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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화 (276/615)

276화 천마재림 (天魔再臨) (8)

기괴한 장면이었다.

고통에 몸을 떠는 한 인간과.

그를 고통에 빠트리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는, 전장이라는 공간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으, 으으, 으으윽.”

신음이 끊이질 않았다.

처음에는 몸부림이 거셌다면, 계속되는 고통에 감각이 무뎌지는 것만 같았다.

한니발.

크로노스가 자랑하는 검이 그렇게 죽어 갔다.

사람들은 경악과 충격, 공포와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항상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소문은 극단적이었다.

바르코를 무너트렸을 당시에는 그들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하인을 위한 파티를 주최하는 등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다.

사람은 양면성(兩面性)을 가진 존재다. 하지만 너무나도 극단적인 성향은, 사람들로서는 괴리감이 들었다.

이제는 보였다.

울타리 안과 밖의 의미를.

적어도 ‘적’이라고 인식되는 상대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같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짐승.

악마.

그와 비슷한 무엇이라고 불리든 간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이길 바라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살의(殺意)를 가지고 전쟁을 벌이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쓴다고 선을 지키는 모습은 마교의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죽든가, 죽이든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존재는, 고문을 했다고 알려진 한니발을 잔인하고 처참하게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

마침내.

한니발의 몸이 축 늘어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피로 흥건한 머리를 뒤로 넘겼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건가.”

뚝, 뚝.

머리칼 끝자락에서.

핏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방금까지 살아 숨 쉬던 한니발의 피라는 사실을 알기에, 뱀포드 공작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전장에도 인간으로서의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잔악한 일을 벌이고,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는 것이냐? 앞으로 크로노스에게 생포되는 너의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지금 네가 한 행동은, 선을 완전히 넘었다는 의미다.”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로만 드미트리가 히죽, 웃었다.

서부 전선에서의 패배.

생포 당한 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안락한 죽음을 위해서,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따위는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온 삶에서 통용되지 않는 얘기였다.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전장에 선 순간부터, 모두가 감당해야 할 몫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의 대가일 뿐이다.

다만.

자신을 따랐다는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도록.

전쟁은 반드시 승리로 이끌 것이고, 그들이 당한 것들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정도로 되돌려 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내게 적으로 규정한 존재들은 인간이 아니다. 내 칼끝을 마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곱게 죽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았어야지. 너희가 오지 않겠다면. 내가 그쪽으로 가지.”

걸음을 옮겼다.

단 한 명.

겨우 한 명이 다가오는 상황에,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무기를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언행.

공포, 그 자체였다.

크로노스를 상대로, 이런 행보를 보인 존재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기가 라이트닝(Giga Lightning).”

번뜩.

콰콰콰콰쾅!

한 줄기의 빛이,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 * *

콰르르르르르릉.

세상이 번쩍였다.

주변을 하얗게 물들이는 강력한 힘에, 순간 뱀포드 공작은 로만 드미트리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버텨 내다니. 로만 드미트리, 너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구나.”

셰피르였다.

기습적으로 6서클의 마법을 발현한 그는, 기가 라이트닝이 작렬한 공간에서 반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발견했다.

셰피르는 크로노스의 기사들과 로만 드미트리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실제로는 더욱 강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륙 제일검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오라 검사를 보았지만,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경지에 올라선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크로노스의 랭킹 1위조차도.

이만한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팟-

로만 드미트리가 마력을 뚫고 나왔다.

그로부터 일어나는 전류에, 셰피르가 말했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 만큼 대담한 녀석이, 그간 주제도 모르고 크로노스 제국에 대항하던 녀석들과는 다르게 매번 승리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지. 그런데 지금 너를 보니, 그간의 패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같은 괴물과 싸우는 일에, 피라미들로서는 승리할 방법이 없었겠지.”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이 일어났다.

8서클.

현실에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었던 경지.

셰피르는, 그런 존재였다.

뱀포드 공작이 드미트리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했던 이유는, 한니발을 비롯한 오라 검사들이 아니라 바로 셰피르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8서클 마법사는 절대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다고 한들, 그 또한 천외에 들어선 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이 확장되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힘에, 셰피르가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했다.

“지금부터 나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전력을 다하겠다. 어디 한번 버텨 보거라.”

팟.

마력이 휘몰아쳤다.

서클이 회전하며, 검은 마력이 일어났다.

그 순간.

“리바이벌(reviver).”

그것은.

케케묵은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금단(禁斷)의 마법이었다.

* * *

벌떡.

“크악.”

“크아아악!”

시체들이 일어났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도륙당했던 병사들을 비롯해서, 크로노스 제국의 기사들이 팔다리가 떨어진 몸뚱이를 거칠게 일으켰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상처 부위에서 뚝뚝 떨어지는 진득한 피에, 초점을 잃고 쌀알만큼 작아진 동공은 망자(亡者)임이 분명했다.

그것만이었다면.

리바이벌은 금단의 마법이라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오라 검사였던 존재들이, 셰피르의 명령에 따라 오라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오라의 폭풍이 일었다.

다리를 잃은 한니발은 부러진 팔을 질질 끌면서 다가왔고, 수백의 병력이 일제히 로만 드미트리를 덮치는 모양새가 되었다.

리바이벌의 존재에 굳이 한니발을 돕지 않았다.

세간에 알려진 크로노스의 강자들은, 셰피르에게 그리 중요한 목숨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번뜩.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달려들던 망자들이 단번에 찢겨 나갔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재밌는 수작을 부리는구나.”

망자의 부활.

익숙한 그림이었다.

중원 무림에는 강시와 같은 망자를 다루는 부류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마교의 행보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나약하기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다.

망자를 포함한 적들이 얼마나 많든 간에, 모조리 도륙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팟.

땅을 박찼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망자들을 베어 버리며, 그 너머에 존재하는 셰피르를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에.

셰피르는, 여유롭게 마력을 일으켰다.

“퓨리 오브 더 헤븐(Fury Of The Heaven).”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먹구름이 일었다.

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개 다발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공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비처럼 내리쳤다.

콰앙!

콰콰콰콰쾅!

세상이 번쩍였다.

인간의 육체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고, 로만 드미트리도 셰피르가 다루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법사들은 ‘자연의 기운’을 활용하는 족속들이다.

자연재해(自然災害)가 인간의 통제를 따른다는 사실은, 중원 무림에서도 먹힐 강력한 힘이었다.

마법사들은.

신의 영역에 닿았다.

그리고, 전생의 로만 드미트리 또한 스스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오보.

마나가 휘몰아쳤다.

발끝에서부터 분출하는 오라가, 로만 드미트리의 검을 통해 발현되었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일격.

허공을 베었다.

작렬하는 번개와 오라가 부닥쳤고,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무형(無形)의 번개가 그대로 찢겨 나가고 말았다.

셰피르로서도 경악스러운 순간이었다.

세상에 마법을 검으로 베어 버린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게다가 8서클의 마법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번개를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셰피르는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순식간에 더블 캐스팅을 발현했다.

“플레어(Flare), 블링크.”

콰앙!

화르르르르르르륵.

강력한 화력으로 견제하고, 동시에 몸을 이동시켰다.

그런데.

셰피르로서는 알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불의 속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과 예민한 감각은 블링크가 이동하는 방향을 곧바로 포착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셰피르의 몸은 원래 있었던 위치에서 10m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가 시각을 되찾자마자, 불을 뚫고 나타난 로만 드미트리가 보였다.

화륵.

찌지지지직.

로만 드미트리 주변으로.

전기와 화염이 넘실거렸다.

리바이벌로 소환한 망자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보통의 마법사들이면 당했을 상황에, 셰피르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데스 핸드(death hand).”

쾅!

콰콰콰콰콱!

바닥에서 손바닥이 가시처럼 치솟았다.

그것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몸을 억죄었고, 셰피르의 눈이 까맣게 물들었다.

어둠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그가 ‘그림자’로서의 존재감을 보이며, 마력이 집결되는 손가락을 가리켰다.

“죽어라.”

8서클의 퓨리 더 오브 헤븐을.

압축(壓縮)해 버렸다.

강렬하게 일어나는 불빛이 조그만 구체로 변하더니,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번뜩.

공간이 소멸되었다.

빛이 향하는 길목에 따라, 주변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콱!

공기가 뒤틀렸고, 땅바닥이 일어났으며, 그 주변에 존재하던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하얀빛에 휩쓸리고 말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이었다.

셰피르는 8서클의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보였다.

그 순간.

화악.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얀빛을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여섯 번째 걸음.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마나가 휘몰아쳤다.

셰피르는 직감했다.

이번 공격을 당하는 순간, 자신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 * *

8서클의 경지에 오르고.

셰피르는 스스로 신이 되었음을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강자들은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한니발 따위는 가볍게 처리해 버릴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는 일에 그가 선택되었다.

8서클의 마법이라면, 서부 전선을 무너트리고 로만 드미트리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니발이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셰피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질 못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마력이 휘몰아쳤다.

죽는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눈을 부릅뜨고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어떻게 겨우 삼십 년도 살지 못한 그가, 자신을 압도하는 무력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가 마법사의 천적(天敵)이라는 것이다.

8서클의 마법을 베어 버리고, 화염의 마법은 육탄 돌파로 뚫어 버리고, 블링크를 사용해도 로만 드미트리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판단의 착오였다.

이 녀석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크로노스도 전력을 한곳에 집중해야만 했다.

천외의 경지에 도달했기에.

8서클의 마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상식에 부합하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눈이 하얗게 변했다.

링크(link).

그의 의식이, 심연의 공간 어디론가 향했다.

‘죄송합니다. 그 계집애를 상대로 쓰려고 했던 것을 지금 사용해야겠습니다.’

허락을 기다릴 새도 없었다.

자신의 몸을 가르는 파괴적인 힘에, 셰피르는 마력을 폭발했다.

“축하한다. 너는, 우리가 처음으로 인정한 존재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마력의 대폭발.

공간이 뒤틀렸다.

우그러지는 차원의 틈에 마치 블랙홀(black hole)과 같은 공간이 생겨났고, 그곳에서부터 강력한 힘이 몰아치며 주변의 모든 존재를 빨아들였다.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피할 수 없었다.

셰피르와 로만 드미트리.

그렇게, 둘은 어둠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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