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드미트리에 드리운 그림자 (1)
드미트리에서 멀지 않은 거리.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소에서, 갑자기 공간이 뒤틀리더니 어둠의 마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악.
어둠의 마력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점차 주변을 물들이던 마력은 어느 순간 게이트(gate)의 형상을 이루었고, 그곳에서부터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척척, 소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 나오는 존재들.
그들은 완벽하게 무장을 갖춘 상태였고, 투구로 가려진 틈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펄럭.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크로노스를 상징하는 불을 뿜는 괴물의 형상은, 그들이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임을 증명했다.
만약.
지금의 장면을 사람들이 목격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공간을 이동하는 워프는 ‘게이트’라는 명확한 매개체가 필요한데, 크로노스 제국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땅에 워프를 성공시켰다.
크로노스의 그림자들이 발할라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많은 병력이 발각되지 않고 국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크로노스 제국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방법을 사용했다.
척척.
병사들의 워프는 계속되었다.
휑했던 공간이 병사들로 가득 찼고, 언뜻 보아도 수천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들의 선두에.
민머리에 문신을 빼곡하게 새겨 넣은 사내가, 병사들의 모습을 살피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미트리의 동태는?”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경비 체계에 특별한 허점은 없지만, 동북쪽 일대의 국경을 통과하지 않고도 드미트리를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아직 발할라 국경에 있습니다. 만약 그가 그림자들의 공격을 이겨내고 살아 돌아온다고 한들, 아무리 빨라도 3일 안에 드미트리로 복귀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군.”
사내, 미스틱이 웃었다.
제국의 병사들.
그들이 이렇듯 국경을 넘어서서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엄연히 ‘대륙법’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크로노스 제국에는 명분이 없다.
카이로의 내란에 개입했던 것처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들은 기습적으로 제국의 병사들을 드미트리로 이동시켰다.
발할라에 침투한 그림자들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림자들은 모두가 크로노스의 소속임을 알지만, 공식적으로는 크로노스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 말인즉, 그림자들의 만행은 크로노스에게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달랐다.
그들이 드미트리를 공격하는 순간, 이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크로노스의 만행이 극에 달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할지라도, 샐러맨더 대륙에서 크로노스 제국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을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정말 전쟁의 불길이 번져 버린다면. 그건 다른 나라들로서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크로노스의 의도를 알고도, 모두가 애써 진실을 외면했다.
병사들이 도열했다.
시야 가득 차오른 그들의 모습에, 미스틱이 말했다.
“지금부터 드미트리를 공격한다.”
발할라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
로만 드미트리가 사투(死鬪)를 벌이는 그 순간, 드미트리 또한 그에 못지않은 위기를 맞이했다.
* * *
어두운 밤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멀리서 드미트리의 경비병들이 상황을 확인하는 순간, 미스틱이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마력을 일으켰다.
화악.
“라이트닝 레인(Lightning Rain).”
미스틱의 눈이 빛을 발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하늘에 닿은 마력이 주변을 밝게 물들였다.
번쩍.
콰콰콰콰쾅!
재앙의 시작이었다.
마법사가 공성전에서 어떤 위력을 보여 주는지를 증명하듯, 하늘에서 일어나는 수백 개의 번개 다발이 동시다발적으로 드미트리의 성벽을 내리쳤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7서클의 마법 한 번에, 성벽은 와르르 무너져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번개 다발이 성벽이 떨어지는 순간, 사방에서 밝은 빛무리가 일어나며 ‘방패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레이트 실드(Great shield)]
[그레이트 실드]
[그레이트 실드]
성벽 곳곳에서.
거대한 방패가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고가의 마법 방어진이었고, 방패는 계속해서 내리치는 번개에도 굳건하게 존재하며 마법의 힘을 빨아들였다.
그렇다고 그레이트 실드로 라이트닝 레인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번개의 잔재가 방패 사이를 파고들며 성벽을 공격했지만, 엄청난 폭발음이 들릴 뿐 성벽은 강력한 충격에도 조금의 균열도 일어나지 않았다.
동시에.
성벽 위에서, 밝은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파파파파팟.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엄청난 숫자의 마법 아티팩트였다.
사방을 밝히는 라이트(light)가 새겨진 아티팩트였고, 덕분에 한밤중인데도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리고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일반적인 영지들은 기습적인 공격에 대응이 느릴 법도 한데, 크로노스 제국의 병력이 도착하기도 전에 성벽 위로 병사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일련의 상황에, 미스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드미트리의 경비 체계가 예사롭지 않다더니. 이 정도였단 말인가.”
마법 방어진.
단 한 번의 발현을 위해, 무려 수백 골드를 사용해야 하는 고가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빽빽하게 설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드미트리의 성벽은 무슨 재질로 이루어졌는지 엄청난 방어력을 보였다.
성벽은 바로 드워프들의 솜씨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드워프와 기술적인 협약을 맺었고, 그들은 성벽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드미트리.
동북쪽 일대 끝자락에 존재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안전한 위치에 존재하기에 수성에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일단 본거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자했다. 평생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를 감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으로 만들고자 했다.
대응이 빨랐다.
크로노스가 의도한 전개와는 다른 상황이었지만, 미스틱의 얼굴은 아직 여유를 잃지 않았다.
“끝까지 발악하거라. 어차피, 너희의 최후는 정해져 있으니.”
드미트리의 전력이 생각 이상일지라도.
드미트리에 로만 드미트리가 없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면, 이번 공격을 감행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공격하라!”
“적들을 몰살시켜라!”
일제히 달려드는 제국의 병사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 * *
성벽 위.
조나단 기사단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2중대 장전, 1중대 발사! 3중대 장전, 2중대 발사!”
파파파파팍-
하늘 위로.
수많은 화살이 발사되었다.
빼곡하게 날아든 화살은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에게 떨어졌고, 그들은 방패를 들면서 화살을 막으려고 했다.
일부는 틈을 뚫고 들어온 화살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픽픽 쓰러지는 동료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사나운 기세로 드미트리 성벽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때였다.
성벽 곳곳에서, 화염의 마나가 일어났다.
“파이어 볼.”
“파이어 랜스.”
“파이어 버스트.”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피닉스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의 마법이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을 공격했고, 방패만으로는 마법의 불길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그러자 미스틱이 마법을 발현했다.
그가 포그(fog) 형태의 마법을 발현하자, 피닉스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화력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공성전의 꽃은 마법사다. 단 한 명의 마법사가, 전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드미트리에는, 미스틱에 버금가는 존재가 있었다.
“버닝.”
마력이 들끓었다.
펠릭스가 눈을 뜨자, 화염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파이어 레인(Fire Rain).”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하늘이 빨갛게 변했다.
불덩어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치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무차별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미스틱이 방어 마법을 사용해 보았으나 공격을 완전히 막을 수가 없었다.
피닉스.
단언컨대, 그들은 대륙을 통틀어 공성전에 가장 특화되어 있는 존재였다.
그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드미트리는 일반적인 나라와는 다른 수성의 강점을 갖추었다.
크로노스가 동원한 전력.
사실 카이로의 수도 정도는 단번에 무너트릴 만한 힘인데도, 드미트리는 시작부터 견고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기습적인 공격이라는 이점이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빠르고 체계적인 대응은 감탄을 자아냈고, 이 나라가 정녕 약소국(弱小國)이 맞는지 의구심이 생겨날 정도로 대단했다.
불타오르는 전장.
미스틱은 소름이 돋았다.
만약 이곳에 로만 드미트리마저 있었다면, 병력을 더 끌고 왔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확실하다. 드미트리는 공국에 불과하지만,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제국에 대항할 힘을 갖추고 있는 위험한 존재다. 이번 기회에 드미트리를 확실하게 짓밟아 버린다면. 샐러맨더 대륙의 왕국들에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
상대를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은, 크로노스의 예상 범주에 있었다.
* * *
난리가 난 그때.
드미트리 내부에서는, 일단의 무리가 움직였다.
“주요 시설들을 파괴하고, 요주의 인물들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하라.”
“알겠습니다.”
검은 존재들.
그들은 바로 그림자였다.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게이트를 통해 단번에 넘어온 반면, 그림자들은 이번 계획을 위해서 차례로 드미트리로 진입했다.
드미트리가 ‘외부의 인물’들을 경계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작전은, 암살자들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외부를 동시에 공격하는 양동 작전이었다.
드미트리는 수성으로 정신이 없는 상태.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도심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들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뭔가 이상합니다. 도시가 죽은 것처럼 조용합니다.”
밖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보통 사람들은 달려 나가서 물자를 나르거나, 혹은 전장의 혼란으로 도시가 시끄럽게 변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어둠이 짙게 물든 도시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얼마나 조용한지 그림자들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싸했다.
그림자들이 숨을 죽였다.
원래의 계획은 혼란에 숨어드는 것이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단.
그림자들은 흩어졌다.
내부의 그림자들은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분란(紛亂)을 유도하는 존재였고, 결국 본인들의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수성하는 이들의 신경을 흩트리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동시에 다른 목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은밀하게 처리할 일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저마다 목표한 목표물을 향해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머리 위로, 무언가가 갑자기 떨어졌다.
확.
콰직!
목이 돌아갔다.
그림자 하나가 눈이 풀리며 쓰러지는 순간, 다른 그림자는 황급히 뒤로 빠지며 목소리를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심장에서 검이 뚫고 튀어나왔다.
“커억-!”
육체는 연기로 흩어지지 않았다.
마나의 연결고리를 단번에 끊어 버리는 공격에, 그림자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앞을 보았다.
평범한 인상의 사내.
헨더슨이었다.
헨더슨은 검을 거두며, 자신과 짝을 맞춘 맥버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빌어먹을 크로노스 새끼들. 주군의 말처럼 정말 드미트리를 직접 노릴 생각을 하다니.”
이번 전투.
크로노스는 기습적인 공격을 의도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드미트리가 위험할지라도 발할라행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제까지고 본인이 드미트리를 지킬 수는 없다.
알고도 받아들인 상황.
이건.
드미트리와 크로노스의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