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3화 (293/615)

293화 드미트리로 향하는 사람들 (6)

케빈의 외침.

크리스는 짜증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며, 크리스는 케빈이 본인을 넘어설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케빈은 출발점이 다르다.’

수년 전.

케빈과 크리스는 비슷한 시기에 로만 드미트리를 따랐다.

가르침의 기간으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면, 출발점부터 오라 검사였던 크리스가 케빈을 압도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런데 케빈은 항상 열등감을 보였다.

본인이 먼저 로만 드미트리를 따랐다면서 크리스보다 강해지기를 바랐고, 실제로 빠르게 발전했으나 크리스는 개의치 않았다.

천재.

크리스는 범인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고, 로만 드미트리가 ‘선구자’라고 평가한 그의 성장세에 케빈을 라이벌로 받아들일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도 자신이 케빈을 압도한다고 믿기에, 드미트리의 악귀라는 명성을 떠나 케빈에게 저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척.

분위기가 변했다.

크리스가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으로, 아레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팟.

콰르르르르르릉.

아레스가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크리스로부터 수십 갈래의 빛줄기가 아레스를 향해 뻗어 나갔다.

오라의 분출을 섬전에 접목했고, 사방을 차단하는 검술로 아레스의 접근을 막았다. 빛이 번쩍였다.

디에고와 같은 랭커들도 주춤할 수밖에 없는 공격을, 아레스는 달려드는 자세 그대로 모조리 막아 낸 것이다.

확-

오라를 뚫고.

아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크리스는 한 발 물러나며 거리를 떨어트리려고 했는데, 그때 무언가가 번쩍이며 머리를 관통했다.

팟.

콰르르르르르르릉.

강렬한 폭발.

쾌검은 크리스만의 영역이 아니었다.

얼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강렬한 충격에, 크리스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에 버금가는 스피드였다.

크리스는 살면서 이와 같은 검술을 구사하는 사람을 로만 드미트리 외에는 만나 본 적이 없었고, 아레스의 여유로운 표정에서 일부러 얼굴을 노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경고였다.

승리를 바란다면 목숨을 걸라는 의미.

검술의 천재라는 명성은, 크리스의 존재를 짓눌렀다.

일촉즉발의 상황.

크리스는 확신했다.

‘마지막 비기마저도 막힌다면, 나는 아레스를 절대 이길 수 없다.’

문제는.

최근 만들어 낸 비기는, 상대의 목숨을 취할 의도가 아니라면 자신으로서도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아레스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처럼. 이 대결의 결말이 죽음으로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찰나의 고민이 크리스를 망설임에 빠트리자, 아레스는 김이 빠진다는 표정으로 오라를 일으켰다.

“이만 끝내지.”

콰앙!

충격이 작렬했다.

크리스가 밀렸고, 아레스의 검술은 아름답게 곡선을 그리며 크리스가 숨을 돌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른쪽을 노렸다가 왼쪽을.

크리스가 숨을 들이켜며 공격을 막아 내고 나면, 크리스가 반응하기 힘든 방향에서 공격이 치고 들어왔다.

즉흥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아레스는 명확한 체계에 따라, 크리스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계산하고 상대를 밀어 넣고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케빈의 외침에, 크리스는 비기의 존재를 떨쳐 내지 못했다.

콰르르르르르릉.

폭발하는 오라.

아레스가 이만 승부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순간, 크리스의 날카로운 눈빛이 아레스의 급소를 향했다.

그때였다.

“그만. 시간 끝났다.”

격렬한 상황과는 다르게 담담한 음성.

하지만 그 짧은 말에, 폭발하는 오라를 억누르라 핏물을 머금으면서도 크리스는 동작을 멈추었다.

로만 드미트리.

주군의 명령은, 그에게 있어 절대적이었다.

* * *

이번 대결.

아레스의 명백한 승리였다.

예정되었던 3분의 시간이 모두 지났기에 끝을 맺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충분했어도 아레스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레스의 모습을 살폈다.

크리스를 이토록 밀어붙인 아레스의 실력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힘의 근본에서 무림의 흔적을 보았다.

‘오라 검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체계를 따르지 않고 있다.’

알렉산드르.

사람들은 최초의 창시자가 생각해 낸 오라의 폭발을 검술의 토대로 삼는데, 아레스는 폭발력만으로 모든 상황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때로는 폭발적으로, 때로는 일말의 마나를 활용한 방법으로.

마치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방식처럼, 시기적절하게 오라를 활용하는 법을 알았다.

그렇다고 그가 무림인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비슷할 뿐.

조잡했다.

만약 알렉산드르의 기술을 토대로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 나갔다면, 지금의 아레스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수준이었다.

미완성의 단계. 그렇기에 아레스라는 존재는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은 알렉산드르의 기술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며 새로운 방향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레스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세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갔다.

선구자.

아레스는 천재였다.

천마 백중혁이 빙의하지 않았다면, 샐러맨더 대륙의 검술은 그로 인해 큰 파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검마가 그러했지.’

검마(劍魔).

백중혁을 따랐던 사천왕 중 하나로, 그는 상당히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

검마의 힘은 백중혁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

삼류 무인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전쟁 도중에 죽은 아버지의 유품으로 삼류 무공을 얻었다.

그때부터 그는 삼류 무공을 익히면서 강해지겠다는 목적을 꿈꾸었는데, 새로운 무공을 접할 때마다 자신의 무공을 보완하며 새로운 영역을 만들었다.

그는 선구자였다.

피와 죽음으로 쌓은 경험은, 어느덧 그를 검마라고 불릴 만큼의 고수로 만들었다.

그 누가 가르치지도.

특별한 기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가르침이 그에게는 발전의 토대가 되었고, 천마 백중혁을 마주했을 때의 검마는 세상을 방랑하며 강자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본인이 바라는 이상이 백중혁에게 있음을 알았을 때, 검마는 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백중혁을 숭배했다.

아레스와 검마.

비슷한 맥락의 인간이었다.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가 새로운 방향이 있음을 암시해 주었지만, 둘은 누군가의 조언이 없는데도 스스로가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갔다.

재밌는 존재였다.

아레스와 같은 인간이 일개 사병 모집에 지원했다는 것은, 부귀영화와 같은 뻔한 유혹이 아니라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로만 드미트리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초면에 무례한 부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만, 이 정도 대결로는 끓어오르는 피가 가라앉질 않습니다. 그러니 한 수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도발적인 발언.

아레스의 검이, 로만 드미트리를 향했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예상은 옳았다.

아레스.

그가 드미트리로 향한 이유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 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오라 발현법을 발명해 낸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로만 드미트리의 수하들이 대체 어떻게 디에고와 블랑코 같은 고수들을 쓰러트릴 수 있냐고. 예전에 로만 드미트리가 헥토르와의 전쟁에서 버틀러를 쓰러트렸던 일을 생각하면, 과거에는 완성되지 않았던 미지의 기술을 지금에 이르러 완성한 거지.”

일부는 맞는 말이었다.

초창기에는 오라의 폭발을 분석할 시간이 필요했다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의 방식으로 오라의 폭발을 압도할 방법을 찾았다.

알렉산드르의 기술이 근본부터 잘못되었다는 확신.

그때부터, 크리스와 케빈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아레스는 소문에 이끌렸다.

그는 검술을 탐구했다.

스스로가 발전할 여지가 있다면, 로만 드미트리에게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소문의 기술을 배워 보고 싶었다.

탐구욕(探究欲)은 아레스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근본이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황제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제시했지만, 그의 미래는 스스로가 택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도전에, 그의 사람들이 살벌한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는 주제를 모르는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자리는, 너와 내가 대결하는 자리가 아니다.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도전을 받아들여 주겠지만, 그 순간 3차 테스트에는 탈락할 것이다.”

당황스러운 대답이었다.

아레스는 모두가 영입하길 바라는 존재다.

그를 위해서라면 크로노스 제국이라고 할지라도 금은보화를 갖다 바칠 텐데, 로만 드미트리는 마치 다른 사병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와 같은 인물이 합격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규율을 어기는 존재라면, 대륙 제일의 천재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선택해라.”

순간.

아레스의 표정이 굳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피어오르는 기세가, 아레스의 존재를 완전히 옭아맸다.

‘……소문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구나.’

소문의 로만 드미트리.

대륙 제일을 논했다.

한니발을 쓰러트렸다는 결과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인정했건만, 막상 눈앞에 마주한 존재는 올려다볼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알았다.

자신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본인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빠져 있지 말라는 의미의 경고.

로만 드미트리에게.

아레스와 다른 이들은 똑같았다.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아레스조차 탈락할 것이다.

검을 거두었다.

직접 확인하니, 오히려 선택이 쉬워졌다.

“3차 테스트에 탈락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제넘게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검마와 마찬가지로.

들끓는 탐구욕은, 아레스의 자존심을 꺾었다.

* * *

며칠 뒤.

3차 테스트가 모두 종료되었다.

합격자는 약 600명 정도였고, 그들은 4차 테스트를 위해 공지한 장소로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파비르, 프레드, 로건, 아레스 등등 화제의 참가자들은 4차 테스트를 치르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어떤 방식의 테스트가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이변이 없다면 그들의 합격을 확신했다.

“……어떤 테스트일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난 3차 테스트.

충격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조차 압도적인 무력을 보였고, 특히 크리스와 케빈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강철의 로건이 케빈을 상대로 무릎을 꿇었다.

비록 크리스는 밀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아레스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감탄하기에는 충분했다.

확실한 것은.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로는 케빈은 빈민가 출신이었고,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강철의 로건에 대적하기는커녕 블러드 팽과 같은 녀석들에게도 얻어맞을 만큼의 약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가르침은 특별했다.

그가 자신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과 그를 따른다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그간의 선례는, 마지막 4차 테스트에 대한 간절함으로 직결되었다.

다들 말을 아꼈다.

마지막은 경쟁일 확률이 높았다.

과도한 대화는, 의미 없는 소모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그는, 감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보였다.

탁.

사람들 앞에 섰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3차 테스트에 합격한 것을 축하한다. 너희는 개개인의 능력을 충분할 만큼 증명했다. 3차 테스트에 합격한 순간부터는 그 누가 합격하든 이상하지 않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확인하고자 한다.”

이번 사병 모집.

시작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무명이었을 시절과는 다르게, 현재의 로만 드미트리가 하려는 일들은 반드시 위험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참가자들.

그들을 둘러보았다.

각양각색의 얼굴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이 중에 타국의 첩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미 정보 길드를 통해 몇몇 인물의 신상을 파악한 상태고, 그것이 바로 4차 테스트의 목적이다. 딱 10분을 주겠다. 그 안에 본인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고 나온 자들은, 드미트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건대 살려서 돌려보내 주겠다.”

척.

검을 들었다.

예리한 기운은,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풍겼다.

“끝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죽여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4차 테스트의 합격자들은, 처형(處刑)식이 끝날 때까지 살아서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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