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5화 (285/615)

285화 전쟁이 끝나고 (1)

이름 모를 장소.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장소에서, 기도하는 이사벨의 모습을 루나 왕국의 병사들이 바라보았다.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햇볕은 마치 이사벨의 몸을 휘감듯 주변을 밝혔고,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는 하얗게 변하며 신성력을 발현했다.

계속되는 한파로 루나 왕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신탁을 받아 태어난 이사벨의 존재는, 루나 왕국을 추위로부터 지켜 주었다.

그날 사람들이 ‘이사벨’의 이름을 환호했던 것을 기억하며, 루나 왕국의 왕실 기사단장인 레오는 한시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기도가 끝났다.

금발의 머리칼이 원래의 색을 되찾자, 이사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여왕님. 아르카디아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탁은 매번 여왕님의 희생을 요구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이 휴전을 선언한 지금은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어요.”

이사벨이 고개를 저었다.

기도를 통해 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했다.

“알렉산드르가 오델리아의 수도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금단의 영역인 9서클 마법을 사용했어요. 그것은 제약(制約)이 해제되었다는 의미고, 그렇기에 우리가 나설 것을 알면서도 대륙 전쟁을 감행한 것이겠지요. 이제는 시간이 없어요. 그들이 인간의 죽음으로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순간, 그때는 신의 힘을 빌린다고 한들 대륙에 닥칠 어둠을 막을 방법이 없어요.”

크로노스 제국.

그들은 그동안 야망을 억눌렀다.

이사벨의 존재를 경계한 것도 있지만,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제약’으로 인해 본인들의 힘을 완벽하게 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파가 더욱 심해졌던 그 날부터. 제약의 억제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번 대륙 전쟁을 기점으로 제약이 어느 정도 해지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빛과 어둠.

상반되는 힘은 서로 공존했다.

알렉산드르가 강해진 만큼 이사벨도 힘을 얻었지만, 문제는 알렉산드르에게 힘을 부여하고 있는 미지의 존재였다.

그의 강림(降臨)만큼은 막아야 했다.

이사벨로서도 레오의 말처럼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녀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문득.

로만 드미트리가 떠올랐다.

신탁에 거론되지 않은 존재.

그는 불쑥 나타나서 파란을 일으켰고,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어둠의 존재를 물리치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그의 도움을 받았다면 일이 손쉽게 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인류를 위해서는 싸우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고, 신을 따르는 이사벨로서는 그와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레오가 말했다.

“왕실 기사단장으로서, 끝까지 여왕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지금부터.

이사벨은 험난한 길에 들어설 것이다.

사람들은 휴전을 통해 평화를 맞이했지만, 이사벨과 그녀의 병사들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사벨이 레오를 보았다.

자신의 검이라는 이유로.

레오를 비롯한 루나 왕국의 병사들은, 신탁의 무게를 같이 짊어졌다.

“다들 고마워요.”

안락을 말하지도.

미래를 보장하지도 않았다.

고맙다는 말뿐.

고단한 미래를 알기에, 희생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사벨의 존재 이유.

그녀가 살아가는 삶이었다.

* * *

병상 위.

헨더슨의 창백한 몰골이 보였다.

그를 내려다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치료사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그간의 일을 말했다.

“헨더슨의 치료를 위해 매일 최상급 포션을 하나씩 사용했고, 사제들을 불러들여 기도를 진행했습니다만……. 각고의 노력에도 호전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회복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군의 치료는 죽어 가는 생명을 살려 놓았지만, 병상으로 실려 온 그 순간부터 헨더슨은 살아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전투 직후.

헨더슨은 처참한 몰골로 옮겨졌다.

전신은 성한 구석이 없었고,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피가 지나가는 길마다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원래라면 며칠 버티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치료사가 돈과 정성을 쏟아 부어 명줄을 간신히 붙잡았고, 로만 드미트리가 선천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회생의 희망을 살렸다.

그러나 그뿐.

다시 눈을 뜨지는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방법은 대단한 회복력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사인(死因)은 치명적인 내상을 입힌 마지막 공격이었습니다. 페르난도의 말에 의하면, 헨더슨은 적을 붙잡기 위해서 1초의 시간을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직접적인 사인입니다. 만약에 적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 끝냈다면, 헨더슨은 분명히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을 죽이기 위해 희생을 택했고, 그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습니다. 치료사로서 헨더슨을 살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치료사의 말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울먹이며 말하는 것을 들으며, 헨더슨의 얼굴을 담담히 내려다보았다.

1초.

1초가 생사를 갈랐다.

스벤이라는 강적을 맞닥트리고 적의 검에 피를 토할 때까지.

분명히 헨더슨은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사렸다면, 페르난도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다면, 희생했더라도 스벤을 쓰러트리겠다는 일념으로 1초를 버티지 않았다면.

선천의 기운을 나눠 받은 헨더슨은 살아 있는 얼굴로 자신을 맞이했을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은 매번 모두를 위한 방향을 택했고, 본인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희생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참을.

헨더슨과 시간을 보냈다.

로만 드미트리는 어떠한 말도 없이, 갑자기 걸음을 옮기더니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크리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추모식을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헨더슨을 위한 말도.

헨더슨을 위한 행동도 없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서는 로만 드미트리의 뒷모습에, 크리스는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 * *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예로부터 화장(火葬)은 망자를 떠나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을 질렀다.

타닥, 타닥. 불이 타올랐다.

그나마 시체를 온전히 회수한 사람들은, 차가운 전장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불에 휩싸여 사그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울음을 삼켰다.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차마 먼저 자신들의 슬픔을 토해 낼 수 없었다.

인내는 길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

누군가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주변으로 번졌고, 사람들은 통곡하며 덤덤한 슬픔 따위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엉엉 울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란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했을 사람이, 국가 단위의 이익이 걸린 문제를 위해 희생했고, 그것은 온전히 그들의 가족이 감당해야 할 슬픔이 되었다.

불길 너머.

로만 드미트리는, 기억의 한순간을 떠올렸다.

광마가 죽고.

전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림을 무너트리면서부터 전쟁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항복을 선언하는 구파일방의 모습에 정파 무림의 중소 문파들로서는 버틸 여력을 잃어버렸다.

무림의 역사는 무림의 통일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했다.

천마 백중혁 이전 세대에 날고 기었던 고수들 모두가 통일의 업적에는 감히 도달하지 못했지만, 백중혁의 발아래 무릎 꿇은 사람들은 최초의 순간을 말했다.

통일.

무림을 정벌했다.

바라던 일을 이루던 순간, 백중혁은 광마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는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 만족하느냐.”

어느 날, 광마에게 물었다.

자신은 투쟁의 삶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를 머리 위에 두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살았고, 그렇기에 무림 정벌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는 당연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광마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만나기 이전에 광마는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지만, 자신을 만나고 나면서부터 의도하지 못한 삶을 삶았다.

그래서 물었다.

적어도 자신은, 광마의 삶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광마는 웃으며 말했다.

“타인(他人)이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삶의 구렁텅이에서, 주군이 제게 손길을 내민 순간부터 주군은 제 삶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꿈이 있습니다. 주군이 무림 통일을 바라신다면, 그것을 이루는 게 바로 저의 꿈입니다. 그렇기에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주군이 꿈을 이루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겠습니다.”

모순적인 발언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겠다던 그는, 백중혁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단 한 번도 희생을 망설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평범한 소년에게 무림 통일은 버거운 꿈이었다.

백중혁과 같이 걸어가던 그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꿈에 죽음을 맞이했고, 목적을 이룬 순간에 광마는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백중혁은 길을 떠났다.

주변을 수소문했고, 광마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았다.

“……그런 조카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만, 대체 무슨 일이신지.”

광마는 일찍 가족을 잃었다.

남은 가족이라고는 술과 도박에 찌들어 사는 삼촌뿐이었고, 삼촌은 광마의 실종조차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가족의 의미를 잃어버린 존재였다.

그는 백중혁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의 무지렁이였다.

다만, 예사롭지 않은 기세에,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봐 고개를 조아리며 벌벌 떨었다.

그런 그에게.

툭.

“받아라.”

무언가를 던져 주었다.

그 안에 금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내는, 휘둥그레진 얼굴로 백중혁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목숨값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요!”

사내는 기뻐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광마의 슬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금화를 담은 눈이 반짝거렸다.

삼촌이라는 사내.

광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금화를 가지고 곧바로 도박판으로 향할 것이고, 향락을 즐기다가 돈을 전부 탕진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운이 좋아 정신을 차린다고 할지라도. 부유한 삶에 광마의 존재는 잊혀 갈 것이다.

그런데도.

그를 찾아가 보상하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광마를 기억하는 것처럼.

세상에 또 다른 누군가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광마라는 존재를 기억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걸음을 돌렸다.

천마의 시대.

그렇게, 백중혁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 * *

벌써 며칠째였다.

다 타 버린 재 앞에서 떠나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크리스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주군.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레드포드부터 시작해서 끊이질 않는 강행군으로 인해, 주군도 휴식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주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크리스.”

“말씀하십시오.”

“내가 전에 말했었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너는 지휘관으로서 존재하길 바란다고.”

잿더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살아 있는 생명이었을 흔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휘관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내 말 한마디에, 내 명령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지휘관의 삶이다. 내가 살아온 삶에는 명령의 무게에 고통스러워할 여유도 그만한 인정(人情)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는 한순간도 내 사람들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꾸며진 행동이어도 좋다. 지휘관인 내가 이들을 이렇게 떠나보내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임과 동시에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다.”

차가운 말이었다.

그런데, 크리스는 이상하게 쓸쓸한 감정을 느꼈다.

“지휘관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한 번이라도 감정에 호소하는 순간, 내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내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고 나와의 간격을 한발 다가서려고 하겠지.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인간적인 지휘관을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지휘관으로서 이루길 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면, 너는 언행(言行)을 철저히 계산하며 살아야 한다.”

선을 그었다.

수하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진심을 보이면서도,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차단했다.

크리스는 처음부터 로만 드미트리를 따랐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충성을 맹세했지만, 시간이 제법 흘렀는 데도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 간격.

로만 드미트리가 의도한 바였다.

철저하게 계산된 언행으로, 신하와 주군의 간격을 인정이 뭉그러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포식자의 삶.

로만 드미트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는 의도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지휘관으로서 해야만 하는 언행을 행했다.

크리스는 묻고 싶었다.

그렇게 살면 힘들지 않냐고.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그간 자신이 지켜본 로만 드미트리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크리스. 앞으로 지휘관으로서 살아가려면 명심하거라. 이렇듯 사람들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태도를 보여 줌과 동시에, 명확한 보상만이 사람들의 슬픔을 보상해 줄 수 있다는 것을.”

확고한 태도였다.

절대, 자신을 위해 죽은 자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수뇌부들을 소집하라. 지금부터, 전쟁 사상자들의 보상에 관한 회의를 진행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명확한 보상이라는 말의 의미.

사람들은 머지않아, 그 의미를 체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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