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국제회의 (5)
적막이 맴돌았다.
파비우스 백작이 물러난 상황에, 에드윈 헥토르가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음성으로 물었다.
“……레드포드 국왕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정말, 드미트리가 그들만의 힘으로 크로노스 제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에드윈 헥토르도, 레드포드 국왕도.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임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간 어떤 행보를 보여 주었든 간에, 상대가 크로노스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레드포드 국왕이 말했다.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머리로는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인지하고 있지만, 레드포드는 이미 결단을 내렸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레드포드 왕국의 은인입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레드포드는 드미트리와 명운(命運)을 같이할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잡한 생각은 뒤로 미루었다.
“레드포드가 격변의 시간을 맞이하는 동안, 저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많은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대륙의 모든 왕국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제국에 빌붙어 삶을 연장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과 맞서 싸울 것인지. 드미트리를 따르는 선택이 멸망으로 향하는 길일지언정, 레드포드는 국가로서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헥토르도 헥토르의 미래를 결정하십시오. 드미트리가 전쟁을 선포한 지금부터는, 우리가 내뱉는 말들은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진심 어린 말이었다.
레드포드 국왕은 먼저 걸음을 옮겼고, 홀로 남은 에드윈 헥토르는 적막함 속에 빠져들었다.
‘무엇이 헥토르를 위해 옳은 선택일까.’
드미트리.
헥토르의 우방국이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방식은 지나치게 과감해 파멸로 이끌 수도 있었다.
자신의 상식으로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는 일이었다면, 이토록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천재라고 부르는 에드윈 헥토르조차도 감히 예상할 수 없는 영역의 판단이었고,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헥토르는 낭떠러지에 몰렸다.
계속되는 기근과 전쟁으로 한 번의 선택이 곧바로 몰락으로 직결되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에드윈 헥토르는 한참이나 이 상황에 대한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레드포드 국왕의 말이 옳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헥토르는 크로노스의 개가 될 수는 없다.’
기근의 원흉은 크로노스다.
헥토르는 그들과 한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기에, 유일한 희망은 로만 드미트리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헥토르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한발 물러나서 상황을 관망하는 것이 옳을까.
‘이번 일은 로만 드미트리의 의중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가 왜 국제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간단한 문제다. 크로노스 제국에 복수를 행하겠다는 목적에, 왕국 연합이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드미트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복수하겠다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를 다시 국제회의로 보내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생각을 확장시켰다.
수동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고민했다.
‘드미트리만의 힘으로도 크로노스를 상대할 수 있다는 명확한 사례를 통해, 왕국 연합의 진심을 끌어내려는 의도겠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황. 그렇기에, 드미트리가 단 한 번이라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큰 파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것이 정답이 아닐지라도.
드미트리를 위한 선택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아무래도.
국제회의에, 다시 참석해야 할 것 같았다.
* * *
아이러니였다.
파국으로 끝났던 국제회의가, 똑같은 사람들에 의해 똑같이 진행되었다.
오델리아 국왕이 말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드미트리의 전쟁 선포가 두 왕국과는 관련이 없다니요. 그렇다면 지금, 드미트리는 그들만의 힘으로 크로노스 제국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겁니까?”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전포고를 확인할 때만 하더라도 기어코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는데, 에드윈 헥토르의 말은 달랐다.
“저희도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지난 국제회의를 마치고, 드미트리와의 만남을 기다리던 도중에 크로노스 제국과 전쟁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이고요. 국왕님들은 이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으십니까?”
의중을 숨겼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는 듯이, 이번 일과는 무관하다는 확실한 태도를 보였다.
국왕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특히 오델리아 국왕은,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충격이 더했다.
“드미트리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왕국 연합의 힘을 빌려도 모자랄 판에, 혼자만의 힘으로 크로노스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다니. 여러분. 지금부터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자신들에게 칼을 겨눈 상대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드미트리는 카이로에서 파생되었기에, 분명히 이번 일로 두 국가는 멸국(滅國) 하고 말겠지요. 문제는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몰락은, 우리 왕국 연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왕국 연합.
그들은 크로노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카이로와 드미트리는 애초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크로노스가 동북쪽 일대의 땅을 먹어 버리는 순간. 그들은 대륙 정벌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이제 주변을 걱정하지 않고 왕국 연합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전이라면 왕국 연합과의 전쟁에서 ‘카이로, 헥토르’의 연합 공격을 조심해야 했다면, 지금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헥토르는 크로노스, 발할라와 국경을 맞닥트린 형세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고, 왕국 연합은 제국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드미트리를 과감하게 버립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전력의 손실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정말 끝입니다.”
최선의 판단이었다.
오델리아 국왕은 모두를 위한 방법을 말했지만, 레드포드 국왕은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거절하겠습니다. 이전 회의에서도 말했듯, 레드포드 왕국은 드미트리와 명운을 같이할 것입니다. 왕국 연합의 소속이 아닌 저희에게, 오델리아 국왕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습니다.”
“지금 그렇게 꽉 막힌 말을 할 때가 아닙니다!”
“뭐라 말하든 소용없습니다. 레드포드는 전쟁을 준비하고, 드미트리의 부름을 기다릴 것입니다.”
타협을 불허했다.
레드포드 국왕이 판을 깔자, 에드윈 헥토르가 불을 붙였다.
“헥토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의 불길이 거세진다면. 그때는, 드미트리를 위해 나설 생각입니다.”
“이런!”
오델리아 국왕이 분통을 터트렸다.
다른 국왕들도 말을 덧붙였지만, 레드포드 국왕과 에드윈 헥토르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회의.
불통의 자리였다.
변화를 원해 국제회의를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두 왕국의 대표는 드미트리의 선전포고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확인해 주었을 뿐, 아무런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 난 문제였다.
드미트리만의 힘으로는 절대 크로노스의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 그들이 몰락한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야만 했다.
벌떡.
“회의는 이것으로 끝냅시다! 지금부터는, 서로 알아서 살길을 찾읍시다!”
오델리아 국왕의 이탈.
제2차 국제회의.
이번에도, 각국의 정상들은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 * *
파국이었다.
살길을 찾지 못한 상황에, 오델리아 국왕은 불안에 떨었다.
“이대로라면 다 끝이야. 카이로와 드미트리가 무너지는 순간, 전쟁의 불길이 왕국 연합에까지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짜증이 일었다.
레드포드와 헥토르는, 대체 뭘 믿고 드미트리를 따르겠단 말인가.
아무리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려고 해도, 사지에 몸을 던지는 그들의 판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방관은 선택지에 없었다.
‘이번 전쟁으로 레드포드 왕국마저 멸망한다면. 어차피, 왕국 연합만의 힘으로는 앞으로 크로노스 제국의 위협을 억제할 수 없다. 결국은 선택이 필요한 상황이다. 드미트리 공국에 힘을 보태서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막든지, 아니면 크로노스와 발할라 같은 실세에 붙어 오델리아가 살아갈 방법을 찾든지. 더는 지금과 같은 평화가 유지되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빌어먹을.”
화가 났다.
로만 드미트리.
멍청한 걸 넘어서, 주제를 모르는 녀석이었다.
바르보사를 쓰러트릴 만큼 그가 검사로서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복수하겠다고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섣부른 선택이었다.
자신을 비롯한 왕국 연합의 사람들도 제국의 만행이 달가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륙의 역사가, 그간의 경험이.
한번 고개를 빳빳이 세운 대가로 처참한 현실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명확한 결과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을 제외한 나라들의 국제회의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발악했던 선조들의 유산이었다.
“……미안하지만, 오델리아는 이대로 끝날 수 없어. 비굴할지라도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겠지.”
눈을 질끈 감았다.
역겹고 초라할지라도, 이게 현실이었다.
국왕으로서.
국가의 안위를 살필 의무가 있었다.
오델리아 국왕은 왕실로 복귀하자마자, 어디론가 연락을 넣었다.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화면 너머.
찰튼 남작의 말에, 오델리아 국왕은 망설임이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현 시간부로 왕국 연합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오델리아 왕국이 살아남을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시각.
배반은 오델리아만의 일이 아니었다.
움베르토 왕국.
왕국 연합의 세 국가 중 프랑크를 제외한 두 국가는, 고민 끝에 현실에 굴복하고 말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크로노스 동쪽에 전초기지(前哨基地)로 유명한 라스칼에서, 경비병들이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며 떠들었다.
“나는 드미트리가 한 달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에 1골드 걸지.”
“한 달? 드미트리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이건 전쟁이라고. 코딱지만 한 드미트리가 대체 어떻게 한 달이나 버틸 수 있겠어? 나는 보름에 1골드. 내가 장담하는데, 국경에서 전면전을 한번 제대로 붙는 순간 드미트리는 의욕을 잃고 백기를 내걸 것이 분명해.”
“그래도 로만 드미트리가 있잖아.”
“그래 봤자 걔가 끝이야.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혼자서 얼마나 버티겠어.”
드미트리의 선전포고.
황당한 일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국민으로 살면서, 설마 제국을 상대로 먼저 전쟁을 선포하는 상황을 겪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만날 때면 이와 관련해서 떠들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패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드미트리 따위가 제국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에 대해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있었다.
그중 단 한 사람도 한 달 이상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과 왕국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수준이기에, 이건 굳이 복잡한 계산도 필요하지 않았다.
지난 며칠.
라스칼에 병력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앞으로 일주일 안으로, 드미트리는 압도적인 제국의 전력에 본인들이 내뱉은 말을 후회할 것이다.
그때였다.
병사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의 머리를 덮쳤다.
빠각.
머리가 꺾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라스칼의 경계 구역에서 전체적으로 일어났다.
“목표한 지점들을 확보했습니다.”
크리스였다.
그의 보고에, 로만 드미트리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크로노스 제국의 본대가 이곳 라스칼에 도착할 때까지는 약 6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다.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적을 죽여라.”
크로노스.
아니, 대륙의 그 누구도.
드미트리의 선공(先攻)은 감히 상상치도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가 당한 똑같은 방식을 택했다.
“지금부터 불을 질러라.”
“예.”
모두가 잠든 밤.
드미트리가, 전쟁의 신호탄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