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세 명의 손님 (2)
헥토르의 별.
천재 마법사.
에드윈 헥토르를 표현하는 수식어들은, 그가 살아온 삶에서 그의 위치가 특별했음을 증명했다.
스스로도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자신감은 서서히 깎여 나갔다.
남부 전선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만났을 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했고, 헥토르를 굶주리게 만든 흉수를 알아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깊은 무력감을 선사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에드윈 헥토르는 멈추지 않았다.
독하게 채찍질하며, 천공의 마탑에서 마법을 수련하고 로만 드미트리와 연합을 맺는 등,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했다.
그런데.
일말의 자신감마저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크로노스와 드미트리의 전면전에서, 크로노스 제국은 무려 8서클의 마법사를 동원했다.
‘……8서클의 경지는 내가 아무리 발악하고, 수십 년의 시간을 수련에 몰두한다고 한들 절대 대적할 수 없는 상대다. 크로노스 제국은. 내가 복수하길 바라는 존재는 그런 괴물이고, 남부 전선에서 나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로만 드미트리는 어느새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만큼 앞서가 버렸다.’
이상했다.
천공의 마탑주는 에드윈 헥토르의 발전을 칭찬하며 ‘세기의 천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로만 드미트리와 헥토르의 원수인 크로노스.
손을 뻗어 그들에게 닿기에는, 그들은 이미 천외(天外)의 경지에 도달했다.
악에 받쳤다.
이를 악물었다.
정치적인 활동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수련에 투자하며, 에드윈 헥토르는 마법적인 발전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드윈 헥토르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검술 발표회.
사람들에게 ‘검술 혁명’을 말하던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서, 마법 학계의 미래를 보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뇌를 상단전이라고 표현했다. 중단전인 심장에 서클을 형성하고, 하단전인 배꼽 아래 부근에 오라의 그릇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상단전 또한 발달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상단전의 비밀을 풀어낸다면. 이것은 마법 혁명의 실마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마법.
미지의 힘은 어떻게 발현되는 것일까.
심장에 서클을 형성하고, 서클의 마나를 자연의 마나와 동화시켜 천재지변이라고 표현할 만큼의 재앙을 인간의 의도대로 조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마법사에게 필요한 조건은 서클만이 아니다.
극한으로 발달한 뇌. 서클은 마나의 통로라면, 뇌는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과도한 정보와 마나의 흐름을 감당하기에, 서클과 뇌가 모두 발달해야만 비로소 고서클의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서클이 상승할수록, 심장과 뇌가 발달했다.
보통 천재라고 불리는 부류들이 마법사가 되는 것은, 뇌의 발달이 마법적인 재능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고로.
발상을 전환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한 이론이 상단전의 발달을 의미한다면, 후천적으로 ‘뇌의 능력’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는 그야말로 엄청난 가설이었다.
만약 3서클의 마법사가 5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발달을 이룬다면, 해당 마법사는 동급의 마법사들을 압도하는 위력을 보일 것이다.
단순히 마법의 위력만이 상승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법을 처리하는 속도 등 복합적인 시너지가 분명히 비약적인 발전으로 직결될 것이다.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의 미래.
크로노스 제국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셰피르와 같은 괴물을 상대할 힘이 필요했다.
결국.
에드윈 헥토르는 결단을 내렸다.
스스로가 강해지기를 바라기에, 같잖은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드미트리로 떠났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시각.
에드윈 헥토르는, 호프만이 떠난 드미트리에 도착했다.
* * *
상단전(上丹田)에 대해 알려 달라는 말.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당혹스러울 법한 상황인데도, 담담한 눈빛으로 에드윈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드미트리와 헥토르는 같은 왕국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동맹국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상단전에 대해 알려 드릴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왜, 그런 노고를 감수해야 하는 겁니까?”
그 말에.
에드윈 헥토르의 눈빛이 변했다.
다소 호의적이지 못한 대답이었으나,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상단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건 기회였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저 또한 무모한 부탁이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검술 발표회에서 ‘단전’의 개념을 설명했다고는 하나, 대가 없는 정보 공유는 드미트리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일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상단전이 마법 혁명의 실마리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만약 정보 공개를 통해 헥토르가 유의미한 성과를 보인다면, 그 과정과 결론을 모두 투명하게 공개하겠습니다. 드미트리가 헥토르가 이룬 성과를 똑같이 이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진실을 숨기지 않았다.
칼자루는 드미트리에게 있었다.
절대적인 을(乙)의 입장에서, 어쭙잖은 협상은 관계를 망치리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대외비입니다만, 현재 비밀리에 천공(天空)의 마탑을 헥토르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헥토르의 능력을 믿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천공의 마탑과 제가, 상단전의 비밀을 풀어헤쳐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이번 전쟁으로 크로노스 제국은 상상 이상의 마법 전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셰피르의 마법은 파괴적이었고, 그들의 한계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왕국 연합에도 그에 대항할 힘이 필요합니다. 헥토르가, 그리고 천공의 마탑이. 크로노스의 마법사들을 상대하는 대항마가 되겠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더러운 야욕을 드러냈고,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천공의 마탑을 위기감에 빠트렸다.
더는.
크로노스를 믿을 수 없었다.
천공의 이전은, 드미트리에게 있어 희소식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드미트리에는 피닉스가 있습니다. 그들만으로는, 상단전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피닉스의 능력은 인정합니다만, 저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휴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이 언제 다시 대륙 정벌의 야욕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의 힘을 합친다면 빠르게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단전을 연구하는 과정에 피닉스 마탑이 합류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결과물을 독식하기 위함이 아닌. 같이 노력해서,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길 바랄 뿐입니다.”
웃었다.
에드윈 헥토르의 판단은 옳았다.
솔직하게 목적을 밝힌 것은, 을의 포지션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옮기시죠.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 * *
도착한 장소는 마탑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피닉스의 마법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대열을 갖추었다.
“주군, 무슨 일이십니까?”
펠릭스였다.
그는 에드윈 헥토르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의아스럽다는 눈빛을 보였다.
“마법 연무장을 사용하고자 한다. 자리를 마련하고, 녹스를 불러라.”
“알겠습니다.”
특별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즉각적인 이행.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그가 어떤 명령을 내리든 펠릭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반문 없이 따랐다.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신적인 존재였다.
프랑크 왕국에서 다 무너져 가던 피닉스를, 로만 드미트리가 구제해 주어 마탑 재건(再建)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펠릭스의 안내에 따라 마법 연무장으로 이동했고, 그곳에는 명령대로 녹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녹스 앞으로.”
“예.”
녹스가 나섰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에드윈 헥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듣기로는 에드윈 헥토르 님이 천공에 들어간 이후, 깨달음을 얻어 5서클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알고 있습니다. 녹스는 에드윈 헥토르 님과 마찬가지로 5서클의 마법사입니다. 만약 마법 대련을 통해 녹스를 쓰러트린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상단전의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순간.
에드윈 헥토르는 묘한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상단전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로.
“대련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에드윈 헥토르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을 택했다.
* * *
연무장 위.
에드윈 헥토르가 상대를 바라보았다.
마법사와 마법사의 대결.
서로 서클까지 동일한 상황에서는, 선공의 성공 여부가 매우 중요했다.
‘빠르게 우위를 점하는 순간. 동급의 마법으로 상황을 뒤엎는 것은 힘들다. 시작부터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으로 상대의 캐스팅을 방해하고, 후속 공격으로 분위기를 가져와야만 한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마법은 제약이 많다.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수록 캐스팅 과정과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기에, 서로 승부를 겨루는 1대1 대결에서 여유롭게 본인의 마법을 사용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워 메이지들의 경우에는 고서클의 마법사가 잘 없었다.
그들은 저서클의 마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부류들이고, 에드윈 헥토르는 충분한 전쟁 경험으로 워 메이지의 방식을 몸으로 터득했다.
서클이 요동쳤다.
예리한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하고 있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신호를 보냈다.
“시작!”
“라이트닝 애로우(Lightning Arrow).”
빠지지직.
선공은 에드윈 헥토르였다.
캐스팅을 생략할 수 있는 1서클 마법을 사용함과 동시에, 아쿠아 애로우(Aqua Arrow)를 덧붙여 속성의 파괴력을 높였다.
물과 전기의 힘이 뒤섞여 녹스를 공격했다.
에드윈 헥토르는 곧바로 서클을 확장시키며, 빠르게 고서클 마법의 캐스팅으로 후속 공격을 도모했다.
빨랐다.
그런데.
“파이어 캐논(Fire Cannon).”
화악-
화르르르르르르륵.
강렬한 불길이 뿜어졌다.
에드윈 헥토르는 눈을 부릅떴다.
상대가 특별한 캐스팅도 없이 5서클의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메모라이즈를 통해 캐스팅 과정을 생략했다는 의미였다.
의외였다.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 ‘메모라이즈 마법’은 딱 한 번만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았는데, 시작부터 5서클 마법을 발현해서 우위를 점하려 할 줄은 몰랐다.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메모라이즈 마법이 아닌, 간단한 임기응변을 보였다.
“스톤 월(stone wall).”
쿠르르르릉.
기존의 캐스팅을 생략.
기본적인 원소 마법을 벽으로 변형시켰다.
파이어와 같은 무형의 힘을 벽으로 형성하는 것은 4서클 이상의 마법이지만, 스톤 월은 캐스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간단한 마법이었다.
그것으로 상대의 마법을 막아 내지 않았다.
본인이 서 있는 땅에 스톤 월을 형성하였고, 에드윈 헥토르는 순식간에 공중 위로 떠올랐다.
탓-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발상의 전환.
굳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불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녹스의 마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화염이 폭발했다.
스톤 월은 단번에 녹아내렸지만, 덕분에 에드윈 헥토르는 기회를 포착했다.
“메모라이즈, 썬더 캐논(Thunder Cannon).”
찌직.
찌지지지지직.
그간의 경험.
에드윈 헥토르는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괴물을 만났다.
단순히 마법의 파괴력만 믿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는 계속되는 경험을 통해 워 메이지들의 임기응변을 몸에 익혔다.
위험한 방법일 수는 있다.
조금만 틀어졌어도 녹스의 마법을 피하지 못하겠지만, 과감한 판단으로 ‘메모라이즈’의 우위를 점한 에드윈 헥토르는 반격의 기회를 포착했다.
마법사 간의 대결.
서클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이미 메모라이즈를 사용한 녹스로서는, 5서클의 썬더 캐논을 정면에서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블링크다.
공간을 이동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빠르게 공격할 수 있는 썬더 캐논을 택했다.
블링크는 만능이 아니다.
그것 또한 분명히 ‘캐스팅’의 시간이 필요하고, 메모라이즈를 사용한 직후의 녹스는 저서클의 마법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
그게 딜레마였다.
서클의 차이로 인해, 녹스는 단 한 번의 실수가 패배로 직결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승리를 확신하진 않았다.
다만.
우위를 점했다고는 생각했다.
에드윈 헥토르는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하는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파이어 캐논.”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녹스가.
또다시 5서클 마법을 발현했다.
전기와 화염이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자, 에드윈 헥토르는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게 무슨?!’
메모라이즈를 사용한 걸까.
아니었다.
그렇다기에는 주변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캐스팅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빠르게 캐스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마력을 일으켰다.
패배를 시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헥토르의 미래에, 목숨을 걸었다.
그 순간.
“대련은 이미 끝났습니다.”
바로 뒤편에서.
녹스가 나타났다.
그는 5서클의 마법을 연달아 사용한 것으로도 모자라, 블링크로 뒤를 선점할 여력도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천공의 마탑에서 피나는 수련을 거듭했고, 적어도 동급의 마법사들에게는 밀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압도적인 결과였다.
에드윈 헥토르가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자,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에드윈 헥토르 님. 드미트리는 이미 ‘상단전’의 이론을 마법에 접목했습니다.”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발견했다고 생각한 미지의 영역을, 드미트리는 이미 점령하고 깃발까지 꽂아 버린 상태였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제가 왜, 헥토르에 상단전의 비밀을 알려 주는 노고를 감수해야 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