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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화 (294/615)

294화 드미트리로 향하는 사람들 (7)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4차 테스트를 앞두고 다양한 방식을 생각했던 지원자들은, 설마 4차 테스트의 목적이 첩자의 색출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이 자리에는 첩자가 있었다.

스캇이라는 이름의 용병 출신의 사내는, 첩자라는 단어가 거론되면서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제길.’

욕을 삼켰다.

그는 크로노스 제국으로부터 의뢰를 받았고, 드미트리 군에 스며들어서 정보를 빼내 오는 역할을 맡았다.

상황은 너무나도 순조로웠다.

3차 테스트를 무사히 마치고 이제는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스캇을 포함한 첩자들을 시험대에 올렸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첩자를 죽이겠다는 말.

아무도 그 발언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장의 악마다.

단 한 번도 타협을 허락하지 않았고, 포로를 붙잡는다고 할지라도 정치적인 이득보다는 적들을 처단하는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전쟁엔 비명과 죽음이 난무했다.

사람들이 대륙 제일의 강국이라고 말하는 크로노스 제국조차도, 로만 드미트리를 멈추기 위해서 50만 골드를 바치는 수모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첩자들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고, 지금 이 자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신이시여.’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드미트리로 흘러들어 오는 과정에서 신분을 완벽하게 숨겼지만, 드미트리의 정보 길드는 정보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을까. 알아냈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말을 믿고 정체를 밝히는 것이 맞을까.

적이라면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는 사람이 바로 로만 드미트리인데, 드미트리의 명예를 걸었다고 한들 멍청하게 정체를 밝히는 것이 옳을까.

머릿속이 뒤얽혔다.

심장이 터져 버릴 듯 뛰는 상황에, 스캇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정말 살려 주시는 겁니까?”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델리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던 대머리 사내였는데, 그가 창백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저는 발할라 제국의 의뢰를 받아 이번 시험에 응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다시는 드미트리에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탁.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스캇으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대머리 사내의 마음에 공감이 되면서도, 정체가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실직고한 것은 멍청한 판단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떠올랐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드샨.”

흠칫.

대머리 사내가 놀랐다.

그의 이름은 드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드샨은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공포가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드샨의 자백을 받아들인 것과 그의 정체를 미리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원자들 틈에 숨어 있던 첩자들의 자백을 끌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저도…….”

“살려 주십시오!”

“저도 크로노스의 첩자입니다!”

순식간이었다.

여기저기서 첩자라고 밝히는 사람들로 인해, 시험장이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한둘이 아니었다.

600명의 지원자 중 십수 명에 달했고, 첩자가 아닌 사람들로서는 얼떨떨한 표정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첩자들은 모두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의뢰를 받았다.

드미트리가 그만큼 양 제국의 견제를 받는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그제야 드미트리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드미트리는.

제국의 대항마였다.

드미트리의 미래는, 제국의 반대편에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저벅저벅.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스캇의 바로 앞에 서서 그 너머를 바라보며 차가운 표정을 보였다.

“마지막 기회다. 1분 남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캇이 고개를 숙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마치 자신을 저격하는 것 같은 상황에, 차마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눈이 마주친다면. 생각을 완전히 읽힐 것만 같았다.

스캇은 주먹을 꽉 쥔 채로 고민을 거듭했지만,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선택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가족들.

그들이 인질로 잡혔다.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못한다면, 가족들은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이대로 죽는구나.’

죽음을 택했다.

시간이 끝났다.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날아가 버린 상황에, 스캇은 눈을 질끈 감았다.

“4차 테스트는 끝났다. 자백한 이들을 제외한 모두는, 테스트에 합격했다.”

그 말에.

스캇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 * *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합격이라니.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스캇은 티가 날 정도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첩자라고 지목하지 않았다.

다만.

지원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도 너희 중에는 첩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아직 드미트리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임무를 위해 목숨을 건 너희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나, 앞으로 나의 사병으로 지내며 너희는 선택해야 할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스캇으로서는,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를 잊고 나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처음 부여받은 임무처럼 드미트리를 배반하는 행동을 할 것이지.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나는 그에 대한 확실한 상벌(賞罰)을 부여할 것이다.”

넋을 잃었다.

로만 드미트리.

난생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동안 정보를 빼돌리는 첩자의 임무를 수차례 맡았지만, 로만 드미트리처럼 첩자의 존재를 알고도 방관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드미트리의 정보력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스치듯 바라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시선은, 이미 정체를 알고 있다는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감이었다.

본능적으로, 정체가 발각되었음을 알았다.

“축하한다. 너희는 현 시간부로, 나의 사람이 되었다.”

합격.

목표를 이루는 순간에, 스캇은 차마 웃음을 보일 수가 없었다.

* * *

시험이 끝났다.

합격자는 500명이 넘었고, 그들에게 마지막 일주일의 휴가를 부여했다.

겁에 질린 첩자들은 휴가 기간에 도망칠 것이고, 드미트리에 합류한 이후부터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선택지에서 본인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드미트리의 정보를 빼돌릴지. 아니면, 드미트리에 정착하는 판단으로 첩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은 그들의 몫이었다.

장소를 옮겼다.

로만 드미트리와 둘만 남자, 크리스가 물었다.

“……첩자들을 왜 살려 두신 겁니까? 저로서는, 주군의 판단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곳 드미트리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어떤 명령이든 신뢰하며 따를 생각이나, 첩자를 방관하는 태도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크리스. 아무리 대단한 정보 길드를 보유했다고 한들, 정체를 숨긴 첩자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발할라와 크로노스. 그들은 드미트리를 경계하고 있고, 어떻게든 정보를 빼돌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만약 너라면. 제국의 의도를 통제할 자신이 있나.”

“……없습니다.”

“그래서 첩자들의 존재를 허용했다. 그들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였다.”

전생.

마교는 무림을 정벌했다.

그날, 천마 백중혁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은 마교의 개방이었다.

분명히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정파 무림의 후손들은 미래를 도모할 것이고, 백중혁은 그들에게 마교가 어떤 세상인지를 보여 주었다.

마교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마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님을.

그리고 그들을 다스리는 백중혁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를.

대놓고 드러냈다.

첩자들이 빼돌리는 정보는 백중혁에 대한 공포를, 현실을 받아들일 명분을 부여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처음에 마교에 대항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폐쇄성이 무림을 퇴보시킬 것이라고 말했는데, 백중혁은 사람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통제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 위에 백중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만 달라졌을 뿐. 세상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백중혁이라는 존재를 알아갈수록,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감히 백중혁에게 적의를 보이지 못했다.

압도되었다.

드러난 정보는, 겨우 일부의 진실은.

처음에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첩자들조차도, 진실을 내뱉지 못할 만큼의 공포를 선사했다.

빡빡한 통제보다.

적절한 자유가, 마교의 지배를 유지하는 방법임을 백중혁은 알았다.

“나는 앞으로 완벽한 통제보다는, 드미트리의 방식을 사람들에게 드러낼 것이다. 내가 바라는 목적은 정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내가 행할 일들에 첩자와 같은 변수가 섞인다고 한들, 겨우 그 정도 변수에 흔들릴 상황이라면 애초에 목적을 이룰 수 없다. 크리스. 만약 네가 크로노스의 첩자라면. ‘나’라는 사람을 직접 경험하고도, 망설이지 않고 배신할 수 있을 것 같나.”

오만한 발언이었다.

천마 백중혁.

그는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평범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대놓고 드러냈다.

위험한 판단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실체를 드러냈을 때 바닥을 확인한 하이에나들이 사방에서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저는 절대, 주군을 배신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한계는 끝을 알 수 없기에.

오히려 드미트리에 대해 알아갈수록, 첩자들로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보랏빛 공간.

알렉산드르는, 마력을 일으켰다.

“라이트닝 퍼니쉬먼트(Lightning Punishment).”

번쩍.

콰앙!

콰콰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분노하듯.

하늘이 열리며 수백 다발의 번개가 작렬했다.

황량했던 땅이 번개로 인해 뒤집혔고, 방금까지 울퉁불퉁하게 솟아났던 봉우리들도 단번에 소멸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어날 만큼의 위력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9서클의 경지에 발을 들였고, 그가 발현하는 마법은 신의 영역에 있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땅이 뒤흔들렸다.

알렉산드르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로만 드미트리. 과연 네가 이 힘을 감당할 수 있을까.”

무림.

상상 속의 존재였다.

끝없는 고민 끝에 무림의 산물인 ‘오라’를 발명했고, 오라의 한계가 있음을 알았기에 인간으로서의 육신을 포기하고 흑마법을 받아들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정체를 알아낸 직후. 알렉산드르는 고뇌에 빠져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는 행보가,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는 무공의 위력이.

처음 샐러맨더 대륙에 빙의했던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어쩌면 자신은 한낱 평민에 불과했기에, 로만 드미트리처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등감이 들끓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증명하고 싶었다.

마법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또한, 자신이 개발한 오라가 무공에 비해 그리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의 조각들이 무사히 드미트리에 침투했다. 그들은 머지않아 무공의 정보를 알아내고 내게 바치겠지. 나는 오라의 창시자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고, 너의 그 무공이 얼마나 미천한 것인지를 샅샅이 파헤쳐 주마. 그리고 네 한계가 실로 보잘것없음을 증명했을 때. 마법을 택한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내 마법으로 네 존재를 소멸시켜 주마.’

악의가 피어올랐다.

알렉산드르로부터 발현되는 마법이, 전생을 잊을 만큼의 무한한 자신감을 부여했다.

그때였다.

[알렉산드르 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링크.

미스틱의 목소리였다.

알렉산드르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일이지?”

[일단 이곳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걸음을 옮겼다.

공간이 뒤틀렸고, 어두컴컴한 공간에 미스틱이 있었다.

“드미트리에서 이런 것을 보냈습니다.”

한 장의 종이.

알렉산드르가 그 내용을 읽었다.

[크로노스 제국을 ‘검술 발표회’에 초대합니다.]

검술 발표회.

그 단어는.

알렉산드르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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