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2화 (282/615)

282화 종결 (2)

그날.

드레이크 가문을 찾아온 루카스라는 이름의 사내는, 본인을 로만 드미트리의 대리인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날 무슨 일로 찾아왔지?”

드레이크 후작.

움베르토 군부의 상징인 그는, 명성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루카스의 모습을 살폈다.

바로 옆에는 장남인 칼데론 드레이크도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전장에서 살아온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3성의 오라를 각성한 검술의 천재였다.

움베르토는 항상 크로노스의 핍박에 시달렸지만, 누군가 움베르토의 미래를 묻는다면 드레이크 부자(父子)를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둘은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압박감이 대단했다.

평범한 사람은 둘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지만, 루카스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압도적인 존재를 경험했다.

고로.

루카스의 반응은 여유로웠다.

드레이크 가문이 내준 차를 음미하며, 덤덤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향이 좋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시니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제 주군이신 로만 드미트리 님을 암살하겠다고 공표했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주군이 암살을 시도한 세력을 역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1급 암살 명단’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내가 그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건가.”

“아닙니다. 명단에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는데 한 명은 레드포드 왕국의 론돈 백작, 또 다른 한 명은…….”

시선을 옮겼다.

드레이크 후작을 지나 칼데론 드레이크를 바라보자, 드레이크 후작이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콰앙!

“이런 찢어 죽일 새끼들! 그 녀석들이 내 아들을 노렸단 말이냐? 감히, 드레이크 가문의 장자를?!”

“예. 그들은 아드님을 암살하고, 움베르토 왕국의 매국노들이 저지른 소행으로 조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움베르토의 내분입니다. 군부의 상징인 드레이크 후작님이 분노에 휩싸인다면, 외부의 적인 크로노스를 상대할 여력을 잃어버리겠지요. 그렇기에 암살 시도를 경고하기 위해서 제가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그게 끝인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나, 그것만이라면 날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백전노장.

드레이크 후작은 판을 읽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레드포드로 향하고, 루카스가 자신을 찾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루카스가 웃었다.

“맞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드레이크 가문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주군은 레드포드행을 끝내고, 발할라로 향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이 현실로 번질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때, 움베르토 왕국이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길 바랍니다. 왕국 연합은 갈대처럼 크로노스와 드미트리 사이에서 흔들리겠지만, 이번에도 크로노스를 택한다면 대륙의 판도를 뒤바꿀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설마, 크로노스와 전면전이라도 하겠다는 의미냐.”

“예.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면, 드미트리는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드레이크 후작이 감탄했다.

드미트리.

그들은 미쳤다.

최근에 대단한 행보를 보였지만, 설마 크로노스와의 전쟁까지 각오하는 줄은 몰랐다.

루카스의 말은 혼란을 낳았다.

드레이크 후작은 강단이 있는 인물이나,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은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국경에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과는 다르다.

크로노스와 같은 악마들과 전쟁을 선포했다간,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움베르토 왕국이 멸망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고민에 빠졌다.

그때, 칼데론 드레이크가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돌아보면 그동안 우연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상황을 만들었고, 드미트리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번도 비슷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전쟁을 결심했고, 이렇듯 저희에게 기회를 주었다면. 그들은 분명히 크로노스를 상대할 무언가를 확보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루카스를 보았다.

한 명의 검사로서, 칼데론 드레이크는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의 미래를 확답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로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날이 온다면. 드레이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날.

부자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가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드미트리에 연락해 새로운 미래를 약속했다.

* * *

뚝.

통신이 끊겼다.

오델리아 국왕은 넋을 잃었다.

드레이크가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를 따랐다는 말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무모한 전쟁을 감행한 것이 아니었어. 애초에 헥토르, 레드포드, 움베르토, 카이로. 대륙에 존재하는 왕국 중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해 놓고, 크로노스 제국을 드미트리만의 힘으로 쓰러트릴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판을 깔았던 거야.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이런 멍청한 판단을 내리다니.”

소름이 돋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과감하나, 그렇다고 현실을 배제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카이로와 헥토르는 처음부터 우방으로 확보하였고, 레드포드 왕국은 론돈 백작의 일로 호의를 얻었다.

그리고 움베르토.

그들은 연약한 왕을 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움베르토 왕국을 지탱하고 있는 드레이크 가문을 자극함으로써 새로운 판도를 위한 그림을 그렸다.

결국.

처음부터 드미트리는 왕국 연합의 지지가 필요하지 않았다.

겨우 프랑크와 오델리아를 회유하겠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파격적인 행보로 두 왕국의 진심을 시험했다.

프랑크의 국왕은 눈치가 빨랐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프랑크는 대세를 따랐지만, 오델리아 국왕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크로노스 제국에 빌붙는 선택을 내렸다.

절망스러웠다.

자신의 입을 스스로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저를 왜 이렇게 나약하게 만드셨습니까.”

전대 국왕.

오델리아 국왕의 아버지는, 왕관을 물려받는 아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국왕의 자리는 그렇게 즐겁기만 한 자리가 아니다. 선조(先祖)들의 아픔을 기억하거라. 크로노스 제국, 발할라 제국과 같은 강자들을 상대로 고개를 뻣뻣이 들었던 선조들은, 단 한 명도 절망적인 최후를 피하지 못했다. 어떤 왕은 제국에 찾아가 머리를 수십 번 조아렸으며, 어떤 왕은 머리가 날아가 성벽에 걸렸다. 그것이 오델리아의 현실이다. 약소국의 왕은, 약소국에 어울리는 권력과 삶에 만족해야만 한다.”

그는.

안쓰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살아온 나날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기에.

그의 아버지도, 그의 할아버지도 약소국의 왕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처절하게 말해 주었기에.

아들의 삶을 위해서 가르침을 대물림해 주었다. 앞으로, 크로노스의 마수를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은.

족쇄가 되었다.

오델리아 국왕은, 드미트리라는 대항마가 나타났는데도 차마 새로운 미래를 보지 못했다.

오델리아의 선조들.

그들의 절망이, 그들의 고통이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만약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해 주었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불가능했다.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고, 상상조차 새로운 미래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벌컥!

“서, 성문이! 성문이 뚫렸습니다!”

수하가 소리쳤다.

절망에 찬 그의 표정에, 오델리아 국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델리아 왕국은.

자신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다.

* * *

극과 극.

몰락의 길로 들어선 오델리아와는 다르게, 프랑크 국왕은 위풍당당하게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

수뇌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들어선 프랑크 국왕은, 상석에 앉으며 수뇌부들의 존경 어린 시선을 받았다.

“국왕 폐하의 선택이 옳았습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물리침으로써, 저희는 제국의 마수에서 벗어났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대단한 혜안(慧眼)을 타고나실 수 있는 겁니까? 진즉에 국왕 폐하의 안목이 범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과감한 결단으로 프랑크 왕국을 이끌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국왕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프랑크 국왕 폐하 만세!”

난리가 났다.

드미트리의 승전보에,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하하하하. 다들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나는 흘러가는 흐름을 보고, 크로노스 제국의 만행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진짜 대단한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지. 먼저 전쟁을 선포한 만큼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힘으로 크로노스를 물리칠 줄은 몰랐다.”

“그건 대륙의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 하하하핫.”

경쾌하게 웃었다.

목젖이 보일 만큼, 프랑크 국왕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양자택일.

두 개의 갈림길에서, 프랑크 왕국은 고민 끝에 드미트리를 택했다.

그런데.

오델리아 왕국이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에, 그리고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소름이 쫙 돋았다.

오델리아의 최후는 프랑크의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덜컥 크로노스 제국의 계획을 받아들였다면, 프랑크도 무사할 수 없었다.

자신의 판단은 옳았다.

지금부터는, 유리한 상황을 확실하게 살려야만 했다.

프랑크 국왕이 말했다.

“크로노스 제국은 오델리아 왕국을 공격함으로써 대륙의 왕국들과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물리친 이때, 크로노스 제국을 몰아붙여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병력을 집결시켜라. 내일 새로운 왕국 연합과의 회의를 진행한 직후, 그간 프랑크를 멸시하고 핍박한 크로노스 제국에 복수할 것이다.”

결단을 내렸다.

프랑크 국왕의 명령에, 수뇌부들은 현명한 판단이라면서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프랑크 국왕은 황당한 소식을 들었다.

“뭐라고? 크로노스가 휴전을 원한다고?!”

그건.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예상 밖의 전개였다.

* * *

크로노스의 대리인.

찰튼 남작이었다.

카이로스를 찾은 그는, 상석에 앉은 카이로 국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전쟁은 사소한 갈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드미트리와 카이로가 분노하고 전쟁을 선포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크로노스 황제 폐하께서는 이만 전쟁을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이만 휴전을 선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는 서부 전선에서의 패배 때문에 내린 결단이 아닙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이미 후속 공격에 대한 준비를 모두 마쳤으나, 크로노스 황제 폐하가 더는 무분별한 희생을 바라지 않기에 이와 같은 자비로운 선택을내리셨습니다.”

그는 당당했다.

전쟁에 패배하고도, 휴전을 먼저 언급하고도, 전혀 꿇릴 것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사방이 적이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그를 노려보았지만, 크로노스의 대리인으로서 살며 단 한 번도 두려움을 느껴 보지 못했다. 자신의 배경이 크로노스 제국이라는 것. 그것은 무한한 자신감을 부여했다.

“이번 휴전은 드미트리와 카이로의 입장에서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크로노스와 끝까지 간다면, 두 왕국의 힘으로 크로노스를 감당할 자신이 있겠습니까? 단 한 번의 승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특별히. 만약 휴전을 받아들이신다면, 평화의 의미로 오델리아 국왕을 살려 드리겠습니다. 오델리아의 수도는 지금 크로노스에 함락당한 상태이나, 저희의 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델리아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내려 주십시오.”

그것은 절대.

패배자의 요구가 아니었다.

크로노스의 제안은, 제안이라는 의미가 무색할 정도의 강제성을 보였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 당신은 크로노스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이로 국왕이 발언권을 넘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실질적인 실세임을 알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곳에 집중되었다.

그러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찰튼 남작. 전쟁 도중에 전령을 죽이지 않는 법도는 누가 정했지?”

명백한 하대였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말을 놓는 그의 모습에, 찰튼 남작은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로 따지듯 소리쳤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대륙법은 ‘전령’을 보호할 의무에 대해 말한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너는 전령으로서의 적법한 절차를 따랐나. 미리 우리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백기를 먼저 내걸지도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은 오만방자하게 전령의 워프를 통보했다. 대륙법에 명시하는 절차에 의하면, 너는 전령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게 무슨.”

순간.

찰튼 남작이 당황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우린 아직 전쟁 중이다, 찰튼 남작.”

살의(殺意)를 보였다.

검을 뽑지 않았는데도, 눈빛만으로 사람의 존재를 억죄었다.

“적진 한복판에서 전령으로 존재하고자 한다면, 백기를 내건 의미로 무릎을 꿇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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