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제1차 대륙 전쟁 (6)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서부 전선 수뇌부들의 회의 자리에서, 플로라 로렌스는 ‘만일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는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습니다. 성벽 강화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자했고,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병력을 이곳에 집결시켰습니다. 문제는 전력을 다하고도 얼마 버티지 못했을 때의 상황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패색(敗色)이 짙은 서부 전선을 지키겠다고 끝까지 버티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하지만 서부를 잃는 순간, 크로노스 제국군이 카이로스에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노엘 남작이었다.
적절한 지적에, 플로라 로렌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카이로스가 적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면, 그때부터는 차례로 와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전쟁은 애초에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말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장에서의 승리보다는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패색이 짙은 전장을 지키겠다고 전력을 쏟아부었다가, 그 이후의 상황에 필요한 전력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서부를 내주는 것이 아니라, 서부를 내주고 전력을 보존함으로써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플로라. 그에 관한 세부 계획도 구상했겠지?”
“예.”
반덴버그 후작이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플로라 로렌스는 한때 서부의 핵심 자원이었기에, 그녀의 말은 따를 가치가 있었다.
촤르르르륵.
지도를 펼쳤다.
플로라 로렌스는, 서부의 최전방 방어 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땅은 전략적 요충지(要衝地)입니다. 사실상 이곳이 뚫린다면 서부 전선은 연쇄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크로노스 제국은 첫 전투에서 전력을 다해 이곳을 무너트리려 할 확률이 높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릴 플랜 B는, 그들의 공격에 버티지 못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아니,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미친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수성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플랜 B를 택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낳는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이, 플로라 로렌스에게 결단력을 부여했다.
“플랜 B는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패색이 명백한 상황이라면, 적들로서는 우리가 생각보다 빠르게 이곳을 버리는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전쟁 물자마저 포기한다면, 의심의 여지는 존재할 수 없겠죠. 그때가 기회입니다. 적들이 성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이곳을 폭발시킴으로써 확실한 이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만일을 대비하라.
변수가 많은 전장에서, 참모들이 해야만 하는 역할이었다.
* * *
결단을 내렸다.
반덴버그 후작이, 달려드는 적군을 베어 버리며 소리쳤다.
“전군 퇴각하라! 성을 버리고, 후방으로 이동할 것이다!”
“퇴각하라!”
명령이 떨어졌다.
부관들은 목이 터져라 반덴버그 후작의 명령을 전달하였고, 일부는 빠르게 달려가서 후퇴를 의미하는 북을 울렸다.
전장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플랜 B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수뇌부들로부터 만일의 상황에 성을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병사들이 물러났다.
선두의 병사들은 제국군을 상대하느라고 도망칠 수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병사들로서는 수뇌부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모두가 도망치는 상황에서 전장에 남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카이로, 드미트리 연합의 병사들이 물러남에 따라, 전장의 공백을 뚫고 적들이 성으로 들이닥쳤다.
“공격해!”
“모두 죽여라!”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로노스 제국군은 왕국 연합의 병사들을 도륙했고, 진군하는 병력에 처참하게 짓밟혀 시체마저 곤죽이 되어 버렸다.
완전히 끝나 버린 전쟁이었다.
팽팽했던 균형은, 왕국 연합이 한발 물러난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었다.
가장 선두.
그곳에 크리스가 있었다.
지금은 후미(後尾)가 되어 버린 위치에서, 크리스는 병사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번뜩.
달려드는 적군들이 모조리 나가떨어졌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적군의 모습에도 크리스는 적절하게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고, 한두 번의 반격에 크로노스 제국군의 머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다수와 소수의 대결.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번에 발할라에서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며, 크리스의 실력은 전보다 한 단계 위의 영역에 도달했다.
퍽!
목을 관통했다.
그리고는 다시 병력에 합류하려는데, 순간 서늘한 감각에 크리스는 머리를 젖혔다.
콰르르르르릉.
맹렬하게 타오르는 오라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피부가 따끔했다.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지만,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오라의 위력이 6성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가 크리스라는 놈이구나!”
콰앙!
콰콰콰쾅!
의문의 존재가 득달같이 몰아붙였다.
크리스는 적과 검을 마주치지 않고,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공격을 모두 흘려보냈다.
그런데도 크리스의 몸이 거칠게 밀려났다. 오라의 파동이, 크리스의 육체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머리 위로.
밝은 빛무리가 떨어졌다.
크리스는 땅바닥을 구르며,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도대체 로만 드미트리의 정체는 뭘까? 겨우 20대의 나이에 6성의 경지에 오르고, 드미트리 같은 허접한 땅덩어리에서 너와 같은 검사를 육성하다니. 대단해. 산채로 붙잡아, 살점을 하나하나 발라내며 진실을 묻고 싶을 정도야.”
앞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의 사내는, 눈부터 코를 가로지르는 상처가 인상적이었다.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크로노스 랭킹 2위.
대륙 랭킹 3위.
악귀(惡鬼) 한니발이었다.
치렁치렁 기른 곱슬머리와 창백한 얼굴, 얼굴을 가로지르는 상처는 한니발의 외형을 표현하는 상징들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크로노스의 제2 기사단을 맡고 있는 그가 직접 나섰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 이 자리에서 그를 쓰러트릴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착.
검을 바로잡았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크리스는 사지(死地)에 섰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니발을 상대로 등을 보일 수는 없었다.
등을 보이는 순간.
한니발의 검이 자신의 등을 가를 것이 분명했다.
초라하게 죽을 바에는, 크리스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를 바랐다.
‘죄송합니다. 주군을 넘어서겠다는 꿈은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라를 일으켰다.
전력을 발현해 달려들려는 그때.
“이곳은 내가 맡겠다.”
니콜라스 백작.
그가, 크리스의 앞을 막아섰다.
* * *
의외의 상황이었다.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에, 니콜라스 백작은 강압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왕국 연합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와 그간 합을 맞추었던 네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곳은 내게 맡겨라. 한니발을 쓰러트리고, 금방 따라가겠다.”
“……백작님!”
“어서!”
니콜라스 백작이 소리쳤다.
둘 다 현실을 알았다.
짧은 사이에 크로노스 제국군이 밀려들고 있었고, 단 10초만 망설일지라도 퇴로는 완벽하게 차단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니콜라스 백작은 희생을 자처했다.
로만 드미트리와 크리스라는 새로운 재능들을 경험하면서, 그는 왕국을 위해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망설임은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 터.
니콜라스 백작의 단호한 눈빛에, 크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오늘의 일, 잊지 않겠습니다.”
걸음을 돌렸다.
크리스가 도망치려고 하자, 한니발이 번개같이 검을 뻗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니콜라스 백작이 막아섰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6성의 오라에, 니콜라스 백작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5성의 오라를 폭발시켰다.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울컥 일어나는 핏물에, 니콜라스 백작이 웃었다.
“한 번쯤은 너와 같은 최상위 랭커와 싸워 보고 싶었다.”
저 멀리.
크리스가 사라지고 있었다.
한니발이 살짝 언짢다는 표정을 보이자, 니콜라스 백작은 충격을 가라앉히며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한평생. 6성의 경지에 오르고자 했다.’
카이로 제일검.
자신의 명칭이었다.
하지만 대륙 랭킹에 오른 검사들을 상대하며, 약소국에서 제일 강하다는 칭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은 겨우 말단에 불과했다.
같은 5성의 검사들을 상대로도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었고, 6성에 오른 대륙 십이검의 존재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늘처럼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쓰러진 날.
니콜라스 백작은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자신의 몸을 가르는 강렬한 검술은, 그간 자신이 열망하고 바라 왔던 천외(天外)의 영역이었다.
패배한 직후.
수련실에 틀어박혔다.
몸을 요양함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아 보고자 발악했다.
그간의 명성.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나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초심자의 심정으로 돌아간 니콜라스 백작은, 현재에 이르러 일말의 성과를 거두는 것에 성공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나는 리차드 니콜라스다. 그리고 내가, 카이로 제일검이다.”
드미트리 공국이 만들어지고.
1위의 자리는 다시 그에게 부여되었다.
니콜라스 백작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맹렬하게 타오르는 오라를 일으켰다.
염화(炎火).
엄청난 불길이었다.
존재 자체가 타오르며 하나의 검이 되어 버린 모습은, 분명히 그 또한 6성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이로 제일검은 나약하지 않았다.
제국에서도 단 12명밖에 배출하지 못했다는 6성의 경지에,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최초로 그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땅을 박찼다.
오라에 휩싸인 채로, 한니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주제도 모르는 새끼.”
번뜩.
불이 갈라졌다.
활화산이 분출하듯 폭발하는 오라가, 단 일격에 바다를 가르듯 양쪽으로 찢겨 나갔다.
한니발.
대륙에서 세 번째로 강한 존재.
같은 5성의 검사들에게도 차이가 있듯, 그는 6성에서도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괴물이었다.
푸확.
피를 뿜었다.
니콜라스 백작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며, 한니발을 상대로 채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차라리 크리스처럼 회피에 집중했다면.
지금보다는 오래 버틸 수 있었겠지만, 한니발을 상대로 정면에서 승부를 보려는 그의 의도가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지 말라는 듯이, 피 묻은 손으로 한니발의 발을 붙잡았다.
그러자.
한니발이 니콜라스 백작과 시선을 마주치도록,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재밌는 사실 몇 개 알려 줄까?”
“쿨럭.”
피가 번졌다.
니콜라스 백작으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어느새 흥건하게 웅덩이를 이루었다.
“첫 번째. 크로노스에는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 겨우 이 정도도 버텨 내지 못한다면 애초에 너희에게는 승산이 없다는 의미지. 그리고 두 번째.”
히죽, 웃었다.
“성을 폭발시키려는 너희의 계획은, 애초에 예상하고 있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콰직.
절망에 빠진 니콜라스 백작의 얼굴을, 그대로 짓밟아 버렸다.
* * *
완벽한 작전이었다.
병사들이 빠져나오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플로라 로렌스는 의도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콰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그렇게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폭발에 휩쓸려 버리리라고 생각했건만, 백발의 마법사가 마력을 일으키더니 블랙홀(black hole)을 형성했다.
성을 집어삼키려는 폭발은 단번에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최초의 폭발을 억제하자, 연쇄적으로 폭발시키려던 장치는 무의미해져 버렸다.
일련의 상황.
뱀포드 공작은, 성에 들어서며 예상했다는 표정을 보였다.
“힘이 약한 녀석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뻔하지.”
8서클 마법사.
그리고 크로노스 제2 기사단.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뱀포드 공작은 첫 번째 전투에서 서부 전선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은 하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조차도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성 자체를 버려서 이곳을 함정으로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변수였다.
백전노장.
혹은.
전장의 마에스트로(maestro)라고 불리던 사나이.
뱀포드 공작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선택지가 제한적인 약소국들을 상대로, 쉽게 당할 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백발의 마법사를 보며 말했다.
“셰피르 님. 고생하셨습니다.”
“아니다.”
백발의 마법사.
셰피르는, 담담하게 반응하더니 다시 로브를 눌러썼다.
그러자.
뱀포드 공작은, 시선을 돌리며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들어라! 적들은 지금 궁지에 몰렸다! 이대로 기세를 몰아, 카이로스와 드미트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자!”
적들은 오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크로노스를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적들은.
현세(現世)의 지옥을 경험하지 못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뱀포드 공작의 예상과는 다르게, 크로노스 제국은 왕국 연합의 꼬리를 붙잡지 못했다.
“영악한 녀석들. 시간을 끌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구나.”
폭발은 1차 작전일 뿐.
2차, 3차로 크로노스 제국의 진군을 저지할 함정을 준비했다.
그로 인해서 추격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걸음을 늦추려는 상대의 의도에, 뱀포드 공작으로서는 의문이 생겼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시간을 버는 거지? 서부 전선이 함락당하는 상황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시간을 버는 것과 로만 드미트리의 부재가 연관이 있다는 건데.’
그간의 행보를 보면.
로만 드미트리가 수도에 침투해, 직접 크로노스 황제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로노스 황실은 제1 기사단이 지키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괴물들이 황제의 곁을 지켰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수도의 경계를 뚫고 황제를 암살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런 작전을 계획했다면, 그는 전략가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힘만 믿고 날뛰는 얼간이.
그런 존재는, 더욱 강한 힘에 꺾일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이대로 진군하는 것이 최선이다. 시간을 벌려고 한다면, 의도한 바를 이룰 시간도 없이 무너트리면 그만이지.’
그런데 그날.
당황스러운 소식을 전달받았다.
헐레벌떡 달려온 병사는,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말했다.
“지휘관님! 로만 드미트리가, 코르타스를 점령했습니다!”
코르타스.
그 이름에, 뱀포드 공작이 놀란 표정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코르타스는 서부 전선처럼, 크로노스 동부의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그리고 그곳엔 바로.
워프 게이트(Warp Gate)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