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포식자의 방식 (4)
무대를 지켜보는 관중들.
그들은 사고 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이 들었다.
바르보사가 누구인가.
평소에 독을 사용한다는 명예스럽지 못한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그가 실력으로 대륙 십이검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르보사의 실력은 진짜다. 모랄레스가 바르보사를 비난하면서도, 함부로 대결을 신청하지 못한 이유는 실력 차이에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광경은 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결판이 난 상황인데도 넋을 잃은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누군가의 말.
모두의 생각이었다.
대결을 치르기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소문에 분노하는 감정을 표출했다.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가 불리한 승부다.
모랄레스와의 결투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다고는 하나, 사람들은 대부분 바르보사의 우위를 확신했다.
결과가 뻔한 상황. 사람들은 축제 장소로 몰려들며, 정말 독의 정황이 드러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승리는 기대하지 않았다.
상대가 바르보사기에.
독을 복용했다는 악조건을 이겨 내고, 대등한 승부만 보여도 로만 드미트리는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승리했다.
그것도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했고, 바르보사는 단 한 번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처음 공방을 주고받았을 때는. 바르보사의 노련한 모습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빠르게 공격을 시도했는데도, 바르보사의 대응은 사람들이 바라는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2번째 공격.
3번째 공격.
4번째 공격이 시도되었을 때, 균열이 일어나는 바르보사의 얼굴처럼 관중들도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바르보사가.
대륙 십이검이.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마지막에 소멸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결과인데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악스러운 결과를 만들어 내고도.
아직 로만 드미트리의 ‘전력’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바르보사와 로만 드미트리의 대결. 승자는,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무대 위.
심판이 떨리는 목소리로 결과를 밝혔다.
부정은 찰나일 뿐.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홀로 무대에 서 있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관중들이 폭발하듯 동시다발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로만 드미트리가 이겼다!”
“새로운 대륙 십이검의 탄생이다!”
환호성이 산불처럼 번졌다.
아직도.
사람들은 현실을 완벽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랄레스와의 대결로 전사의 긍지를 보여 준 로만 드미트리가, 바르보사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
기쁜 일이었다. 발할라의 명예를 아는 존재가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독을 복용하고도, 실력으로 판을 뒤엎어 버렸다는 사실이.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비록 발할라 출신은 아니었지만, 전사들의 넋을 기리는 자리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환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때였다.
모두가 열광하는 무대 위로.
한 사람이 올라갔다.
다소 긴장한 표정의 사내는, 바로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임무를 받은 그렉이었다.
* * *
하루 전.
그렉은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무슨 의도인지는 알았으나, 허무맹랑한 계획에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를 말리고 싶었다.
‘독의 성분을 분석한다고 한들, 바르보사와의 대결에서 패배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발악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로 바르보사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믿는 건가. 모랄레스와의 대결로 그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에게 독의 사용 여부를 증명할 기회 따위는 허락되지 않겠지.’
절망적이었다.
모랄레스의 죽음.
그날의 일을 확인하고, 그렉을 비롯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를 살리고자 했다.
이번 계획.
매우 위험했다.
만약 바르보사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그렉을 비롯한 사람들을 학살해 버릴 것이다.
위험을 감수한 일이다. 독의 성분을 분석하면서도 이만 발을 빼야 한다는 망설임이 일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배신하기는 싫었다.
발할라는.
그런 나약한 마음에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현재의 발할라를 주도하는 세력들은, 발할라를 부르짖으면서도 더는 목숨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그렉은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눈앞의 결과를 목격했다.
바르보사를 무너트리는 그 모습에, 그렉은 확신을 얻었다.
자신의 얼굴을 노출하는 일인데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독을 증명할 증거를 내밀었다.
“저는 당신에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추악한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발할라의 사람들이 조금은 부끄러움을 알 수 있도록. 로만 드미트리. 당신이 얼마나 힘든 무대를 이겨 냈는지를.”
“고생했다.”
증거를 받아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가 그렉의 존재에 의문을 표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황제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제저녁. 누군가가 제가 마시는 차에 독을 탔습니다.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차에 독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필요하다면 직접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사실 독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었는지는 제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한 발할라의 태도에 실망했습니다.”
툭.
증거를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그것은, 검은색의 빛깔을 드러내며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독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진실을 확인하고자 했을 때. 조나탄 자작은 제게 오히려 발할라를 모욕하는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참 재밌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타국의 이방인에 불과한 제가. 숙소의 하인들이 준비해 준 차에서 독이 나왔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진실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는 발할라의 태도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한 억측은 하지 않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저를 쓰러트리고자 하는 누군가가 차에 독을 탔겠지만, 눈앞의 진실을 부정하는 조나탄 자작의 대응은 발할라의 긍지가 바닥에 떨어졌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독에 의해 몸이 온전하지 않는데도, 암수를 사용한 무리의 의도를 순순히 따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독은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발할라의 사람들은, 자신이 독에 당했음에도 불리한 승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관중들.
그들의 감정이 들끓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들으면서, 그들은 본인들이 부끄러운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타국의 이방인을 초대해 놓고, 전사의 나라라라는 곳에서 승부를 조작하기 위해 독을 사용했다니.
차마,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 묻고 싶습니다. 발할라는 전사의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진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저를 핍박하고 책임을 묻던 모습이, 정녕 발할라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것입니까? 만약 바르보사와의 대결에서 제가 패배했다면. 진실은 묻혔을 것이고, 로만 드미트리라는 검사는 그저 그런 존재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겠지요. 황제 폐하. 저는, 이번 일에 대한 대답을 바랍니다.”
무대 위.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발할라 황제는 표정에서부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 * *
발할라 황제가 말했다.
“제국의 꼴이 우습게 되었군.”
그 또한.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바르보사가 독을 사용한다는 사실?
알고 있었다.
문제는 독을 사용하고도 일방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이고, 추악한 진실이 사람들에게 드러날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유흥을 망쳐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은 충격적일 정도로 대단했으나, 그가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발할라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
“조나탄 자작.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사실인가?”
상석 아래.
일렬로 도열한 귀족 중, 조나탄 자작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래, 사실이란 말이지.”
이 순간.
벨피르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발할라 황제는 책임에 대한 형벌이 확실한 사람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선처와 같은 발언을 내뱉었다간, 본인도 어떤 꼴을 당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할라 황제는, 옆에 있는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죄인은 내 앞으로 와라.”
조나탄 자작이 벌벌 떨었다.
햇볕에 반짝이는 검.
가슴이 내려앉았다.
서늘한 감각에, 조나탄 자작은 한달음에 달려와 바닥에 넙죽 엎드리더니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축제를 하루 앞두고,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상황을 마무리하자는 조급함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평생, 발할라 제국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노력하겠습니다.”
“지랄하지 마.”
툭.
검 끝으로 조나탄 자작을 밀었다.
날카롭게 살을 파고드는 통증에, 조나탄 자작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 냈다.
발할라 황제가 말했다.
“조나탄 자작. 너는 발할라의 명예를 더럽혔다. 전사들의 넋을 기리는 축제를, 네 녀석의 안일한 대응이 망쳐 버렸다. 그리고 나는 너와 같은 쓰레기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 추호도 없다.”
“제, 제발…… 악!”
퍽!
검을 휘둘렀다.
발할라 황제의 연약한 팔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나탄 자작의 목을 베어 버렸다.
피가 튀었다.
조나탄 자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절한 손길로 발할라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했다.
발할라 황제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육체는 건장한 사내의 목을 단번에 잘라 내지 못했고, 수차례 검을 휘두르면서 주변이 피로 얼룩지는데도 조나탄 자작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발할라 사람들조차도 역할 정도로 잔인한 장면이었다. 퍽퍽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귓속에 계속 맴돌았다.
마침내.
털썩.
조나탄 자작의 몸이 쓰러졌다.
발할라 황제는, 피로 얼룩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히죽 웃었다.
“후욱, 후욱. 이 정도면, 후욱. 이번 일에 대한 책임으로 충분하겠지?”
숨을 헐떡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시선.
그것은 분명히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살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 않습니다. 조나탄 자작을 처벌한 것은 개인적인 처벌일 뿐.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조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 태도.
발할라 황제가 환히 웃었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제국의 황제를 앞에 두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 * *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발할라의 두 기둥.
고메스 백작과 벨피르 후작이 황제를 따라나섰다.
앞서가는 걸음을 따라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피에, 그들은 함부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고메스 백작. 너는 로만 드미트리를 어떻게 생각하지?”
“……위험한 인물입니다. 바르보사는 대륙 십이검입니다. 그를 압도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대륙 제일(第一)을 논할 실력자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가 가장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륙 십이검 내의 서열에서 바르보사는 상위의 실력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나이가 아직 30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벨피르 후작, 네 생각은?”
벨피르 후작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조나탄 자작의 죽음이 머릿속에 아른거렸지만, 지금은 발할라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아니었다.
“저도 고메스 백작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로만 드미트리 개인의 무력이 아닙니다. 어차피 국가 간의 전쟁에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감히 제국의 영토에 발을 들이고도 조금도 물러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태생부터 포식자의 성향을 타고난 존재입니다. 독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바르보사와의 대결을 받아들였고, 그를 쓰러트린 후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에서 진실을 밝혔습니다. 때를 아는 것입니다. 만약 무대 밖에서 그런 발언을 내뱉었다면, 제가 로만 드미트리의 입을 틀어막았을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
경악스러웠다.
덴버 백작의 복수를 하겠다던 완벽한 계획은,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처참하게 찢겨 나가고 말았다.
발할라 황제가 피식피식 웃어 댔다.
들떴다.
무료한 삶에, 정말 재밌는 존재가 나타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감히 내가 행한 처벌에 토를 달았다. 그는 발할라에 어울리는 전사이나, 발할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살려 둘 수 없는 존재다. 크로노스의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 로만 드미트리가 무사히 드미트리로 돌아갈 수 없도록, 절대 그를 살려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자신과 같은 동류.
살의가 일었다.
발할라 황제는, 로만 드미트리의 죽음을 바랐다.
크로노스와의 결탁은 보수파가 반대하던 일이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라는 위험한 존재의 등장에 보수파의 고메스 백작은 조금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 또한.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보수파의 뜻과 다르다 할지라도, 실익을 위해서는 현실에 타협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하겠습니다.”
그들은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