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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화 (277/615)

277화 크로노스의 진실 (1)

역했다.

차갑고, 익숙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세상이 뒤틀리고 빠르게 변화하는 와중에도, 스스로의 통제를 잃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였다.

기나긴 어둠을 뚫고 보랏빛이 사방으로 번졌다.

처음 새로운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 로만 드미트리의 시야에는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메마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신성력의 보호를 받지 않고도 압력을 버텨 내다니. 역시,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어.”

셰피르였다.

백발의 마법사는, 오라의 여파에 의해 몸이 완전히 난도질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파스스스스스-

보랏빛의 기운과 검은 마나가 뒤얽히며, 셰피르의 몸을 빠르게 회복했다.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마력의 힘도 강해졌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무한한 힘을 얻었고, 반대로 로만 드미트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스러운 힘을 사용하는 존재.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 준비한 함정이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셰피르에게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계획이 변동되었다.

셰피르가 직접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라면, 이렇게 해서라도 죽일 가치가 있었다.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은 ‘오라’를 찬양한다. 오라의 위력을 구분해서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떠들어 대지만, 이 세상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하등한 힘인지를 알고 있지. 그런데, 네가 사용하는 오라의 정체는 대체 뭐지?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오라 검사라고 분류되는 그 누구도 ‘8서클의 마법’을 베어 버리는 위력은 보여 주지 못했다.”

확.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을 일으켰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이 그를 중심으로 들끓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알아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네가 처음 우리의 계획을 방해했을 그 시점에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 이제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를 진심으로 인정한다. 그렇기에 나 셰피르는, 그리고 우리는. 너를 죽이는 일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파스스스.

주변으로.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전에 경험했던 그림자들과는 형태가 조금 달랐는데, 전신이 어둠으로 물들었을 뿐 형태는 마치 짐승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숫자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면, 시간이 갈수록 수백, 수천의 그림자들이 주변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곳은.

셰피르의 세계였다.

그로서도 몇 번 사용하지 못하는 힘을,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기 위해 사용했다.

“재밌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샐러맨더.

이 세상에는 특별한 비밀이 있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흑막(黑幕)은 크로노스 제국을 통해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었고, 자신의 행보는 그것에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아직 그 진실을 알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난 정보만으로는 셰피르가 누구인지, 이 세상은 무엇인지, 샐러맨더의 진실에는 조금도 닿을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거슬렸다.

승리를 확신하는 셰피르의 저 태도가, 입가에 걸린 웃음이.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셰피르가 분노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여유로운 반응을 보이자, 그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마력을 일제히 폭발시켰다.

“끝까지 여유를 부리는구나. 로만 드미트리! 너는 이곳에서 절대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퓨리 오브 더 헤븐.”

콰르르르르르르릉.

마력이 폭발했다.

이전과는 달랐다.

먹구름이 일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는 엄청난 파괴력을 보였었고, 지금은 보랏빛 하늘과 융화되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광경이 펼쳐졌다.

동시에 그림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번만큼은 확실히 이 싸움의 끝을 보려고 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세상이 번쩍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는.

탁.

일곱 번째 걸음.

보랏빛 기운이 로만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며, 로만 드미트리가 번개를 정면에서 맞닥트렸다.

‘천마검법 후반부 이초식.’

그것은.

번뜩.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중원 무림에서 그 누구도 막아 내지 못한, 천마 백중혁의 일격이었다.

* * *

둘의 격돌.

그것은 현세(現世)에 허락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한 번의 충돌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고, 보랏빛 세상이 완전히 붕괴할 만큼 격렬하게 충돌하고서야 결론에 도달했다.

무릎을 꿇은 쪽은 바로 셰피르였다.

수천의 그림자는 모두 도륙되었고, 전력을 끌어올린 셰피르는 마나의 공백으로 인해 서서히 검은 연기로 흩어지고 있었다.

파스스스스.

“마, 말도 안 돼.”

패배.

믿을 수 없었다.

이 공간에서의 자신은 무적이었다.

적어도 현세에 허락되는 힘으로는, 신성력을 사용하는 그 존재조차도 자신을 상대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떨어지는 번개를 상대로 시도한 단 한 번의 공격에, 셰피르는 회복 불가의 충격을 받았다.

끝났다.

무릎을 꿇었고,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콱.

머리를 움켜쥐었다.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얼굴 전체를 틀어쥐더니, 로만 드미트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로노스 제국은 이미 대륙 정벌을 실현할 힘을 갖추었다. 그런데 왜 그간의 언행과는 다르게, 너희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 나는 그 진실을 알고자 한다. 대륙 정벌의 야망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에 와서 병력을 움직인 이유는 무엇인지. 단순히 내가 벌인 일 때문만은 아니겠지. 내가 행한 일들은 기폭제에 불과하고, 분명히 너희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존재한다.”

흑막.

진실을 알아내고자 했다.

무림을 공포에 빠트렸던 환마의 기술에는, 인간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매우 위험한 힘이 있었다.

문제는.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힘이었다.

타인의 생각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생각과 뒤얽히며 폐인이 될 확률이 높았고, 그렇기에 상대의 생각을 읽는 것은 길어야 3초 정도였다.

위험을 알고도 감수할 가치는 있었다.

3초 안에, 셰피르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몇 가지의 정보를 파악할 생각이었다.

꽈악.

머리를 틀어쥐었다.

셰피르가 몸부림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확.

머릿속이 뒤얽혔다.

세상이 확장되며, 셰피르의 기억으로 추정되는 몇 가지의 정보들이 흘러 들어왔다.

[스벤]

[미스틱]

[셰피르]

그건 이름들이었다.

셰피르의 머릿속에는 단단한 철옹성(鐵甕城)이 형성되어 있었고, 어둠의 장막에 막혀 있는 그 너머의 진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겉핥기식의 정보.

일부의 정보만 확보하고 이만 연결 고리를 끊으려는데, 마지막에 하나의 이름이 추가로 머릿속에 빨려 들었다.

[……]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눈이 확장되었다.

그것은, 그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사라지고.

전장은 혼란에 빠졌다.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뱀포드 공작이, 상황을 파악하고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셰피르님이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했다! 전군, 공격하라!”

상황이 반전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부재.

한니발이 죽어 가는 모습에 벌벌 떨었던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뱀포드 공작의 명령에 공포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크로노스는 30만 대군이고, 드미트리와 카이로 연합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였다.

아무리 한니발을 비롯한 크로노스 제국의 오라 검사들이 학살당했다지만, 지금은 전쟁을 끝내 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공격하라!”

“지금이다! 건방진 드미트리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라!”

적들이 밀려들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그들의 모습에, 카이로의 병사들은 창백한 안색을 보였다.

믿음의 근간.

로만 드미트리가 없다.

패배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었다.

그때였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크리스.

그가 앞으로 나섰다.

오라를 일으키며, 그가 망설이지 않고 혼자 파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르르르르르릉.

“크악!”

양군이 격돌했다.

크리스의 검이 번뜩이며 순식간에 수십 명의 머리를 날려 버렸고, 크리스는 우악스럽게 적의 대열을 파고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누누이 말했었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 크리스는 지휘관으로서 존재하길 바란다고.

지금 혼란에 빠진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말뿐인 명령이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이 필요했다.

마치.

로만 드미트리처럼.

크리스는, 본인이 그러한 버팀목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드미트리의 크리스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적들이 피를 흩뿌렸다.

상대는 일반 병사도, 오라를 사용하는 검사도 있었지만, 디에고조차 반응하지 못한 검술을 막아 낼 만한 실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크리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30만의 병력은 넓은 평야를 가득 메울 만큼 엄청난 숫자인데도, 그의 주변에는 쌓여 가는 시체로 휑하게 보일 정도였다.

한 발.

두 발.

길을 열었다.

크리스가 보여 주는 무력에, 드미트리의 병사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크리스님을 따라라!”

“우리는 무적의 드미트리다! 우리는 언제나 승리한다!”

바르코.

남부 전선.

크로노스.

발할라.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며 매번 승리를 이루어 낸 병사들은, 역경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나약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그간의 경험으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득달같이 몰아붙였다.

바로 옆에서 동료의 목이 날아갈지라도,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눈에 불을 켜며 적의 몸을 베었다.

병사 하나가 수십을 베었다.

몸에 적들의 무기가 박히고 베여도, 그들은 피로 번들거리는 입으로 고함을 내지르며 몸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적들을 도륙해 버렸다.

전장에서 병사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삶은 이렇게 끝나게 되겠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죽은 자들의 가족을 보살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주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확고한 믿음은, 맹렬하게 타올라 30만 대군을 상대로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리고.

크리스와 더불어, 드미트리의 악귀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 * *

퍽!

푹푹푹!

“컥.”

“크악!”

적진 한복판.

케빈이 학살을 벌였다.

대열을 유지하며 나아가는 크리스와는 달리, 케빈은 공간을 파고들더니 닥치는 대로 도륙해 버렸다.

천마검법의 사용으로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내부에서 들끓는 마나는 몸을 한계로 밀어 넣었지만, 드미트리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몸을 사릴 생각이 없었다.

드미트리의 검.

자신의 존재 의미다.

검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했기에, 케빈은 존재감을 무섭게 부풀리며 보이는 족족 학살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피에 미친 광인(狂人)처럼, 통제되지 않는 괴물은 드미트리의 적으로 분류하는 모든 적을 학살했다.

베고.

베고.

또 베었다.

길을 열며, 짧은 시간에 수백의 적을 베어 내자 케빈의 얼굴이 피로 흠뻑 물들었다.

드미트리의 악귀.

명성에 부합한 모습이었다.

먼발치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뱀포드 공작으로서는, 드미트리의 선전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드미트리의 저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드미트리와 크로노스.

전력의 차이가 3배 이상이었다.

단순히 산술적인 계산만으로도 1명의 병사가 3명의 병사를 감당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는데, 드미트리 병사들의 집념은 상황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적들의 병력 절반 이상이 카이로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카이로의 병사들은, 드미트리의 병사들만큼 악착같지 않았다.

인정했다.

드미트리는 강국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가지고,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세력을 구축해 냈다.

그렇기에.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라도 진실을 알았기에.

셰피르가, 로만 드미트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다음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지금 드미트리를 멸하지 않는다면, 크로노스는 더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크로노스의 마법사들은 힘을 개방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들을 모조리 죽여라!”

화악.

크로노스의 마법사들.

그들이 힘을 발현했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폭발적인 마나는, 전장의 양상을 뒤바꿀 강력한 무기였다.

셰피르를 제외하고도.

크로노스 제국이 갖춘 힘은, 그들이 어째서 대륙 제일의 강국이라고 불리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때였다.

마법이 작렬하는 순간,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만 멈추어라!”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하얀 빛.

빛의 기둥에 둘러싸인 순백의 기사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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