐내는 수집품이 헐값에 팔리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물론 애초에 1만 골드 아래로 판매되지도 않겠지만, 발렌티노 후작은 1만 골드를 제시함으로써 어떤 가격을 부르든 그 이상을 부르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보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평소라면 점잖게 그 시선을 즐기겠지만, 오늘은 그 어떤 경쟁도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로 눈을 부릅떴다.

1초.

2초.

시간이 흘렀다.

침묵 끝에,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1만 골드, 1만 골드에 1번이 낙찰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설마 써드 노-네임의 경쟁이,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로 승부가 날 줄은 저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낙찰.

기다리던 단어가 언급되는 순간.

발렌티노 후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체면 따위는 바닥에 내던진 채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예쓰으으으으으으으!”

행복.

그 자체였다.

한달음에 달려가 검을 받은 발렌티노 후작은, 호위로 따라나선 기사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주변 가문들과의 약속을 잡아라. 오전 오후로 나눠서, 매일 2명씩은 만나야겠다.”

“……무슨 일로 만나시려는 겁니까?”

“무슨 일이긴. 이 대단한 보물을 낙찰받았는데, 일일이 찾아가서 직접 자랑해야 하지 않겠어?”

말하면서도 히죽히죽,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에.

시몬스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사는, 복잡한 눈빛으로 발렌티노 후작을 보았다.

‘정말 가문을 위한 일이 맞겠지……?’

이 순간만큼은.

발렌티노의 의도가 진심으로 의심되는 그였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써드 노-네임의 낙찰.

드미트리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슈가 잦아들 무렵, 드미트리의 통신 기지에서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삑.

통신기 너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속을 밝히고 대답을 기다리던 병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말씀 없으시면 끊습니다.”

그때였다.

이만 통신을 끊으려는 순간, 불안정한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도와…… 여기는…… 포로로…… 크악!]

툭.

통신이 끊겼다.

제대로 알아먹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병사는, 툭툭 끊기는 단어들로 하나의 가설을 떠올렸다.

‘도와달라는 말과 포로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통신 좌표는 서부 전선 너머.

본능적으로 알았다.

통신을 보낸 상대는.

적군에게 붙잡힌, 전쟁 포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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