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3화 (313/615)

313화 역작(力作) (4)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신들은 ‘수집가’의 명성을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판단까지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단적인 사업 철수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다.

하나의 사업을 진행하면서 들인 돈과 노력이 있기에, 발렌티노 가문의 충신들은 꼭두각시처럼 웃고만 있진 않았다.

그중.

발렌티노 후작을 30년 동안 모신 시몬스가 말했다.

“영주님. 영주님의 취미 생활은 당연히 존중합니다만,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 님의 검을 낙찰받기 위해서 열매를 수확하는 과정만 남은 보석 사업을 철수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희에게는 타당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가신들이 힘을 보냈다.

발렌티노 후작은 고지식하지 않았다.

발렌티노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언제든 충언을 내뱉어도 좋다고 말했기에, 가신들은 충언의 대가를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가신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면.

발렌티노 후작은 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석 사업을 철수하지 않는 선에서 이번 경매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너희가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 님의 검을 낙찰받는 일은 단순히 내 개인의 수집욕만을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드미트리는 공국의 지위를 넘어섰고, 왕국 연합의 수장으로서 양대 제국을 제외한 모든 판도를 휘어잡고 있다. 그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느냐?”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의미입니다.”

“맞다. 발렌티노는 운이 좋게도 시대의 흐름에 편승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동아줄을 움켜잡았고, 지금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발렌티노는 카이로의 대부호다. 이는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우물 밖을 벗어나는 순간 대륙에서 발렌티노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왕국의 대부호들.

우물 안 개구리였다.

실질적으로 대륙의 상업을 주도하는 이들은 결국, 제국에 뿌리를 내린 강대국 출신들이었다.

발렌티노는 그동안 우물 안에 만족했다.

충분히 풍요로운 삶이었지만, 눈앞에 기회가 찾아왔는데도 움켜쥐지 않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번 기회를 살려 대륙에 진출할 것이다. 헥토르, 움베르토, 레드포드, 프랑크. 네 개의 왕국에 진출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대륙의 사업을 주도할 수 있다. 문제는 기존에 뿌리를 내린 상인들을 어떻게 이겨 내느냐다. 나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명검이 그 해결책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제작한 일곱 자루의 명검 중 두 개를 보유했으며, 드미트리가 지금의 명성을 얻기 전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가문. 발렌티노는 단순히 카이로의 대부호로만 불리지 않을 것이다. 써드 노-네임을 낙찰받으면서 우리의 행보를 부풀린다면, 대륙에 진출하는 순간 우리의 배후에 ‘드미트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발렌티노는 사업가였다.

어떤 일을 행할 때, 사업적으로 이득이 되는 부분들을 빠르게 계산했다.

“우리는 전쟁 이후를 대비해 많은 물자를 비축했다. 철제, 식료품 등등. 처음에는 그 막대한 물량을 카이로 내부에서 해소할 생각이었지만, 드미트리를 등에 업은 순간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발렌티노는 대륙으로 진출할 것이다. 카이로 제일의 대부호가 아니라, 대륙 제일의 대부호로 거듭날 것이다. 지금의 나는, ‘카이로의 대부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써드 노-네임을 보는 순간.

발렌티노 후작은 생각했다.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앞으로도 로만 드미트리의 검을 낙찰받기 위해서는, 우물 안의 재력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수집에 대한 강한 집착이 대륙 진출로까지 이어졌다.

상황이 변했다.

발렌티노 후작의 계획에, 시몬스가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영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영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대륙 진출.

발렌티노 가신들의 눈빛이, 강한 열망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회의가 끝났다.

대부분 떠나간 자리.

발렌티노 후작의 드미트리 행을 호위했던 기사가, 마지막으로 남은 시몬스에게 물었다.

“……정말 써드 노-네임의 낙찰이 대륙 진출로 이어지리라고 보십니까? 이상적인 계획일 뿐, 현실은 검 한 자루를 낙찰받기 위해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기사인 제가 상업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겠지만, 이게 발렌티노를 위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몬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기사를 보았다.

발렌티노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그는, 오라를 각성하며 발렌티노의 미래를 생각하는 충신이 되었다.

강직한 사내다.

각진 얼굴과 흔들림 없는 눈빛은, 발렌티노가 바라는 모습으로 성장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어쩌면 이번 일은, 검 하나를 낙찰받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말리지 않는 겁니까?”

“영주님이 원하는 목표가 생겼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사가 의문스럽다는 반응을 보이자, 시몬스가 피식 웃었다.

“너는 발렌티노 후작님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카이로의 대부호? 탐욕의 수집가? 그분은 많은 별명으로 불리지만, 확실한 것은 탐욕스러운 수집 욕구를 모두 충족하고도 카이로의 대부호라고 평가받을 만큼 막대한 부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선대의 재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룬 성과가 아니다. 발렌티노 후작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가문의 재산을 증식시켰고, 그 과정에는 수집품에 대한 강한 열망이 뒷받침되었다.”

발렌티노.

재밌는 사내였다.

돈이 많아서 수집품에 관심을 돌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수집품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기에 수집품을 사들일 재산을 바랐다.

발렌티노의 재산은 그렇게 증식했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을 만큼의 재산이 있어야, 수집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돈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발렌티노 후작이 대륙 진출을 말했다.

카이로에서의 생활만으로도 만족하던 그가, 대륙 진출을 원한다는 것은 더한 부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왜일까.

간단한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검.

앞으로 그것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재력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발렌티노 후작님은 쓴 만큼 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분이 저렇게까지 포부를 밝힐 정도라면, 우리는 그분을 믿고 지지해야만 한다. 명심하거라. 카이로의 대부호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안 현실에 만족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어들인 사람이라는 것을. 그분이 목표를 대륙 진출로 정했다면, 머지않아 그것은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말에.

기사는 소름이 돋았다.

발렌티노 후작은 범인(凡人)이 아니었다.

천재와 미친놈은 한 끗 차이라고 했던가.

수집품을 위해 대륙 진출을 말하던 발렌티노 후작은, 확실히 정상인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 * *

경매로 판매하는 써드 노-네임과는 달리.

나머지 두 자루의 검은, 새로운 주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선물이다.”

선물의 상대.

크리스와 케빈이었다.

검을 받아 든 그들은, 감격에 차오른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검의 이름은 퍼스트 노-네임, 세컨드 노-네임이다. 무공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그 검들은 너희가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구현해 줄 것이다. 검은 단순한 철제(鐵製) 무기가 아니다. 검을 충분히 이해하고 능력을 끌어올린다면, 그때부터 새로운 영역에 들어설 수 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케빈의 반응이 이상했다.

처음에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한 표정을 보이던 그가, 자신의 검이 ‘세컨드 노-네임’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급격하게 시들어 버렸다.

분명히 좋은 무기였다.

손잡이를 잡아 보는 것만으로도 검의 가치를 알아차렸지만, 케빈은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참으려 했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기에, 웬만해서는 진심을 억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시기심이, 열등감이, 케빈의 진심을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했다.

“……주군. 정말 주제넘은 부탁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퍼스트를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의외의 반응이었다.

케빈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물었다.

“이유는?”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열등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퍼스트(first)의 칭호를 부여받는 것이 싫습니다.”

* * *

재밌는 상황이었다.

전생.

백중혁의 삶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광마가 문제를 일으켰었지.’

처음에는 단순한 문제였다.

사파의 남은 세력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혈마는 적의 본거지를 우선으로 쓸어 버려야 한다고 말했고, 광마는 도주하는 적들을 쫓아서 분란의 씨앗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당한 타협을 통해 상황을 정리하면 됐지만, 그날따라 둘 다 물러섬이 없었다.

언성이 높아졌다.

혈마는 광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통 마교의 사람들은 혈마교의 교주였던 자신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는데, 길거리 출신에 불과한 광마는 백중혁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충성심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서열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그날의 다툼은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둘 다.

검을 뽑았다.

격렬한 충돌이 일었고, 사천왕(四天王)의 싸움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결국.

승자는 혈마였다.

바닥에 쓰러진 광마를 바라보며, 혈마는 질린다는 표정을 보였다.

“……정말,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은 녀석이구나.”

간발의 차이로 승리했을 뿐.

광마는 위협적이었다.

악착같이 따라붙는 공격에, 만약 광마가 조금이라도 일찍 무공을 배웠다면 자신이 패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그날의 승부로 혈마는 광마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받았다.

상황이 정리되고 마교로 복귀한 광마는, 피로 물든 얼굴로 백중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유를 물었다.

왜 그랬냐는 물음에, 광마는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혈마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주군이 가장 신뢰하는 제일(第一)의 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혈마든, 검마든. 언제든 제가 쓰러트려야 할 상대이기에, 이번 기회에 한번 확인했을 뿐입니다.”

황당했다.

같은 사천왕이라 불리면서도.

광마는 제일의 칭호에 집착했다.

백중혁이 언급할 때, 광마의 이름이 가장 먼저 불리기를 바랐다.

그때도, 지금도.

백중혁은 수하들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실력을 통해 서열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문제였고, 그것은 그들의 주인일지라도 개입할 수 없었다.

실력이 배제되어 있는 서열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억지로 찍어누른다고 해서, 더 강한 존재가 약한 존재의 명령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똑같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케빈에게 현실을 말해 주었다.

“나는 실력에 따라 검의 주인을 결정했다. 네가 만약 퍼스트를 가져가고자 한다면, 스스로 그에 어울리는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면 된다.”

순간.

케빈의 눈빛이 변했다.

바라던 대답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크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번 붙으시죠. 제가 그 검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 * *

최근.

드미트리 사람들은 하나의 주제를 떠들어 댔다.

“드미트리의 섬광, 크리스와 드미트리의 악귀, 케빈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크로노스와의 전쟁.

그 자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두 존재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입에서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대부분은 크리스가 당연히 이긴다고 말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케빈의 변칙적인 스타일이 변수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면서 술자리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크리스도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기에, 저따위 소문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케빈의 발언은, 크리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말은, 날 이길 수 있다는 의미냐.”

“예.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크리스의 목표는 로만 드미트리다.

하늘을 바라보며 나아가던 그에게 있어, 그 이전에 누군가에게 따라잡히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고로.

“그래, 도전을 받아들이마. 주군이 왜 내게 퍼스트 노-네임을 부여했는지를, 실력으로 증명해 주지.”

스파크가 튀었다.

전생의 그날처럼.

크리스와 케빈은, 서로를 향해 검을 들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