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국제회의 (1)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전쟁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길거리에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그들도 소문을 들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과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더한 위험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사람들은 그가 무사 귀환하기를 바랐다.
마침내.
로만 드미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의 고생을 증명하듯, 로만 드미트리를 비롯한 병사들의 행색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행색은 초라할지언정, 그들이 어떤 결과를 이루었는지를 똑똑히 들었다.
“당신은 드미트리의 자랑입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대륙 랭킹에 올라가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바르보사.
대륙 십이검이라고 불리는 사내의 목을 날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드미트리로 돌아오는 동안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죽어 나간 사람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로서는 자부심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제국의 소속이 아닌 사람이 상위 랭킹에 들어가는 경우는 전무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최상위의 강자를 쓰러트렸다.
그것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드미트리가 이제 막 탄생한 약소국이라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라는 단 하나의 존재로 위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개선장군(凱旋將軍)의 모습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곧바로 부모님을 찾아갔다.
“다녀왔습니다.”
“로만!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어머니, 리한나 드미트리는 로만을 발견하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아들의 소문.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품격이 있기로 소문난 리한나 드미트리였지만, 아들의 일에는 체면을 차릴 수 없었다.
잠깐은 부모와 자식으로서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리한나 드미트리는 몸을 꼼꼼히 살피고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안도한 표정으로 한 발 물러났다.
그제야, 드미트리 공작이 물었다.
“드미트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겠지. 아들아.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것 같으냐.”
이번 사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대륙법을 어기고 드미트리를 공격했고, 어떻게든 문제 삼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친 이후. 드미트리는 전쟁의 아픔을 추슬러야만 했다.
전쟁에서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렇다고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난 며칠, 드미트리가 요동쳤다.
이에 대해 보복하자는 무리와 어떻게 제국을 상대하냐는 무리가, 서로 극심하게 의견 충돌을 이루었다.
결국.
드미트리 공작은 선택지를 넘겼다.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말했다.
“드미트리가 공국의 칭호를 얻고, 이 나라의 대소사(大小事)는 너의 소관이 되었다.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로만아. 이 사실을 명심해다오.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나 로메로 드미트리는. 그리고 드미트리 공국은 너의 판단을 따를 것이다.”
극심한 의견 대립.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의 의견이면 정리될 문제였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아무도 반문하지 않을 것이다.
드미트리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그런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로만 드미트리는, 이만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복도를 걸었다.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 루카스가 따라 걸으며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 전쟁으로 드미트리의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상대가 예상을 웃도는 병력을 동원했고, 특히 크로노스 제국은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지 않고도 병력을 이동시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조사한 뒤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힐끗, 로만 드미트리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말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케빈과 헨더슨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드미트리 공작님의 처소를 지키는 과정에서 상대가 동원한 6성의 오라 검사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고, 둘 다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특히 헨더슨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어제저녁에는 잠깐 숨이 멈추기도 했습니다만, 다행히도 치료사가 즉각적으로 대응한 덕분에 위험한 고비는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명암(明暗)이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물리쳤다는 사실은 엄청난 성과였지만, 루카스는 전쟁으로 인해 다친 존재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헨더슨의 경우에는 같이 사병 모집에 지원했던 동기였다.
본인은 정보 길드를 맡으면서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헨더슨은 워낙 살가운 성격의 보유자다 보니 루카스와는 제법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그런 그가.
쓰러졌다.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그날의 일은, 듣는 것만으로도 루카스의 얼굴을 붉게 달아오르게 했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말인가.”
“예.”
지금.
부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 드미트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의중을 알 수 없을 만큼 침착한 표정을 보였다.
사람들의 환호에도.
부모님과의 재회에도.
덤덤했다.
그리고 그게, 루카스로서는 왠지 모를 두려움이 일었다.
* * *
케빈과 헨더슨.
병상(病牀)에서 의식을 잃은 둘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붕대를 몇 번이고 갈았는데도, 그들의 상처 부위에 두른 붕대는 불그스름한 색깔을 보였다.
치료사가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이 고비일 것 같습니다. 최상급 포션과 사제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목숨줄은 부여잡고 있습니다만, 상태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케빈은 부상 부위를 많이 회복했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고, 헨더슨은 갈비뼈가 전부 부서질 정도로 심각하게 상처를 입으면서 최상급 포션으로도 회복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체내에 ‘암흑의 오라’가 침투하는 바람에 회복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죽음을 뜻했다.
나름대로 희망적으로 둘러댔지만, 치료사는 자신의 치료 영역을 넘어섰다는 뜻을 내비쳤다.
‘결국,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문득.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천마 백중혁을 따랐던 4명의 존재는, 모두가 끝까지 살아남아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했다.
광마.
그는 죽었다.
구파일방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백중혁이 없는 전장을 도맡았고, 그는 함정에 빠졌지만 수많은 적을 도륙한 끝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대가로, 온몸에 무기가 박힌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무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즐거운 일만 있을 수는 없었다.
기쁨이 있다면 슬픔이 있듯, 천마 백중혁이 가장 신뢰했던 존재는 신뢰의 대가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암담한 현실이었다.
다스리는 영역이 커질수록.
수하들은 위험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신뢰하는 존재는, 신뢰하기에 오히려 위험을 동반했다.
그날의 일.
백중혁은 분노했다.
전쟁 도중에 누군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존재가 광마라는 사실에 추모식을 열었다.
추모식의 장소는 구파일방이었다.
그때의 전쟁은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고, 그때부터 기가 꺾인 정파 무림인들은 속속들이 백기를 내걸면서 항복을 선언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선택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케빈과 헨더슨을 신뢰하기에, 자신이 떠난 자리를 지킬 존재로는 이들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신뢰의 대가였다.
그들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결과를 증명했다.
‘나는 현생도 천마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내 삶은 항상 투쟁(鬪爭)으로 점철되었기에, 주변 환경이 달라졌다고 해서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로만 드미트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를 따르는 이들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다. 내가 더 높은 곳을 노릴수록. 그 누구도 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위험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예상했다.
이들의 희생을.
하지만 앞으로 자신이 바라는 세상에서,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다른 때와는 다르게 양자택일(兩者擇一)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로 떠나 적들의 위협을 정면으로 맞닥트림과 동시에, 드미트리는 신뢰하는 이들에게 맡기는 선택을 내렸다.
드미트리를 위한 선택이었다.
드미트리는, 드미트리만의 힘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결과는 이상적이었다.
크로노스를 물리쳤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감정이 격정적으로 들끓었다.
화가 났다.
전생과는 달랐다.
그때도 광마의 죽음에 분노했으나, 지금처럼 격정적이지는 않았다.
현생의 삶.
많은 인연을 받아들였다.
패도(霸道)를 추구했던 전생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를 조금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끝까지 버틴 것은, 살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라고 판단했다.
“내가 직접 케빈과 헨더슨의 치료를 진행할 것이다. 그러니, 치료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라.”
명령을 내렸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이들을 살리는 것이었다.
* * *
장소를 옮겼다.
케빈과 헨더슨을 바닥에 눕힌 로만 드미트리는, 가부좌를 틀고는 둘의 심장 부근에 손을 댔다.
‘생명의 근원(根源)을 시작으로 몸을 관조한다.’
화악.
마나가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피어오른 마나가 둘의 몸에 스며들었고, 아주 천천히 심장을 어루만지며 둘의 육체에 동화되었다.
하나, 둘, 셋. 심장이 뛰었다.
처음에는 자신과 케빈, 헨더슨의 심장이 제멋대로 박동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일부러 맞춘 것처럼 셋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마나가 상처 부위에 도달하는 순간, 감각의 동화로 인해 극심한 고통이 일었다.
‘선천(先天)의 기운으로 생명력을 일으켜야 한다.’
지금 행하는 치료법.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다.
전생에 신의라고 불리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어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가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신의의 진실을 알았다.
그는 대단한 기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을 나눠 주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살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 방법을 택했다.
선천의 기운은 태어난 순간에 타고나는 힘이고, 그것이 닳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죽음을 뜻했다.
그 힘의 일부를.
두 육체에 불어넣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천외의 경지에 들어갈수록 선천의 기운이 증폭되기에, 자신의 수하들을 위해서 기꺼이 생명력의 일부를 내줄 수 있었다.
케빈과 헨더슨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다 이러한 모습이 되었다.
이로 인해 수명이 줄어든다고 할지라도,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다.
이들이 희생했듯.
로만 드미트리도 희생을 받아들였다.
선천의 기운이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두 육체가 생명력을 되찾으며 자생(自生)의 힘을 보였다.
어려운 작업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시간이 갈수록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선천의 기운을 사용한다고 해도 바로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살릴 방법을 행할 뿐이지, 이렇게 노력하고도 하늘이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둘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먼저 포기하지는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지며 케빈과 헨더슨의 치료에 전념했다.
크로노스와의 전쟁.
많은 문제가 있었다.
전쟁의 발단부터 시작해서 발할라의 음모, 흑마법사의 존재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모든 문제를 뒤로한 채 눈앞의 현실에 집중했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제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의 선후를 따졌을 때, 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가 정점의 자리에 오르려는 이유였다.
권력을 우선시해서 중요한 것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행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했다.
하루, 이틀.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로만 드미트리가 치료에 전념하는 동안, 밖에서는 그 모습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