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축제를 위한 축제 (3)
웅성웅성.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들의 선두에는, 거구의 사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모랄레스 님! 발할라의 명예를 드높여 주십시오!”
“믿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따위가, 모랄레스 님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사방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익숙한 광경이었다.
발할라의 괴물.
혹은, 광폭(狂暴)의 전사라고도 불리는 사내.
모랄레스는 발할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발할라의 혈통을 완벽하게 물려받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장을 전전하며 전사로서 자질을 증명했다.
비겁함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강자와의 대결을 순수하게 즐겼고, 처음 발할라 랭킹에 진입했을 때 머리에서 피가 흥건한 채로 상대의 머리를 날려 버린 모습은 아직도 발할라 사람들에게 화제가 될 정도로 강렬했다.
12위의 순위.
열 손가락에 포함되는 강자는 아니었지만, 순위와는 별개로 그는 발할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가.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고자 나섰다.
사람들은, 모랄레스를 따라가며 그의 승리를 확신했다.
‘바르보사. 나는 너와의 대결로 지긋지긋한 악연의 고리를 끊을 것이다.’
기억 너머.
바르보사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에만 하더라도 모랄레스는 바르보사에 못지않은 재능이었지만, 마을 최고의 전사들이 붙는 자리에서 바르보사를 상대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모랄레스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고, 최악의 몸 상태로 무대 위에 올랐다.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몸을 보전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렇게, 모랄레스는 무릎을 꿇었다.
피를 토하고, 살가죽이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갔지만, 모랄레스는 악에 받친 얼굴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때부터.
악연은 시작되었다.
그날의 상처는 문신으로 뒤덮었고, 바르보사와 다시 만날 날을 위해 악착같이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바르보사는 명가의 후예였다.
권력을 뒷배로 둔 그는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해 나갔고, 야생에서 거칠게 자란 모랄레스와는 다르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6위와 12위.
미래는 그렇게 정해져 버렸다.
미세한 차이는 이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졌지만, 모랄레스는 아직도 악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실에 타협한다면 나도 너와 같이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발할라의 전사다. 하늘 아래 부끄럽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지고자 노력할 것이다. 바르보사. 나는 너와 같은 역겨운 인간이, 전사의 탈을 쓰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이번 대결.
목숨이 걸렸다.
바르보사는 자신을 죽이려 들겠지만, 이를 악물었던 그 날의 기억이 지금의 걸음을 이끌었다.
우뚝.
어느덧 도착한 목적지.
로만 드미트리가 머무르는 장소가 보였다.
모랄레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거대한 체구만큼이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자신의 제물로 전락할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로만 드미트리! 이 모랄레스가 상대해 주마!”
* * *
문 너머로.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모랄레스의 이름을 듣고도, 로만 드미트리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강자와의 대결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모랄레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로만 드미트리. 네게 하나만 묻겠다. 발할라 제국은 덴버 백작의 죽음을 보복하기 위해 너를 바르보사의 상대로 불렀다. 전사의 긍지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명백하게 네 목숨을 위협하는 자리이건만, 너는 대체 왜 그러한 의도를 알고도 발할라 제국의 제안을 승낙했지?”
“복수를 위한 초대라고?”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모랄레스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금시초문(今始初聞)이었다.
일반 사람들로서는 단순하게 로만 드미트리를 초대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진실의 이면에는 더러운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발할라의 축제는 전사들의 혼을 기리는 자리다.
순수하게 그 자리를 빛낼 사람들이 필요하건만, 발할라의 수뇌부들은 진정한 목적에 어긋나는 사심을 섞었다.
일부 사람들이 분노했다.
모랄레스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발할라 황실은 발할라를 더럽히는 계획을 꾸몄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내가 왜 피해야 하지? 내 목숨을 위협하는 자리가 서로의 강함을 증명하는 무대 위라면. 발할라 제국은 날 죽일 수 없다.”
“바르보사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면 초대에 응할 이유가 없었겠지.”
“크하하하하하.”
모랄레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
마음에 들었다.
발할라의 비겁한 계획을 알고도, 자신의 실력을 믿고 함정에 발을 들였을 줄은 몰랐다.
무모했고.
과감했다.
발할라에 어울리는, 정말 발할라의 정신이 무엇인지 아는 사내였다.
“오만하구나. 그렇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는 너와 같은 사내들을 미치도록 사랑한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사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강함을 겨루는 전사들은 죽어서도 발할라의 축복을 받겠지. 하지만 아직 이르다. 겨우 20대의 나이에, 진짜 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네가. 바르보사를 상대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그러니, 내가 너의 자리를 되찾아 가마.”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로만 드미트리가 피식, 웃었다.
“내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흔히 랭커라고 불리는 검사들을 상대하며, 단 한 번도 내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은 항상 너와 똑같은 말을 지껄이더군. 아직 20대의 나이에. 겨우 네 녀석 따위가. 이미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해 온 랭커들을 상대로,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나는 네 앞에서, 승자로서 존재하고 있다.”
슥.
검을 뽑았다.
“너라고 특별히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툭 내뱉은 말.
모랄레스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순수한 기쁨이었다.
예상외였다.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정신을 아는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강자와의 대결.
늘 피가 끓는 일이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오냐. 지금부터, 누가 축제에 어울리는 전사인지를 확인해 보자꾸나.”
콰르르르르릉.
폭발하는 마나.
모랄레스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눈을 한번 깜빡이는 순간.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구의 사내가, 어느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앞에 나타나 대검을 휘둘렀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강력한 폭발이 일었다.
모랄레스의 대검에서는 이전에 상대했던 존재들과는 차원이 다른 오라가 일어났고, 사방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거대한 오라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휘몰아쳤다.
땅이 뒤흔들렸다. 무기가 부닥칠 때마다 일어나는 엄청난 충격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바닥에 나자빠지고 난리가 났다.
콰앙!
머리를 내리찍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들어 막아섰지만, 모랄레스는 상관없다는 듯이 검을 미친 듯이 내리찍었다.
콰앙!
콰콰콰콰쾅!
과격한 공격이었다.
가슴을 활짝 열고, 방어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공격을 몰아붙였다.
번뜩.
바람을 가르는 검.
로만 드미트리가 반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모랄레스는 바로 코앞에서 검의 움직임을 포착하더니, 신체 일부분의 오라를 폭발시켜서 몸의 방향을 틀었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조금이라도 오차 범위가 생겼다면 살이 갈라지고 내장을 콸콸 쏟아 냈겠지만, 모랄레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딜!”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광폭의 전사.
그렇게 불리는 이유였다.
방어를 도외시하는, 순수하게 공격으로 승부를 보는 존재.
모랄레스는 칼날 위에 섰다.
문신으로 뒤덮여서 잘 보이지 않는 피부에는, 그의 방식이 얼마나 처참한 대가를 치러 왔는지를 보여 주었다. 상처투성이였다.
베이고, 찢어지고, 파인 상처들이 엉망으로 전신을 뒤덮었지만, 모랄레스는 상처 하나 없는 싸움은 진정한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꽉 막힌 부류였다.
확.
상대를 구석에 몰고.
오라를 일으켰다.
하늘을 뚫을 것처럼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오라가, 로만 드미트리를 다시 한번 찍어 눌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이걸 막아?’
모랄레스의 눈빛이 빛났다.
방금의 격돌.
같은 5성의 검사들도 막아 내지 못하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드미트리는 모랄레스의 공격을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후속 스텝을 밟으면서 자신의 허점을 공략했다. 빨랐다.
신체의 오라를 폭발시켜서 순간적으로 반응해 냈지만, 모랄레스의 뺨에 가늘게 혈선이 그려지며 핏물이 맺었다.
히죽,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짜였다.
허무맹랑한 자신감이 아니라, 정말 바르보사를 상대할 만한 실력을 갖춘 그런 존재였다.
‘세상은 넓구나. 20대의 나이에 이런 경지에 오르다니.’
기억 너머.
제일검(第一劍)이라 불리는 존재를 떠올렸다.
모랄레스가 처음으로 패배를 완벽하게 인정한, 그 괴물 같은 존재도 로만 드미트리의 나이에는 이처럼 강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어리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기에, 자신을 만난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이었다.
콰앙!
땅을 밟았다.
오라의 파동이 일어나며,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에 균열이 일었다.
생소한 오라의 활용법.
땅이 무너지며 공간을 제한했고, 사방에 튀어 오르는 돌덩이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을 막았다.
상대를 궁지에 몰고.
“어디 이것도 막아 보아라.”
콰르르르르릉.
모랄레스의 검이,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떨어졌다.
* * *
찰나의 순간.
상대의 의도가 보였다.
모랄레스는 순수한 힘의 격돌을 위해서, 주변의 지형지물을 붕괴시켰다.
‘상위 랭커는 다르다는 건가.’
그간의 상대들.
오라의 활용법이 제한적이었다.
육체로부터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오라를 매개체를 통해 발현하거나, 아니면 신체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방법으로만 활용했다.
그런데 모랄레스는 달랐다.
오라를 땅에 퍼트려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균열을 일으켰고, 허공에 떠오른 돌덩이들을 일일이 조정해서 피하기 껄끄러운 위치에 배치했다.
순간의 판단.
궁지에 몰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정면으로 상대할 수도 있지만, 상대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주었다.
타닥.
빠르게 뒤로 빠졌다.
땅을 밟자마자 무너지는 상황에, 모랄레스가 곰처럼 달려들었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
콰르르르르릉.
대검이 크게 부풀었다.
오라의 선명도가 대단해서, 마치 대검의 크기가 2배가량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콰앙!
콰콰콰콰쾅!
공격이 작렬했다.
무너지는 땅과 돌덩이들로 공간을 제한하면서, 로만 드미트리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사방에서 정신없이 번뜩이는 불빛이 일어났다.
일반 사람들로서는 오라의 폭풍에 차마 눈을 뜰 수 없었고, 그나마 확인한 광경도 오라의 불빛이 서로 뒤엉켜 충돌하는 장면이었다.
확-
바람을 갈랐다.
대기가 쩍 갈라지며, 모랄레스의 시선이 로만 드미트리를 향했다.
쾅!
바닥을 밟는 발.
땅이 무너졌다.
동시에 튀어 오르는 돌덩이가, 정확히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막다른 길.
그때였다.
모랄레스의 검이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떨어지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랄레스.
그는 크나큰 착각에 빠졌다.
애초에 힘과 힘의 대결에서 본인이 우위라고 생각하는 것도 섣부른 판단이거니와, 지형지물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전생에서의 그는. 다양한 환경에서 전투를 치렀다.
드넓은 초원에서도,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도, 조금도 물러날 수 없는 벼랑 끝에서도.
공간은.
공간일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전적으로 인간의 능력에 달렸다.
툭.
시선 위로.
로만 드미트리가 떠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돌을 밟았는데, 돌은 조금도 내려앉지 않은 상태로 로만 드미트리의 몸에 추진력을 더했다.
경공(輕功).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무공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방에 떠오른 돌들을 마치 계단처럼 활용하더니, 모랄레스가 감히 따라붙을 수 없는 위치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모랄레스의 노림수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간 수많은 적을 쓰러트린 방법을, 로만 드미트리는 경이로운 움직임으로 무마시켰다.
믿을 수 없는 광경.
모랄레스가 눈을 부릅떴을 때.
그의 머리 위로, 오라의 불길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