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필살(必殺) (1)
격정적이었던 축제가 끝나고.
로만 드미트리 일행은 곧바로 짐을 챙겼다.
발할라에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기에,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서 드미트리의 ‘아델리안’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워프 게이트를 방문하자, 해당 책임자가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당분간은 워프 게이트 이용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희도 워프 게이트의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만, 보수를 맡은 마탑의 의견에 따르면 약 보름의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마린에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보로 이동하면 오랜 시간이 걸리니, 윗선에 연락해서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한 새로운 숙소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정중한 태도와 인자한 미소.
책임자는 적절한 대응을 보여 주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 이면에 숨겨진 속내를 알았다.
‘예상대로 워프 게이트를 차단했다.’
하루 전.
발할라 정보 길드의 책임자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밤새 일어난 마린의 변화에 대해서 말했다.
“발할라 황실에서 워프 게이트의 폐쇄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겉으로는 고장을 원인으로 들먹이겠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아마 마린을 중심으로 ‘워프 게이트’를 보유한 그 어떠한 도시에서도 똑같은 대답을 들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지금, 주군이 도보로 이동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린에서 드미트리까지.
상당한 거리였다.
말을 타고 이동한다고 할지라도 한두 달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리였고, 드미트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워프 게이트의 이용은 필수였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발할라 제국으로서는 워프 게이트를 개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발할라의 음모는 어떤 수작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마린으로부터 한 달 거리에 있는 발할라의 무역 도시에 도착하는 것. 매일 하루에도 수백 번의 워프가 이루어지는 무역 도시는 단 하루의 폐쇄만으로도 천문학적인 손실이 발생하기에, 발할라 제국으로서는 오랫동안 우리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겠지. 마린에서 무역 도시까지. 그 한 달의 시간 안에 승부를 볼 것이 분명하다.’
발할라.
썩어 빠진 나라였다.
혹시라도 전사로서 명예를 지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워프 게이트의 폐쇄로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예상했던 바다.
로만 드미트리는 방향을 틀었다.
선택지가 제한된다면.
역으로, 그들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응해 줄 것이다.
* * *
며칠 후.
벨피르 후작이 보고를 받았다.
“마린을 떠난 로만 드미트리가 ‘무역 도시’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상대로입니다. 그들은 발할라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무역 도시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눈치가 빠르군. 그래서, 언제가 그들을 공격할 적기지?”
“그게…… 사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정보원들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
수하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축제로 인해 단번에 엄청난 명성을 얻었습니다. 발할라의 백성들이 그를 찬양하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일부러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오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눈과 귀가 많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곧 발할라를 떠나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발할라의 백성들은 그가 무역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성지 순례(聖地巡禮)를 하듯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시작은 하나의 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영접하면 발할라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에, 사람들은 기꺼이 도시 밖으로 나섰다.
로만 드미트리와 바르보사의 대결.
그날의 일은 엄청난 충격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독’에 중독되었는데도 전사로서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사실을 기억했고, 열병처럼 번져 나가는 감정은 적지 않은 인파를 형성했다.
대놓고 공격하기에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간, 수백의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처음 입국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타국의 이방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천대를 받았던 그가, 지금은 모두가 인정하는 발할라의 영웅이 되었다.
“지금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한다면 민간인들의 피해가 불가피합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소집령(召集令)을 통해서 백성들의 행렬을 와해시킬 수는 있지만, 그 이후에 일부러 로만 드미트리를 위험으로 몰아넣었다는 의혹에서는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제 일반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를, 전사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벨피르 후작이 담담히 창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발할라는 기형적인 나라다.
귀족들이 대부분의 일을 주도하지만, 발할라 황제의 분노 한 번에 조나탄 자작 같은 권력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 나갔다.
반역은 꿈에도 꿀 수 없었다.
발할라를 대표하는 최상위 랭커들. 바르보사도 넘볼 수 없는 그들이, 모두 발할라 황제를 향해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아직도 충성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권력 하나 없는 발할라 황제를 그들이 따르면서, 14번째 아들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 일.
사활을 걸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살려 보냈다간, 어떤 형벌이 떨어질지 모른다.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백성들의 존재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는 일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직접 나서서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다. 발할라의 영토에서 우리가 초대한 손님이 죽는 일이다. 발할라가 주도한 계획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적지 않은 파란을 일으키겠지.”
애초에.
이번 계획의 주체는 발할라가 아니다.
발할라는 동참했을 뿐, 실질적으로 이번 일을 주도할 존재들을 따로 있었다.
“우리는 정보를 전달하고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적당한 방관과 발할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면피(免避)할 최소한의 노력만 보여 준다면. 우리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로만 드미트리를 죽일 수 있다. 그러니, 크로노스에게 전하라. 무엇을 하든,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라고.”
싸늘한 음성.
벨피르 후작은, 계획이 성공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 * *
공격은 예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예민한 감각에 포착되는 살기(殺氣)에, 로만 드미트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았다.
“적이다!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발할라의 사람들이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행렬을 이루었는데, 발할라의 땅에서 감히 축제 무대에 오른 전사를 공격하다니.
사람들은 안전한 거리로 물러나면서도 두 눈은 부릅떴다.
대체 어떤 개자식들이 이런 일을 벌이는지, 반드시 확인하려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파파팟-
수풀을 뚫고 단검이 발사되었다.
아직 밝은 대낮인데도, 얼굴에 검은 천을 두른 존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며 오라를 일으켰다.
콰르르르릉.
그림자들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본인들의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발할라의 영토를 침범한 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본인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죽이려 한다는 의도를 대놓고 드러내길 바랐다.
그림자들이 빠르게 공간을 쇄도했다.
앞선 병사들이 단검을 쳐 내자, 그들은 검은 오라로 일렁이는 단검을 위협적으로 뻗었다.
훅.
카앙!
공격을 막았다.
크리스였다.
가장 선두에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낸 그가, 그림자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섬전.’
한 번의 번뜩임.
그림자의 몸에서 검붉은 피가 튀었다.
어둠으로 뒤엉킨 몸이 그림자로 흩어지며 공격을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크리스의 예민한 감각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는 마나의 연결 고리를 단번에 끊어 버렸다.
발할라행을 준비하던 시간. 로만 드미트리의 수하들은 단순히 강해지기 위한 훈련만을 진행하지 않았다.
만약 크로노스가 로만 드미트리의 목숨을 노린다면, 반드시 그림자들과의 격돌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그림자를 상대하는 법을 훈련할 것이다.”
극한의 훈련.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매 순간이 위기였던 훈련에서, 크리스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마나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었다.
찰나의 틈.
크리스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가장 먼저 달려든 그림자를 벤 것으로도 모자라,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그림자들의 몸을 순식간에 도륙해 버렸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림자들의 악명(惡名)은 대단하다. 일반적인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고 알려졌는데, 크리스의 대응은 완벽했다.
그것은 시작일 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적들을 척결하라.”
그 명령에.
크리스의 뒤에서, 거구의 사내 둘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 * *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수하 중.
선봉대(先鋒隊)의 역할을 맡는 존재는 누구일까.
크리스?
아니다.
그는 단연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한 최고의 실력자지만, 그는 최전방이 아니라 적절하게 전장의 균형을 맞추었다.
열세인 곳이 있다면 그곳을 지원하는 형태의 움직임.
로만 드미트리는 크리스를 단순히 하나의 검으로서가 아니라, 본인을 대신할 지휘관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렇다면 케빈?
그도 아니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가 신뢰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지만, 선봉대로 어울리는 존재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콰직!
볼칸과 푸키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드러낸 그들은, 대검을 휘둘러 단번에 그림자의 육체를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섬뜩한 파육음이 들렸다.
인간의 육체를 종이처럼 찢어발기는 소리였고,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자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공격이 치고 들어왔다.
일부 그림자들은 그림자를 일으켜 상대의 몸을 포박했고, 일부는 사각을 노리며 순간의 틈을 공략했다.
팍!
힘으로 그림자를 풀어 냈다.
볼칸은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하더니, 붉게 타오르는 오라를 일으키며 눈앞의 그림자를 베었다.
콰직.
그와 동시에.
볼칸은 옆으로 몸을 틀었고,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자 그림자는 바로 뒤에서 나타난 푸키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볼칸이 그렇게 움직이리라는 사실을 예상했다는 듯이.
푸키는 이미 검을 휘두른 상태였고, 그림자가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그림자의 육체가 단번에 찢겨 나갔다.
푸확.
피가 튀었다.
푸키는 앞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고립될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치고 들어오는 적들의 공격을 상대하다 보면,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볼칸이 개입해서 푸키가 숨을 돌릴 틈을 만들어 주었다.
방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볼칸이 푸키의 존재를 신뢰하고 그림자를 흘려보냈던 것처럼, 푸키 또한 볼칸의 존재를 의식하고 뒤를 맡겼다.
그간의 싸움.
볼칸과 푸키는 항상 같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각기 다른 이유로 드미트리를 찾았던 그들은, 전쟁 용병이라는 공통점을 통해서 급속도로 사이가 발전했다.
성향마저도 비슷했다.
둘은 가장 최전방에서 뜨겁게 싸우는 것을 바랐고, 그간 여러 굵직한 싸움들을 경험하면서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적들이 득실거리는 사지.
그곳에서, 볼칸과 푸키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수하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성장했고, 그들은 선봉대로서 역할을 해냈다.
난전(亂戰)이었다.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싸움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병력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림자의 존재를 미리 대비한 것도 있었지만, 그간의 승리가 그들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부여했다.
자신들의 뒤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다.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목숨을 걸었다.
콰릉.
콰르르르릉.
병사들이 길을 열면.
로만 드미트리가 상황을 정리했다.
이미 한번 경험해 보았던 그림자라는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질 않았다.
패색이 짙었기 때문일까.
눈에 띄게 줄어드는 숫자에, 그림자들이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순간.
그림자 하나가 히죽, 웃음을 보였다.
“이 정도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 말은.
크로노스의 의도를 드러냈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한 경험이 있다.
혼자 있었던 로만 드미트리도 제압하지 못했는데, 겨우 이 정도의 전력으로 암살에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한 이유. 천천히 무너트리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무역 도시’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없도록 대놓고 선전포고를 보냈다.
필살(必殺).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를 살려 보내는 선택지는 없었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로만 드미트리에게 로브를 눌러쓴 사내가 다가왔다.
“영상은?”
“성공적으로 저장했습니다.”
로브인.
그는 바로 발할라의 정보 책임자였다.
마린을 떠난 그때부터, 발할라 책임자를 통해서 ‘마법 영상 저장기’를 사용할 것을 명했다.
저장기 안.
일련의 상황이 담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발할라의 사람들에게 영상을 퍼트려라. 발할라 전체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싸움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판을 제대로 키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