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7화 (297/615)

297화 역사에 남을 첫걸음 (3)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나의 저장 공간인 ‘단전’으로부터 비롯되는 무공의 위력에, 사람들은 눈을 부릅뜬 채로 말을 잃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반신반의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을 초대하는 순간부터, 설마 드미트리만의 전유물을 발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현실을 외면하려고 해도, 기존의 체계를 무너트리는 검술 혁명(革命)은 이미 시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궁금하신 사항에 대해 질문받겠습니다.”

관객석 한편.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언하라는 듯이 시선을 주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술 학회의 학회장 세르게이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이론은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마법사들처럼 단전을 마나의 저장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만, 로만 드미트리 님의 발표에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대체 단전으로 마나를 어떻게 유도하고 구속력을 발휘하실 생각입니까? 마나는 자유로운 힘이고, 심장의 생명력으로 그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서클과 같은 저장 공간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일지라도 그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공격적인 발언이었다.

머리를 쥐어짜 내, 어떻게든 깎아내릴 여지를 찾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어째서 마나의 저장 공간으로 단전을 택했는지를 고민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육체를 순환하는 마나는 일정 시간 동안 머무르는 포인트들이 있는데, 그 장소들을 저는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 상단전인 뇌. 두 번째 중단전인 심장. 세 번째 하단전인 배꼽 아래. 마나를 섬세하게 다루고 연구했다면, 분명히 이 세 가지 포인트에서 구속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상단전은 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곳이라 마나의 저장 공간으로 적합하지 않다면,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는 이 하단전은 다릅니다.”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완벽한 논리에 말문이 막히자, 세르게이는 화제를 돌렸다.

“……그, 그렇다면! 알렉산드르 황제 폐하의 오라 활용법이 틀렸다고 단언할 게 아니라, 단전을 활용한 분출로 오히려 폭발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방법의 조화라면, 긍정적인 시그널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오라 활용법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무분별한 분출로 인한 낭비가 오라의 위력을 반감시키기 때문입니다. 단전이 생긴다면 마나는 완벽하게 통제를 따릅니다. 굳이 무분별하게 분출하지 않아도, 중간에 마나가 새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말의 마나로 강력한 위력의 오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르의 이론이 틀렸다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무공.

중원 무림의 역사가 녹아 있는 결과물이다.

알렉산드르가 만들어 낸 ‘모조품’으로는, 애초에 이 논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세르게이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 발표가 끝나면 검술 학회가 몰락하리라는 생각에, 그는 발악하듯 모두가 궁금해할 말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충분히 대단한 이론인 것은 인정합니다만, 이걸 대체 왜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론이라면.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드미트리의 적대국이었던 크로노스 제국은 이번 발표회에 초대받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지 않습니까?”

순간.

피식,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세르게이를 지나, 크로노스 제국의 대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드미트리의 기술을 알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첩자들을 보내기에, 굳이 고생하지 말라고 이번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드미트리는 폐쇄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일반 사병들에게도 ‘무공’을 전수하는 순간, 언제고 무공의 정보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오라가 대륙 전체에 퍼졌던 것처럼. 그렇기에, 이번 자리를 통해 드미트리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이고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경악스러웠다.

어차피 밝혀질 사실이기에.

공개적인 발표로, 로만 드미트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발표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발표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적인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열광하는 사람들 속에.

크리스가 있었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처음에는 미약한 떨림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뛰었다.

“너에게 하나만 묻겠다. 너는 그 경지에 오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훈련 방식에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나?”

로만 드미트리에게 오라를 가르치던 날.

그가 했던 말이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화가 났었지만, 최초로 오라를 만들어 낸 사람조차도 같은 인간인데 어째서 맹목적으로 믿느냐는 물음에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크리스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분석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가르침조차도 본인에게 필요한 만큼만 적용했고, 그만의 기술을 개발해 나가며 오롯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영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세상에 단 한 명.

로만 드미트리만이 알렉산드르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했고, 자신조차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현실로 입증했다.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 또한 과거의 자신처럼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의구심을 보이다가, 발표가 끝난 지금은 오라의 체계가 재정립되었음을 받아들였다.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흐름을 주도하는 존재.

대세가 어떻게 되든, 본인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하는 존재.

그게 바로.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었다.

확실했다.

‘당신을 넘어선다면, 그 자리는 분명히 대륙 제일일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크리스의 이상(理想)이자, 가장 존경하는 존재이며, 그가 넘어서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였다.

* * *

검술 발표회가 끝나고.

로만 드미트리를 포함한, 왕국 연합의 대표들이 모였다.

이번 발표.

로만 드미트리가 검술 혁명을 일으키는 모습을 바라보며, 왕국 연합의 대표들은 대륙의 정세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의 명성을 추락시켰다.

앞으로의 판도에서 드미트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크로노스 제국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움베르토 국왕.

그가 대표로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의도는 대체 무엇입니까? 단순히 크로노스의 만행에 대항하려는 의도라기에는, 오늘 발표회는 명백히 크로노스를 도발하는 일이었습니다. 무공이 언젠가는 대중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역사가 그를 증명하지만, 정말 왕국 연합의 안위를 생각했다면 저희에게 먼저 정보를 공개하고, 이후에 크로노스 제국이 후발주자로 따라붙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진심을 말씀해 주십시오. 왕국 연합은 약소국들의 생존을 위한 집단입니까, 아니면 드미트리만의 또 다른 야망이 있는 것입니까?”

검술 발표회.

로만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의 명성을 강탈했다.

드미트리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왕국 연합의 생존과 직결된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 혹은 크로노스.

움베르토 왕국 입장에서는 둘 다 포식자였다.

크로노스를 조롱하듯 무공의 정보를 밝히는 모습에서, 움베르토 국왕은 포식자의 향기를 맡았다.

만약.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물리친 이후에 ‘제국’으로 도약하기를 바란다면, 왕국 연합은 그때 드미트리를 억제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또 다른 지배를 경험하게 되지는 않을까.

움베르토 국왕으로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물이라는 사실에 의중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드미트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왕국 연합은 이해타산이 맞았기에 생겨난 결과물입니다. 저는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리고, 드미트리가 대륙 제일의 강국으로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크로노스 제국으로부터 살아남길 바라기에, 우리는 일시적으로 왕국 연합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결국, 크로노스와 같은 길을 가시겠다는 의미입니까?”

“크로노스 제국과 같은 길이 ‘정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라면. 예, 맞습니다. 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이 바라는 미래와 제가 추구하는 바는 다릅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정점의 자리에 오른다면, 드미트리는 크로노스와 같이 다른 왕국들을 핍박하고 희생을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드미트리가 샐러맨더의 정점임을 인정하는 단 하나의 사실. 그것을 바랍니다. 적어도 각 나라의 영역을 인정하는 한에서, 샐러맨더 대륙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고자 합니다.”

엄청난 발언이었다.

대륙 제일을 말하는 포부에, 몇몇 대표는 놀란 표정을 보였다.

움베르토 국왕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안목은 옳았고, 대륙 제일을 말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핍박과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제일의 국가. 로만 드미트리 님의 말씀처럼 드미트리가 중립을 지키며 대륙의 근간이 되어 준다면, 그것은 저희가 바라는 유토피아(Utopia)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크로노스든, 발할라든. 힘을 갖추기 전에는 우리와 같은 일개 왕국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힘을 얻었고, 그때부터 포식자로서 남들을 잡아먹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역사가 증명했다.

강자는, 강자로서 권리를 바랐다.

그것은 약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의미하기에,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약자들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입에 발린 말은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의 야망은 극에 달했고, 우리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무너진다면. 누군가는 그 판도를 휘어잡아야만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모두가 평등한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움베르토 국왕님이 ‘포식자’의 습성을 언급한 것처럼 이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드미트리는 평등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일의 국가로서, 크로노스 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샐러맨더 대륙을 지탱하고자 합니다. 지금부터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크로노스 제국이냐, 드미트리냐. 선택에 따라, 드미트리는 앞으로 ‘왕국 연합’을 지속할 것인지를 결정할 생각입니다. 서로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다면, 굳이 연합으로 묶여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선택권을 넘겼다.

대륙의 미래가 걸린 문제.

왕국 연합의 대표들은, 큰 고민에 빠져들었다.

* * *

같이 생존하느냐.

생존을 도와주는 대신, 드미트리가 정점의 자리를 차지하느냐.

완전히 다른 뉘앙스의 발언이었다.

한참을 고민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포부는, 약소국의 국왕으로 살아오던 사람들로서는 선뜻 결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정적을 뚫고, 에드윈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검술 발표회가 단순히 크로노스 제국에 보여 주는 메시지가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드미트리가 숨기는 것보다는 드러내는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무공’에 대해 알았다면 선점한 효과를 최대한 누리려고 했을 텐데, 드미트리는 과감하게 정보를 공개했습니다. 그것이 드미트리의 그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미래에, 드미트리는 일개 왕국으로 남을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말처럼.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의도적이었다.

하나의 그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발표로 인한 다양한 그림을 예상하고 행동에 옮겼다.

“어차피 선택의 순간은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크로노스는 그간 악행을 벌이는 명확한 선례를 보여 주었다면, 드미트리는 적어도 우리에게 신뢰를 주었습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드미트리의 도움 없이는 크로노스의 악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헥토르는 앞으로 드미트리에 미래를 맡기고 싶습니다.”

그가 포문을 열었다.

에드윈 헥토르의 확고한 발언에, 다니엘 카이로와 레드포드 국왕이 말을 덧붙였다.

“카이로는 처음부터 드미트리와 같은 배를 탔습니다. 저희는, 끝까지 드미트리를 신뢰하고 따르겠습니다.”

“레드포드는 드미트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국가의 의미를 상실했을 겁니다. 앞으로의 미래에 대륙을 지탱할 제일의 국가가 필요하다면. 그 존재는 드미트리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실었다.

다수의 의견에, 움베르토와 프랑크 국왕으로서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세에 휩쓸린 것이 아니다.

에드윈 헥토르의 발언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야말로.

진정한 왕국 연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번뜩.

알렉산드르가 눈을 떴다.

조각을 통해 검술 발표회를 지켜본 그는, 경악으로 물든 눈빛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언행은, 알렉산드르를 충격에 빠트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