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1화 (291/615)

290화 드미트리로 향하는 사람들 (3)

3차 테스트.

크리스의 말처럼 간단했다.

검사로서 자질을 보여 주거나, 혹은 상대를 쓰러트림으로써 당당하게 합격을 거머쥐거나.

파비르는 당연히 후자를 바랐다.

‘문제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상대를 택할 것이냐, 실력자로 알려진 상대를 택할 것이냐인데.’

앞으로 나섰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상대는 비교적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겠지만, 첫 번째 차례이니만큼 강렬한 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어려운 상대를 택했는데도 승리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의 결과이고, 마지막 4차 테스트에서도 ‘합격점’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큰 그림을 그렸다.

파비르는, 상대를 고르라는 크리스의 말에 천천히 살펴보았다.

‘크리스.’

절대 불가.

드미트리의 섬광이라고 불리는 그는, 대륙 십이검의 일원인 디에고를 쓰러트리며 본인의 강함을 증명해 냈다.

6성의 검사조차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검술을 구사하는 존재다.

감히 상대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그렇기에 크리스의 이름은 일찌감치 머릿속에서 날려 버렸다.

‘케빈.’

드미트리의 악귀.

껄끄러운 상대였다.

분명히 오라의 수준은 3성 내외로 알려져 있는데, 크로노스 제국의 블랑코를 쓰러트리며 핫한 존재로 떠오르고 있었다.

크리스와 더불어 대륙 랭킹에 이름을 올린 존재.

그를 쓰러트린다면 합격은 무조건이겠지만, 파비르는 가시밭길을 자진해서 걸을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차례로.

드미트리 사병들의 얼굴이 보였다.

웬만해서는 이름이 알려진 상대를 고르고 싶었는데, 볼칸과 푸키와 같은 얼굴들을 확인하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머릿속에서 승리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고, 한참을 고민하던 파비르의 시선에 마침내 적당해 보이는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맥버니.’

좌수검.

남부 훈련소 출신으로, 크로노스 제국이 드미트리를 공격했을 때 칼 같은 지휘 능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게다가 좌수를 활용한 변칙적인 공격은 위협적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그가 팔이 하나가 없기에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좌수검이라는 무기 자체가 자신에게 익숙했다.

파비르 또한.

왼팔을 주로 사용했다.

맥버니의 변칙적인 공격이, 자신을 상대로는 위협적이지 않다는 의미였다.

“맥버니를 고르겠습니다.”

말을 내뱉었다.

크리스는 살짝 웃음을 보이더니, 맥버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맥버니가, 덤덤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 * *

크리스가 말했다.

“시간 제한은 3분. 3분이 지나면 대련을 종료하고, 경기 내용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할 것이다. 물론 호명한 상대를 쓰러트린다면, 경기 내용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합격이다. 양측 준비되었나.”

“예.”

“그럼, 대련을 시작하겠다.”

팔락.

깃발이 휘날렸다.

크리스가 한 발 물러나자, 파비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나갔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를 폭발시켰다.

빠르게 달려드는 움직임이 순식간에 맥버니와의 거리를 좁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맥버니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검을 들어서 예상되는 공격 방향을 막으려는 모습에, 파비르는 오라를 일으키며 상대의 공간을 차단했다.

‘왼팔만으로는 선택지가 많지 않겠지!’

외팔.

자연스럽게, 팔이 없는 오른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몸을 틀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파비르는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어 버리면서, 상대의 역방향에서 공격하는 것을 택했다.

확.

역발상이었다.

상대의 취약점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취약점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공략하는 파비르의 판단.

파비르는 노련한 검사였다.

움베르토 명문 가문의 기사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대련을 경험했고,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든 판단은 맥버니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카앙!

“……?!”

눈을 부릅떴다.

맥버니가 기묘한 스텝을 밟더니, 뱀처럼 휘어지는 공격이 그의 검과 부닥쳤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맥버니의 대응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제대로 확인조차 할 수 없었고,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고 앞을 확인했을 때는 바로 코앞까지 치고 들어온 맥버니가 보였다.

카앙!

카카카카카캉!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눈이 팽팽 돌았다.

맥버니는 오른쪽을 공격하는 모션을 취하다가 갑자기 왼쪽을, 또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리는 기묘한 검법을 사용했다.

분명히 왼팔로 가동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두 팔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양쪽 방향을 자유자재로 공략하는 검술은 숨이 턱 막혔다.

파비르로서는 알 수 없었다.

좌수검의 완성은 스텝이라는 것을.

적절한 상황에 적절한 위치에 발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맥버니는 주변의 공간을 완벽히 장악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크윽.”

옆으로 밀렸다.

신음을 삼켰다.

남부 훈련소 시절, 맥버니는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3성의 오라를 발현한 파비르의 오라로도 충격이 만만치 않았고, 이제는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좌수검 맥버니의 명성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파비르처럼 상식에서 접근한 사람들이, 모두 무참히 깨져 나가며 명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파비르가 오라를 끌어올리며, 순간의 틈을 포착했다.

‘지금이다!’

공격과 공격의 틈.

찰나의 순간을 공략했다.

파비르는 맥버니의 검을 쳐 내며 앞으로 파고들었고, 손잡이 끝부분에 오라를 폭발시키며 상대의 심장을 공략했다.

이로 인해 상대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았다.

맥버니는 그런 생각으로 상대할 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고, 전력을 다하는 것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콰르르르르르릉.

빨랐다.

쇄도하는 검이 먼저 적에게 도달한다고 판단하는 순간, 맥버니가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거리가 멀어졌다.

겨우 한 걸음이, 체감상으로는 세 걸음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카앙!

검을 튕겨 냈다.

손쉽게 파비르의 일격을 막아 내더니, 앞으로 내딛는 스텝과 동시에 뱀처럼 움직이는 검을 뻗었다.

척-

끝이었다.

목에 닿는 서늘한 감각에, 파비르는 창백한 얼굴로 맥버니를 보았다.

“……졌습니다.”

완벽한 패배였다.

파비르는 결국, 공격 한번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하고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 * *

매끄러운 승부였다.

파비르의 입장에서는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맥버니가 파비르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더니 단번에 제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감탄사를 내뱉었다.

파비르는 분명히 3성의 오라를 발현했고, 그만한 실력자가 일개 사병에게 패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승리한 맥버니와 그것을 바라보는 동료들은, 방금의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크리스가 말했다.

“파비르, 합격.”

승패와는 다른 결과였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패배의 충격에 파비르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그사이.

다음 차례도 진행되었다.

파비르가 첫 번째 차례였을 뿐이지, 5천 명의 도전자들을 모두 테스트하기 위해서는 동시다발적으로 대련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이 연달아 나오며 상대를 호명했다.

초반에는 아직 드미트리의 사병들을 얕보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그들은 파비르와 마찬가지로 이름있는 상대를 택했다.

그리고.

콰직!

검이 부서졌다.

볼칸의 맹공에 도전자가 겁에 질린 표정을 보였고,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검을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테스트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으로서 이름을 알린 존재들은, 낭중지추(囊中之錐)에는 이유가 있음을 실력으로 증명했다.

퍽.

“쿨럭.”

피가 튀었다.

얼굴을 얻어맞은 도전자는, 케빈의 차가운 눈빛에 무릎을 꿇었다.

나름대로 대규모 용병단의 부단장이었던 존재.

누구를 상대로든 반반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가, 케빈의 몰아치는 공격에는 채 1분을 버티지 못했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케빈은 아무리 많아도 20대 초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인데, 저런 어린 녀석을 상대로 수십 년의 용병 생활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케빈의 실력은 진짜였고, 더 해 보겠냐는 눈빛에 용병 부단장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탈락.”

탈락, 탈락, 탈락.

우수수 떨어졌다.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고 상대를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떨어졌고, 오히려 일반인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에 합격하는 이들이 많았다.

확실한 것은 앞선 결과들이 명확한 메시지를 부여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들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상황에, 한 도전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만약 드미트리의 사병을 쓰러트리고 합격을 거머쥘 생각이라면, 절대 이름이 알려진 존재들을 선택해서는 안 돼. 드미트리에 관한 명성들은 모두 진짜였다고!”

드미트리.

전장에서 그들은 괴물이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 명성이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만을 표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 * *

도전자.

테임즈는, 테스트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력자들도 줄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적당히 좋은 모습만 보여 주어도 합격점을 받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내 실력으로는 무조건 만만한 상대를 골라야 한다는 의미인데. 흐음, 누가 좋으려…… 응?’

순간.

눈에 콱 박히는 존재가 있었다.

도열하고 있는 드미트리의 사병들 제일 뒤에, 남들과 비교될 만큼 왜소해 보이는 사내가 테임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테임즈도 나름대로 2성의 오라 검사였다.

드미트리의 시험을 보러 온 사람 중에는 강한 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렇게 왜소한 사내를 상대로는 이길 것 같았다.

키는 한 160cm 정도.

왜소한 체격에 비해서는 근육이 다부졌지만, 그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신체적인 차이는 치명적이다.

190cm의 체격을 자랑하는 테임즈에게, 비겁하더라도 이건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저분을 택하겠습니다.”

“헌트, 앞으로.”

헌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 중에 크리스와 케빈을 비롯한 인물들은 대단한 명성을 떨쳤지만, 헌트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테임즈는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만만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대련을 준비하는 상황에, 그를 지켜보던 멤피스 후작의 기사단장 프레드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저 도전자는 무조건 탈락하겠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체격을 보아하니, 초반에만 잘 풀어 나가면 승리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옆에서 같은 도전자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테임즈와 헌트.

시각적으로 승패가 명확해 보였다.

헌트가 대단한 오라 검사는 아닐 테니, 그렇다면 순수하게 검술 대결에서 헌트의 왜소한 체격으로 테임즈를 쓰러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테임즈가 어중이떠중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건장한 체격을 더욱 건장하게 보이게 만드는 근육질의 몸매는, 테임즈라는 존재가 일반 병사의 신분에는 과할 만큼의 강자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프레드가 고개를 저었다.

“헌트라는 상대를 과소평가하고 택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크로노스 제국의 출신으로서,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그의 병사들이 전장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남부 전선, 서부 전선, 발할라. 수많은 전투에서, 그들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불패(不敗)의 전사들입니다. 애초에 약한 존재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크흠.”

도전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프레드의 말을 듣고 보니, 헌트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은 지금 테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상대를 얕보는 존재들은. 승리라는 명확한 결과 없이는, 이번 3차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겁니다.”

그의 말처럼.

안일한 생각을 지닌 이들은 모조리 탈락했다.

드미트리의 사병들과의 대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거나, 파비르와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판단으로 상대를 고르는 사람들만이 합격점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테임즈는 불합격이었다.

본인의 의도처럼 승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3차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크악!”

겨우 5초.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고통에 찬 비명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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