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종결 (3)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감히 크로노스 제국의 대리인에게, 황제의 뜻을 대변하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요구라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로서는, 공포보다 분노가 앞섰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릎을 꿇으라니요! 저는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 크로노스 제국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카이로스를 찾은 것입니다. 당신의 말처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그 섣부른 발언으로, 정녕 크로노스와의 관계를 파국으로 만들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이라면. 크로노스는 휴전 의사를 철회할 건가.”
“……?!”
당황했다.
찰튼 남작은 로만 드미트리가 ‘파국’이라는 단언에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크로노스와의 전쟁은 파멸을 의미했다.
정말 기적적으로 드미트리가 승리한다고 한들 피해가 막심할 것이 분명하기에, 드미트리 또한 마음속으로는 휴전을 바란다고 믿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전쟁이 재개되어도 상관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찰튼 남작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찰튼 남작.”
서늘한 음성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찰튼 남작을 향해 다가갔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어중간한 결과로 이번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휴전을 바란다면 태도를 확실히 정해라. 너희가 승자인 것처럼,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태도를 고수한다면, 나는 네 목을 잘라서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을 속행한다는 의지를 보여 줄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기를 따로 들지 않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이라면 자신을 맨손으로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 녀석은 완전히 미쳤어!’
혼란이 일었다.
찰튼 남작은 크로노스 제국의 대리인으로서 끝까지 평정심을 지키고 싶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평판을 알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코르타스의 일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포로를 붙잡았지만, 그들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적과의 타협을 불허한다는 의지.
그때 죽어 간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탁.
바로 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도달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만 드미트리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찰튼 남작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툭.
“……죄송합니다. 크로노스의 대리인으로서 적합한 절차를 밟았어야 했는데, 전시(戰時) 상황임을 간과하고 섣부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오. 크로노스 제국은 드미트리와의 파국이 아니라, 적절한 타협을 통해 휴전을 논하고자 합니다.”
* * *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크로노스를 대표한다는 사람이, 이리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다니.
전례가 없었다.
찰튼 남작은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지만,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자존심을 내세울 용기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우리는 크로노스와의 휴전 협약을 믿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종전(終戰)을 선언하는 의미가 되겠지만, 어떠한 조건으로 협약하든 힘의 논리는 전쟁을 구속하지 못한다. 찰튼 남작. 크로노스 제국이 진심으로 휴전을 바란다면, 우리는 말뿐인 제안이 아닌 명확한 성의 표시를 바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전쟁.
드미트리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소식에 밝은 사람들은, 크로노스 제국의 반복되는 도발로 인해 드미트리가 분노했음을 알았다.
전쟁의 책임은 크로노스 제국에 있었다.
그들은 대륙법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였고, 휴전 협약을 맺은 다음에도 똑같은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선을 넘은 자는.
언제든 또다시 넘을 수 있다.
그렇기에 크로노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것은 말뿐인 휴전 협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드미트리가 승리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그런 조건이 아니라면 끝을 볼 생각이었다. 휴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적의를 거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사벨의 말대로 크로노스의 뒤에 흑막이 존재한다면 그를 대비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상대의 비위를 맞춰 가며 협상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이건.
또 다른 전쟁이었다.
크로노스가 내뱉는 휴전 선언은,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하는 새로운 왕국 연합의 초석이 될 것이다.
“50만 골드. 그만한 전쟁 보상금을 내놓는다면 휴전 협약을 받아들이겠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찰튼 남작이 발끈했다.
50만 골드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액수에, 공포마저도 잊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분노하는 모습은 우스웠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눈빛엔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따위 태도를 보인다면 협상이 결렬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이번 전쟁으로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무고한 백성들이 죽었다. 만약 너희가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휴전을 맺은 이유를 뭐라고 설명하지? 찰튼 남작. 나는 승리했다는 결과와 명백한 보상을 바란다. 사람들에게 가족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물리쳤다는 정황이 아닌 결과를 바란다는 의미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단 하나의 조건이다.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크로노스와 휴전 협상을 진행하지 않을 것이다.”
말문이 막혔다.
타협을 불허하는 태도에, 찰튼 남작은 현기증이 일었다.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외교를 전문적으로 맡은 찰튼 남작으로서도, 50만 골드를 내주는 조건은 권한 밖의 일이었다.
분노를 억눌렀다.
협상을 엎을 수는 없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나름의 반전을 시도했다.
“……오델리아 왕국은 이번 조건에 포함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만약.
오델리아의 생존을 바란다면.
그것을 빌미로, 50만 골드의 보상금을 깎을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사람도 아닌 녀석들의 거취를 내게 묻는 거지?”
단호하게 돌아오는 대답.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눈빛을 바라보며, 찰튼 남작은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인물인지 뼛속 깊이 깨달았다.
* * *
협상은 보류되었다.
황제의 결정이 필요했고, 크로노스로 돌아온 찰튼 남작은 자신이 경험한 상황들을 보고했다.
“……이런 상황입니다. 황제 폐하. 로만 드미트리의 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결단을 내려 주신다면, 협상 테이블을 백지화하고 크로노스 제국의 무서움을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머리를 숙였다.
거칠게 소리치며, 자신이 겪은 수모를 갚아 주길 바랐다.
머리 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찰튼 남작이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크로노스 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미트리의 협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들은 크로노스 제국의 패배를 떠들어 댈 것이다. 50만 골드는 그만한 파급력이 있는 액수지. 하지만 찰튼 남작. 나는 분명히 이번 협상을 성공시킬 것을 명했다. 내게는 50만 골드를 요구한 드미트리의 건방진 태도보다, 협상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하고 같잖은 녀석들을 상대로 무릎을 꿇은, 너의 그 나약함에 분노가 치민다.”
순간.
찰튼 남작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황급히 사죄를 구하려는 그때, 크로노스 황제의 신호를 받은 기사들이 그의 몸을 빠르게 억압했다.
콱!
“크악.”
머리가 짓눌렸다.
땅바닥에 처박힌 찰튼 남작은, 핏대가 일어난 얼굴로 소리쳤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일로 황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번 휴전을 대륙 정벌의 마지막 준비 단계로 삼을 것이다. 어떤 녀석들이 내게 반기를 드는지, 드미트리의 승리에 환호하는 녀석들이 누구인지. 그들을 모두 내 눈에 담아 두고, 머지않은 미래에 모조리 찢어 발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크로노스의 미래에는, 패배할지언정 제국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존재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죽음을 받아들여라.”
“이, 이익!”
찰튼 남작이 발악했다.
로만 드미트리처럼, 크로노스 황제 또한 타협을 몰랐다.
기사들이 바로 옆에서 검을 뽑는 소리에, 죽음을 받아들인 그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댔다.
“나는 그동안 크로노스를 위해 헌신했다! 당신의 명령이라면 개처럼 기었던 나를, 겨우 무릎을 한 번 꿇었다고 이리 죽이는 게 말이 된단 말이냐!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너희들도 다르지 않다. 내 모습이 너희의 미래일지도 모르는데, 정녕 내 죽음을 그리 방관하고만 있을 것이냐!”
크로노스의 귀족들.
그들을 비난했다.
그중 발언권이 강한 멤피스 후작을 노려보았지만, 멤피스 후작은 슬쩍 시선을 피해 버렸다.
“내가 죽는다면! 이승에 남아 너희를 저주…….”
퍽!
검이 내리꽂혔다.
피가 튀며, 머리 하나가 땅바닥을 굴렀다.
찰튼 남작.
크로노스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 그렇게 죽었다.
* * *
“클클클.”
크로노스 황제.
아니, 알렉산드르가 웃었다.
찰튼 남작의 처벌을 명한 그 순간부터, 크로노스 황제의 의식은 그의 통제에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분명히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그의 전생.
무림의 무인이었을 존재는, 적어도 전생의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과 같은 행보는 불가능했다.
단순히 무력의 강함을 떠나,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정점(頂點)에 올랐던 존재 특유의 오만함이 보였다.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흥미가 동했다.
전생에는 보잘것없던 자신이 그를 발아래로 두고 진실을 밝힌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어떤 표정을 보일까.
크로노스의 대륙 정벌은 예정된 미래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는 그를 방해할 요소가 아니라,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유흥거리 정도로 보였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은 마법을 택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너무나도 적합한 존재였다.
한때는.
자신도 무공을 신성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라의 창시자라 불리면서 오라를 갈고닦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둠 속의 존재를 만난 그 순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현세(現世)의 인간들은 알지 못했다.
스스로가 노력해서 쟁취한 힘만으로는, 무한한 삶을 살아가는 미지의 존재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불멸을 꿈꾸었다. 무공에 대한 갈망은 있으나, 무공이 세상을 정벌할 정답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자신이 따르는 그 존재를 상대로는 감히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를 통해, 마법을 택했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데구루루.
툭.
멤피스 후작의 발밑에 머리가 닿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알렉산드르가 말했다.
“멤피스 후작. 찰튼 남작의 혈육들을 모조리 죽여라. 크로노스 제국에서 나약함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의 죽음은 명백한 예시가 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상황은 대충 정리되었다.
지금부터는.
승리에 취했을 로만 드미트리에게, 50만 골드와 같이 전해 줄 선물을 준비할 차례였다.
‘너에게 보여 주지. 내가 마법을 택한 이유를.’
확.
표정이 변했다.
다시 무심하게 돌아온 크로노스 황제는, 찰튼 남작을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때.
알렉산드르의 의식은, 공간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오델리아의 수도.
성벽 위에, 한 존재가 있었다.
휘잉.
펄럭.
로브가 휘날렸다.
그 안에서 언뜻 드러나는 까만 눈동자는, 알렉산드르의 본체였다.
“네가 이 수도를 날려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라스칼에서의 일을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불을 질러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직접 그들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일만의 병력을 도륙해 버렸다.
지금 오델리아의 수도에는 포로로 붙잡아 둔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들 모두를 처리한다고 마음먹었다면, 라스칼에서의 방식은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날의 일에 경악했다.
인간의 영역에서는, 그것은 분명히 경악할 만한 행보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르는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
그가.
손을 뻗었다.
“메테오(Meteor).”
희열에 찬 음성.
그의 마력이 하늘에 닿자, 세상을 까맣게 물들이는 하늘 너머로 거대한 운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상의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몇몇은 운석을 막으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지상에 작렬했을 때 그들의 발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콰앙!
콰콰콰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사람들이 목소리가, 폭발에 휩싸여 더는 알렉산드르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마법.
오델리아의 수도는, 그렇게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