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종결 (1)
휴전 명령.
상황이 변했다.
전쟁을 끝내자는 크로노스 황제의 명령에, 멤피스 후작은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수하를 불러들였다.
“상황은?”
“계획대로 작전을 진행 중입니다. 작전을 맡은 지휘관들이 움베르토 왕국과 오델리아 왕국의 수도로 워프를 시도했으며, 오델리아 왕국은 현재 내성에서 농성을 벌이는 왕국의 군대를 소탕하고 있습니다. 길어야 며칠입니다. 며칠 안으로, 두 왕국은 항복을 선언할 것입니다.”
“……돌이키기에는 늦었군.”
이번 작전.
양쪽에서 진행되었다.
뱀포드 공작의 30만 대군은 드미트리를 정면에서 처단하며, 움베르토와 오델리아 왕국은 연합을 빌미로 무혈입성(無血入城)을 시도했다.
대륙 정벌의 야망에는 속국(屬國)의 개념이 포함되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이 유일한 나라로서 존재하길 바라기에, 움베르토와 오델리아를 달콤한 말로 유혹하였으나 약속을 지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세상은 힘의 논리를 따른다.
나중에 약자들이 신의를 들먹인다고 한들, 몰락한 나라의 잔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황제 폐하가 휴전을 원한다는 것이다. 작전대로라면 오델리아와 움베르토를 함락시킴으로써, 그곳을 시작으로 왕국 연합을 완전히 잡아먹겠다는 계획이었다. 왕국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 있는 오합지졸들을 무너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드미트리와의 휴전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왕국 연합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애매한 상황이었다.
짜증이 일었다.
크로노스 황제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명령을 따르겠다고 제국의 병사들을 그냥 물릴 수는 없었다.
이미 검을 뽑은 상황이다.
무라도 베어 버리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이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서부 전선에서의 패배.
그에 겁을 먹은 크로노스 제국이, 모든 병력을 철수하는 것처럼 비추어질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할까요?”
수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델리아의 함락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멤피스 후작의 결단은 한 왕국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고민은 길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멤피스 후작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작전은 계속해서 진행한다. 일단 움베르토와 오델리아 왕국을 함락시키고, 우리는 드미트리와의 휴전 협상에서 그들을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기 위한 ‘인질’로 삼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내가 따로 황제 폐하에게 보고하겠다. 그러니 작전을 이행하고 있는 지휘관들에게 전해라. 딱 3일을 주겠다고. 그 안에, 움베르토와 오델리아의 통제권을 완벽하게 확보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수하가 빠르게 물러났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로만 드미트리. 너의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크로노스 제국의 위상이 떨어지는 결말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 * *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델리아의 수도는 활활 불타오르며 멸망의 전조를 보였다.
“국왕 폐하! 오델리아 왕국군 2개 대대가 적들에 의해 궤멸당했습니다. 워프 게이트는 완전히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으며, 워프로 넘어오는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동원한 병력 중에, 크로노스의 제4 기사단이 있었습니다. 왕실 기사단이 그들을 저지하려고 나섰습니다만, 그들의 수장에게 모조리 당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내성마저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어서,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퇴로가 막혔습니다! 이제는, 도망칠 방법이 없습니다!”
보고가 밀려들었다.
절망에 빠진 얼굴로 귀를 찢을 듯이 소리치는 수하들의 모습에, 오델리아 국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크로노스와 미래를 도모할 때만 하더라도 비참하지만 이게 왕국의 미래를 위해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건만, 눈앞에 닥친 현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끝났다.
내성 너머.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살려달라면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오델리아 국왕은 살아남기 위해서 내성의 문을 걸어 잠갔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비굴하고 잔인했던 목소리가 분노로, 국왕을 저주하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는 고통에 찬 비명으로 변해 버렸다.
막다른 길에 몰렸다.
오델리아 국왕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절대 성문을 열지 마라! 우리는, 이곳에서 끝까지 결사의 항전을 할 것이다.”
그도 알았다.
크로노스 제국은 자신을 절대 살려 주지 않을 것이며, 내성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의 명줄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델리아 국왕은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박쥐처럼 이리저리 붙어 다닌 이유는, 그만큼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내성은 견고하다.
이곳이 무너지려면 며칠 걸릴 테니, 어떻게든 그 안에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오델리아 국왕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에서 승리했습니다. 크로노스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8서클 마법사와 크로노스 랭킹 2위에 랭크되어 있는 한니발을 동원했습니다만, 그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드미트리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드미트리는 정말로, 왕국 연합의 힘을 빌리지 않고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쳤습니다!”
수하의 말.
경악했다.
라스칼을 비롯해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때만 하더라도, 그래도 크로노스 제국 본대와의 전투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한 결과였다.
게릴라 작전은 본인들의 힘이 부족하기에 발악하듯 택하는 방법이지,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전력의 차이는 너무나도 극심했다.
그런데.
전면전에서도 승리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오델리아 국왕은, 넋을 잃은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드미트리가 이겼다고?”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드미트리.
그들의 승리는 수많은 가능성에서,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기적적인 결과였다.
말이 안 되는 수준 정도의 결과가 아니다.
불가항력(不可抗力).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에, 살기 위해서 크로노스 제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헥토르, 레드포드, 프랑크는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는데, 그걸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안목이 문제일까?
아니.
아니다.
그들이 제정신이 아닌 거지, 상식적인 사람은 자신과 같은 결단을 내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확실한 것은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쳤고, 크로노스 제국은 약속을 깨고 오델리아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 드미트리는 크로노스를 물리칠 만큼의 저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오델리아를 버리지 않고 편을 들어준다면, 지금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오델리아는 끝나지 않았다.
선택은 잘못되었지만, 지금이라도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지금 당장 드미트리에 마법 통신을 연결하라! 당장!”
마지막 동아줄.
소리치는 오델리아 국왕의 얼굴에는, 절박한 자의 간절함이 보였다.
* * *
화면 너머.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오델리아 국왕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크로노스 제국이 오델리아를 공격했습니다! 지금은 내성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제국의 마수(魔手)로부터, 오델리아를 구해 주십시오!”
간곡한 부탁이었다.
자존심은 내던지고, 감정에 호소했다.
[드미트리가 왜 당신들을 도와야 합니까?]
“……예?”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로만 드미트리는, 참담한 오델리아의 상황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이 오델리아의 수도를 공격했다는 것은, 당신들이 그들에게 ‘워프’를 허락했다는 의미입니다. 드미트리의 편을 들지 않았다고 비난할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책임을 지십시오. 크로노스 제국과 협력하여 모종의 계획을 도모했다면, 그들이 오델리아 왕국을 배신했다고 한들 스스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색이 창백해졌다.
배반한 사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델리아 왕국이 크로노스 제국에 붙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갈대처럼 흔들릴 마음이라면 어차피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들의 선택에 맡겼고, 지금부터는 스스로의 선택을 책임질 차례였다.
오델리아 국왕이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저희가 백 번, 천 번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오델리아가 멸망하는 꼴을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크로노스 남부. 네 개의 왕국이 형성한 왕국 연합은,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오델리아와 움베르토 왕국이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면. 왕국 연합을 집어삼킬 크로노스를 드미트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끝입니다. 오델리아의 멸망은,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간절하게 말하면서도.
협박을 섞었다.
자신들의 명운이, 드미트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분위기가 변했다.
최소한의 예의조차 버려 버린 로만 드미트리가,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오델리아 왕국이 크로노스 제국의 작전에 동참한 그 순간부터, 너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런데 우리가 왜 너희를 도와주기 위해 힘을 들여야 하지? 그리고,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 드미트리는 왕국 연합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쳤다. 드미트리만의 힘으로도 제국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는데, 우리가 변절자에 불과한 너희를 받아들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차라리 살고자 했다면 처음부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어야지. 헥토르, 레드포드, 프랑크, 움베르토. 오델리아 왕국을 제외한 네 개의 왕국은 드미트리를 선택했고, 그들은 나의 보호를 받는 울타리에 들어왔다.]
순간.
당황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도 반응인데, 네 개의 왕국에 ‘움베르토 왕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왕국 연합에, 너희 오델리아의 자리는 없다.]
“자, 잠깐……!”
뚝.
통신이 끊겼다.
뒤늦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려고 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사죄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드미트리 공국이 크로노스 제국을 정면으로 물리친 그 순간부터, 그들이 크로노스와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했어야만 했다.
공국과 제국의 명칭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스스로를 증명한 드미트리를 상대로, 오델리아는 크로노스의 편에 붙었던 것처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움베르토가 그들의 울타리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몸이 덜덜 떨렸지만, 그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움베르토 왕국에 통신을 연결했다.
* * *
뚝, 뚝.
피가 떨어졌다.
회색의 머리칼을 치렁치렁 기른 사내가, 마법 통신을 받았다.
[……이, 이게 무슨.]
화면 너머.
경악으로 얼룩진 오델리아 국왕의 표정이 보였다.
눈앞에 참극이 벌어졌다.
움베르토 왕궁은 피로 흠뻑 물들었고,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로 한 사내가 통신을 받았다.
사내가 오델리아 국왕을 바라보며 머리를 넘겼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던 오델리아 국왕은, 이윽고 상대의 정체를 떠올렸다.
[……칼데론 드레이크?!]
드레이크 후작 가문의 장남.
그가 바로.
칼데론 드레이크였다.
자신을 알아보는 오델리아 국왕의 말에, 그가 씰룩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크로노스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신 모양입니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왕국 연합은 크로노스의 핍박을 이겨 내지 못한, 선조들의 한이 담긴 결과물입니다. 그러지 말아야 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을 따르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던, 움베르토의 국왕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오델리아와 움베르토.
그들의 미래는 엇갈렸다.
오델리아는 크로노스와의 협력을 받아들였다면, 움베르토 왕국은 국왕의 의견에 반발한 드레이크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다.
드레이크 가문은 군부의 상징이다.
칼데론 드레이크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왕궁에 쳐들어갔고, 직접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국왕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그게.
지금의 결과였다.
피로 물든 왕실은, 크로노스 제국이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을 차단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를 버리고 드미트리를 따른 거지?]
“말은 똑바로 합시다.”
참.
어리석었다.
오델리아는 대세를 읽을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머리가 돌아가는 것조차 느렸다.
“우리가 아니라 오델리아 왕국 하나를 버린 것이고, 전 정권은 당신들의 편이었을지 몰라도 드레이크 가문을 필두로 움베르토 왕국의 충신들은 애초에 크로노스 제국을 따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드미트리가 전쟁을 선포한 그 날, 저희는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기억을 되새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레드포드로 향했을 때.
드레이크 가문은,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