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드미트리에 드리운 그림자 (4)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갔던 날.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드미트리에 남을 필요가 있다. 케빈. 나는 네가, 그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혹시라도 적들이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면. 내가 없는 전장에서 가장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낼 사람은, 케빈 바로 너다.”
자신을 신뢰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케빈은 발할라행을 포기하고 드미트리 영지에 남았다.
그때부터 고민에 빠졌다.
만약 크로노스 제국이 드미트리를 직접 공격할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전제로 한다면,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어떠한 ‘최악’을 방지해야만 하는 걸까.
성벽 위에서 수성에 힘을 실을 수도, 아니면 페르난도와 같이 내성을 지킬 수도 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케빈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수성은 펠릭스와 같이 그에 특화된 사람들이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영역이다. 내 개인의 힘으로 방지해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은, 전쟁 도중에 드미트리 공작님이 죽는 것밖에 없다. 드미트리는 이제 일개 영지가 아니라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왕가의 핏줄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요한 요소고, 크로노스로서도 드미트리 공작님의 암살을 최우선으로 할 확률이 높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부합했다.
케빈은 스스로 판단을 내렸고, 로만 드미트리가 떠난 날부터 드미트리 공작의 방을 지켰다.
해가 저물고, 해가 떠오르고.
일반 사람들은 지루함을 토로할 만한 일상이 지나가는데도, 케빈은 드미트리 공작의 방 앞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음식과 생리 현상도 주변에서 해결했다.
어떤 사람들은 케빈을 바라보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며 물었지만, 케빈으로서는 단 1초의 허점도 생겨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오늘.
뎅뎅뎅-
적들의 침공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페르난도와 같은 왕실 기사단은 내성에서부터 적들의 침입을 막겠다면서 무장을 갖추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혼란한 상황이었다.
성벽을 공격하고, 내부에 침입하는 그림자들의 존재에도, 케빈은 밖의 상황과는 별개로 혹시 모를 ‘만일의 상황’을 대비했다.
예상대로였다.
저 멀리.
의문의 존재가 다가왔다.
복도 끝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온 존재는, 케빈을 발견하더니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보였다.
“앳되지만 살쾡이같이 사나운 얼굴. 독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에 광기(狂氣)를 풀풀 풍기고 다니는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의 밑에 한 명이 존재한다고 들었지. 이름이 아마, 케빈이라고 했던가.”
그 모습에.
케빈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가 쓰러트릴 수 없는 상대다.’
난적(難敵) 정도가 아니다.
무슨 수를 써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강자.
검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무지렁이 시절에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 차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눈앞의 상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았다.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털이 예민하게 서는 기분이었다.
상대와 공방을 주고받는 순간 자신의 머리가 날아가는 모습이 떠올랐지만, 케빈은 사나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들었다.
물러날 수 없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신뢰하기에.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그 누구도 이곳을 통과시킬 수 없었다.
마법 신호를 보냈다.
이 신호는 페르난도에게 전해져, 이곳의 상황을 알릴 것이다.
‘지금부터 5분.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을 확보해야만, 드미트리 공작님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꽉.
검을 쥐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는, 그런 케빈을 바라보며 오라를 일으켰다.
“좋구나. 척살 대상과 드미트리 공작을 동시에 처리할 기회라니.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콰릉.
콰르르르르릉.
그 순간.
번쩍.
팟.
케빈은, 목 부근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 * *
빨랐다.
빠를 것을 알았는데도, 상상을 넘어서는 속도였다.
번쩍.
팟.
목에서 피가 튀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머릿속의 자아들이 피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상황에, 케빈은 보고 느끼지 못했음에도 본능적으로 머리를 젖혔다.
덕분에 머리가 잘려 나가지는 않았다. 얕게 베인 상처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었고, 스벤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제법이라는 표정을 보였다.
“피해?”
상대는 기껏해야 3성.
상식적으로는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반응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스벤은 한 번의 회피가 대세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즐겁도록. 끝까지 발악해라.”
콰릉.
콰르르릉.
스벤이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
어느새 스벤이 코앞에 나타났고, 케빈은 오라를 일으키며 스벤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본능이 ‘정면 대결’은 절대 피하라며 경고했다.
케빈은 빠르게 검의 방향을 틀었고, 스벤의 검에서 타오르는 오라와 자신의 오라가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콰앙!
몸이 밀려났다.
오라 일부가 부서지며, 순간 힘을 잃는 모습을 보였다.
‘아예 상대가 되질 않는다.’
6성의 오라.
압도적인 힘이었다.
케빈은 그동안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펠릭스의 도움으로 ‘마법진 훈련’을 진행하면서 3성의 경지에 발을 들이는 엄청난 성과를 보였다.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성장 속도였다.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라는 배경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검술도 제대로 모르던 무지렁이가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도.
의미가 없는 발악이었다.
케빈이 노력해서 얻은 결정체가, 스벤의 오라 앞에서는 1성의 오라만도 못한 나약함을 보였다.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
팟.
타닥.
빠르게 빠졌다.
계속해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최대한 공격을 흘려보냈고, 전신의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나며 스벤의 공격을 파악했다.
감각에 공격이 포착되는 순간. 반응하기도 전에, 케빈은 강력한 충격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육감(六感)이 스벤의 공격 방향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강렬하게 타오르는 오라에 전신이 그대로 찢겨 나갈 뻔한 상황이었다.
섬뜩했다.
적을 상대하기는커녕, 공격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확.
공격이 스쳐 지나갔다.
케빈은 적과의 충돌을 철저하게 배제했고, 공격을 피하자마자 상대가 드러낸 틈을 빠르게 베었다.
상대의 반응은 빨랐다.
공격이 도달하기도 전에 검을 회수하며 반격을 시도하자, 케빈으로서는 의도를 이루기도 전에 회피를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칼날 위를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훈련하지 않았다면. 케빈은 첫 일격에, 목이 날아가서 죽었을지도 몰랐다.
입이 메말랐다.
공격 한 번, 한 번에.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진실을 알면서도 케빈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이다.’
팟.
공격을 흘렸다.
그리고는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이 정면 대결을 피하리라고 생각했던 상대로서는, 과감한 돌파는 변수를 만들어 내는 판단이었다.
이번에도 스벤의 반응은 빨랐다.
케빈은 회수되는 검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알면서도,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려드는 속도를 높였다.
콰르르르르르릉.
목숨을 걸었다.
애초에 적의 공격은 막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로,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흘려보내면서 상대의 목을 노렸다.
콰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리 성의 구분이 오라의 위력을 결정한다지만, 성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믿었다.
그간의 행보가 증명하기에.
자신의 공격이 통하는 순간, 6성의 오라 검사라고 할지라도 목이 날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잖긴.”
스벤이 웃었다.
그리고는.
콰직.
“크악.”
케빈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정신이 날아가는 느낌과 동시에, 오라가 완전히 부서지며 팔이 길게 찢겨 나갔다.
대체 어떻게 반격했는지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케빈은 땅바닥을 짚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스벤은 여유로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뿐 굳이 이 기회를 살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뚝, 뚝.
팔뚝에서 피가 떨어졌다.
난도질을 당한 팔에서는, 감각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게 끝이라면, 이만 죽어 줘야겠어.”
끝났다.
스벤과의 승부는, 절대 좁힐 수 없는 간격을 보였다.
케빈은 고통을 억눌렀다.
이 승부가 얼마나 무모한지를 알면서도, 이대로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러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떠올릴 때면, 그에게 받은 은혜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내릴 수 없게 만들었다.
차라리.
죽을 것이다.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살아서는 주군을 볼 생각이 없었다.
콰릉.
콰르르르릉.
달려드는 스벤.
그 순간.
케빈의 정신이, 머릿속 어딘가로 빠져들었다.
* * *
머릿속의 자아들이 떠들어 댔다.
[절대 이길 수 없어.]
[도망쳐.]
[이건 불가능한 승부야.]
광마의 무공을 익히고 처음으로, 그들이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케빈은 늘 그들의 말을 따랐다.
아무것도 아닌 소년이 전장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광기에 젖으면서도 결과를 위해 정신을 동화시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들을 따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고집이 죽음으로 직결된다고 할지라도, 케빈의 삶에서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음 본 날.
케빈은 삶의 희망을 얻었다.
빈민가의 생활을 청산했고, 자신의 부모님과 동생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물었다.
“나는 너를 나의 검(劍)으로 쓰고자 한다. 하지만 사람의 쓰임새는 타인의 의지대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너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도록 세 가지의 길을 말해 주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한스와 같은 시중을 드는 역할.
두 번째는 평범하게 강해지는 방법.
세 번째는.
목숨을 걸었다.
자신의 팔을 잘라 내며, 케빈은 빈민가에서의 생활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감정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떠나서 난생처음으로 얻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빈민가는 단순히 가난함만을 의미하는 세상이 아니다.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평생 접할 수 없는 기회였다.
팔을 자르고.
창백한 얼굴로 하늘을 보았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마치 밝게 빛나는 태양처럼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지금부터 날 대신할 하나의 검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날.
케빈은 삶의 의미를 찾았다.
빈민가를 전전하며 매일 생계를 걱정하던 소년이, 누군가에 의해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감정은 지나칠 정도로 광적이었다.
결여(缺如)되어 있는 삶을 살았기에, 처음으로 충족되는 감정을 절대 잃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서라면.
죽음 또한, 자신의 삶을 빛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평범한 빈민가 소년의 삶은, 사실 블러드 팽을 만났던 그 날에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대로라면 죽어.]
[죽어도 도망칠 수는 없어.]
[우리에게 맡겨.]
[우리가 도와줄게.]
정신이 붕괴했다.
자아들이 케빈과 동화되며, 내부에서 격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케빈은.
그러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 * *
내부의 변화는 실제와는 무관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케빈의 모습에, 스벤은 이만 지루해진 이 싸움을 끝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손에 걸리는 감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죽일 의도로 공격했는데, 오라에 땅이 부서지며 의도했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이걸 피하다니. 대체 넌 정체가 뭐지?”
감탄했다.
아직 어린 나이.
케빈이 이렇게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공격을 피한 케빈이 묘한 기세를 풍기는 모습으로 스벤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마의 무공.
그것은 세 단계의 영역이 있었다.
첫 번째는 동화(同化).
힘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잠식(蠶食).
무공의 힘이, 육체를 지배하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통제(統制).
머릿속의 광기를 비로써 손아귀에 넣었을 때, 광마의 무공은 완벽하게 그 힘을 발현할 수가 있다.
지금, 이 순간.
케빈은 잠식의 단계에 들어섰다.
이지를 상실함으로써, 무공을 발현하는 지금만큼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광인(狂人)이 되었다.
위험한 상태였다.
광인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린 명령과 상황적인 판단과 같은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배제되고, 마음 깊숙이 박혀 있는 단 하나의 본능만을 따른다.
만약 그것이 살의라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죽이기에, 사람들은 마귀의 무공을 익힌 자를 광마라고 불렀다.
짧은 시간에 강한 힘을 얻는 대가로, 마귀의 무공은 정신이 약한 자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그런 위험한 힘이었다.
본능이 바라는 단 하나의 욕구.
케빈은 팔에서부터 피를 뚝뚝 흘리며, 살의(殺意)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스벤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지나갈 수 없다.”
케빈.
그가 바라는 것은.
생존도, 승리도 아닌.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