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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화 (269/615)

269화 천마재림 (天魔再臨) (1)

라스칼을 함락한 직후.

서부 전선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크로노스 제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크로노스 동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코르타스로 향했다.

그곳은 카이로 왕국 남부 전선의 후방 진지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크로노스 제국에서 동부로 이동하는 모든 물자나 인력들은 코르타스의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고, 간혹 워프 게이트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에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위치의 워프 게이트가 유일한 수단이었다.

크로노스가 추격에 열을 올리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한 인물을 대동한 채 코르타스에 도착했다.

“……경계가 너무 삼엄한데요?”

한 3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사내는 불안한 눈빛을 보였다.

그의 이름은 넬슨이었는데, 드미트리의 소속도, 그렇다고 전투 병과를 전문적으로 훈련한 자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나섰다.

다른 병력은 모두 서부 전선으로 복귀했지만, 근방에 숨어 있던 넬슨은 불타오르는 라스칼을 뒤로하며 코르타스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목적지를 눈앞에 두었다.

삼엄한 경계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길을 확보하겠다.”

어둠에 스며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성벽으로 다가가더니,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날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성벽 위를 타고 올라갔다.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사방을 경계하는 병사의 모습은 그대로였는데, 숨 막히는 긴장감을 뚫고 밧줄 하나가 아래로 떨어졌다.

촤르르르륵.

밧줄을 이용하라는 신호임을 알았다.

넬슨은 밧줄을 잡고 힘겹게 올라갔고, 그제야 성벽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했다.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선 채로 죽었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그 자세 그대로 초점을 잃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일부러 발각의 시기를 늦추기 위해서 병사들을 세워 둔 것 같았다.

확실히 사람들이 찬양하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의뢰한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었다면, 이 위험한 계획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부터는.

암살의 연속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먼저 걸음을 옮기면서 경비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처리했고, 덕분에 적진 한복판인데도 넬슨은 별다른 위험 없이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번 작전은 은밀하게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는 병사들을 대동하지 않았고, 코르타스로 이동하는 시간에 전력의 공백이 생길 것을 염려해서 크리스를 비롯한 병사들을 서부 전선으로 보냈다.

최소 3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전에 왕국 연합의 병력이 괴멸당한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어려운 싸움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다.

‘저기구나.’

넬슨의 눈빛이 빛났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코르타스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다 보니, 언뜻 보이는 병사들만 십수 명에 달할 정도로 경비 체계가 빡빡했다.

하지만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둠에 스며든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병사들의 능력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고, 존재를 드러냈을 때는 순식간에 십수 명을 정리해 버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신호를 보낼 시간도 없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목도 반대로 돌아간 뒤였다.

판이 깔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넬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네 차례다.”

“알겠습니다.”

거대한 구조물.

대형 워프 게이트의 모습에, 넬슨은 침을 꼴깍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 * *

넬슨의 정체.

바로 워프 게이트 기술자였다.

그것도 카이로, 드미트리를 통합해 최고의 기술자라고 불렸고,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요청에 따라 작전에 차출되었다.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작전의 성공 보수라고 제시한 금액은 정말 엄청났고, 그 정도 금액이라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웨에에에에에에엥-

비상벨이 울렸다.

누군가가 워프 게이트를 조작한다는 사실에, 자동 경비 장치가 침입자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사방에서 밝은 불빛이 일었다.

철그럭, 철그럭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이곳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고, 쿵쿵 뛰는 심장에 넬슨으로서는 작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손이 떨렸다.

자신을 지켜 줄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만약에 그가 뚫려 버린다면, 넬슨으로서는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작업에만 집중해라. 적들은 내가 맡겠다.”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

심호흡을 내뱉었다.

이번 작전.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만을 보고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상황을 항상 승리로 이끌고, 만약에 그 과정에서 희생이 있었다면 반드시 책임을 지는 인물.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의 말에 손의 떨림이 멈추었다.

매력적인 제안에 고민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라면 믿을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작업을 재개했다.

지금부터 워프 게이트의 통제권을 강탈할 생각이었다.

크로노스 제국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좌표들을 모두 끊어 버리고, 새로운 좌표들을 연결.

그때부터는 코르타스의 워프 게이트는 더 이상 크로노스 제국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남부 전선을 함락시키기 위해 후방 진지를 점령했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도 똑같은 방법을 행했다.

작업 속도는 빨랐다.

빠르게 워프 게이트를 조작하는 동안, 뒤에서는 차마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로만 드미트리다!”

“공격해!”

적들이 나타났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지만, 넬슨은 이를 악물면서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참혹한 광경을 확인하는 순간. 작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작업하는 동안 비명은 계속되었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뜨거운 열기와 바람이 불었지만, 자신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에 로만 드미트리를 맹목적으로 믿었다.

숨이 가빴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작업에 전념하던 그가, 마침내 환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성공했습니다!”

순간.

넬슨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듬직한 등 너머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병력이, 처참하게 찢겨 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작업하는 동안,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을.

* * *

처음 계획을 말했을 때.

카이로, 드미트리 연합의 수뇌부들은,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라스칼을 괴멸시켜서 상대의 시선을 분산시킨 뒤에, 코르타스의 워프 게이트를 강탈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너무 무모한 작전입니다. 만약 성공적으로 작전을 이행해서 워프 게이트를 확보한다고 한들, 애초에 전력의 차이가 극심하기에 성벽 밖에서의 전투는 저희가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크로노스.

그들은 수십 만의 병력을 대동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신뢰하지만, 수비에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먼저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어떤 부분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은 크로노스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드미트리의 승리는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으로부터 서부 전선을 지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승리는 다릅니다. 단순히 버티고 버텨 적들이 물러난다는 사실에 승리했다며 자위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 제국이 명백히 패배를 시인하는 상황을 바랍니다. 그런 결과를 위해서는 수비만 고집할 수 없습니다. 결국, 피를보더라도 직접 크로노스의 살점을 물어뜯고, 그들이 공포에 질리도록 명확한 성과를 거두어야 합니다.”

크로노스의 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이, 로만 드미트리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카이로의 고위 귀족이 물었다.

“저희가 로만 드미트리 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크로노스 제국이 워프 게이트를 활용하지 않고도 워프를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미트리에서의 전쟁으로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워프를 활용해 카이로스나 다른 본거지들을 직접 공격해 버린다면. 그때는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크로노스 제국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未知)의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인원의 제한이든, 아니면 시간적인 제한이든. 워프 게이트를 활용하지 않는 워프에는 분명히 발동 조건이 존재합니다. 만약 능력에 제한이 없었다면, 그들은 애초에 서부 전선을 거치지 않고 본거지를 곧바로 공격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런데도 서부 전선에서의 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스스로 제약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어쩌면.

크로노스 제국은 힘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워프를 활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로만 드미트리는, 확인되지 않는 힘을 걱정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이번 전쟁은 양국의 존망(存亡)이 걸린 문제입니다. 워프를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우리가 주도하는 판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약자의 입장에서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살아남자고 이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동등하게 국가 대 국가로서. 스스로를 대륙의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그들의 개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일입니다.”

살벌한 기세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날카로운 기세에,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항상.

불가능한 상황을 뒤엎었다.

허언을 내뱉을 인물이 아니기에,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을 말하는 그의 모습에 경외심(敬畏心)이 들었다.

“코르타스를 점령하는 순간.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도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크로노스 제국의 군대를 동부에 고립시키고, 전면전을 통해 그들을 괴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번의 승리가 필요합니다. 군대와 군대가 부딪친 전쟁에서 카이로, 드미트리 연합만의 힘으로도 승리를 거둔다면, 그때부터는 반격의 불씨가 대륙 전체로 번질 것입니다.”

언제나 같았다.

단 한 번의 물러섬도 허락하지 않는 삶.

그렇기에, 남작 가문 출신에 불과했던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회의실 한편.

대화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한 사내가,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제가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사내의 정체.

발렌티노 후작이었다.

중도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카이로 왕국의 귀족으로서 친 드미트리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가 말했다.

“저는 언제나 로만 드미트리 님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딱 하나.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새로운 검(劍)을 하나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아니, 매번 로만 드미트리 님의 컬렉션을 간절하게 기다리는데 새로운 신상을 발매하지 않는 것은 너무한 일이 아닙니까? 저한테 주지 않고 경매로 붙이더라도. 새로운 검을 내놓기만 하신다면, 세간에 드러나지 않은 발렌티노 가문의 힘을 싹싹 긁어서라도 로만 드미트리 님의 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참.

별종이었다.

국가의 존망보다도, 이 상황에 수집욕을 드러내는 발렌티노 후작이었다.

* * *

확.

밝은 불빛이 일었다.

워프 게이트를 통해, 일단의 병력이 나타났다.

척척척-

일사불란하게 걸어 나오는 병사들.

시작은 발렌티노 후작이었다.

그가 자신의 사병을 모두 끌고 왔고, 뒤이어 카이로 왕국 소속의 병사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와중에 발렌티노 후작은 로만 드미트리에게서 구매한 ‘블레이즈’를 허리춤에 착용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검집만 보더라도, 그가 블레이즈의 관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드미트리 공국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렌스 자작, 콘라드 자작과 같은 인물들이 병사들을 대동했고, 순식간에 워프 게이트 주변으로 많은 숫자의 병력이 들어찼다.

크로노스의 수십만 대군(大軍)에 비하면 초라한 숫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을 결심하고,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지도하에 치열한 훈련을 진행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케빈이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심마를 이겨 냈구나.”

“주군이 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드미트리를 떠나고.

그는 아델리안으로 향했다.

그곳의 워프 게이트를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이동 도중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미트리 공국의 병사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따라 대기하고 있다는 것.

코르타스의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면 그곳으로 곧바로 이동한다는 말에, 케빈은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것을 택했다.

재회는 짧았다.

무사하면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선을 옮기더니,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병력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지금부터 코르타스를 기점으로 크로노스 동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크로노스 제국이 우리의 행보에 분노하도록. 그 시작으로, 지금 당장 코르타스를 샅샅이 뒤져 발견하는 적들을 모두 처단하라!”

명이 떨어졌다.

병사들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흉흉한 기세를 보였다.

크로노스 동부.

전략적 요충지 코르타스.

그곳이 완벽히 함락되기까지는, 단 하루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뱀포드 공작은 그 소식을 전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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