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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화 (228/615)

228화 발할라 제국 (3)

그 시각.

성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파울로 남작은, 수하로부터 갑작스러운 보고를 받았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파울로 광장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사람들을 상대로 대결을 치르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로만 드미트리의 상대로 나선 전사들이 모두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콰앙!

파울로 남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금의 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심기를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외지인에 불과한 로만 드미트리가 대결을 치르는 것도 황당한데, 발할라의 전사라는 녀석들이 상대를 쓰러트리지는 못할지언정 항복을 외치다니.

발할라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축제 기간이라서 외부인들의 시선이 많은데, 그들이 발할라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수하가 상황을 설명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일부러 항복을 유도하도록 폭력을 행사했다지만, 파울로 남작은 분노를 가라앉히질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그의 발할라행.

상부로부터 정보를 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어디에서든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드미트리에서 지낼 때는 바르코 가문과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이름값을 드높였고, 이후에도 남부 전선과 공개 랭킹전 같은 파격적인 행보로 한바탕 세상을 뒤집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레드포드 왕국의 정권 교체에 개입했다는 말도 돌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은 숨는다고 해도 그 존재감이 숨겨지지 않는다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애초에 숨기질 않았다.

사실 발할라의 수뇌부들도 로만 드미트리가 초청을 허락하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만큼 바르보사를 상대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대담하게 발할라행을 택했다.

그로 인해.

수뇌부는, 이런 말을 전해 왔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 제국의 명성을 드높이는 희생양으로 삼을 존재다. 그가 본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발할라가 어떤 곳인지 확실히 보여 주어라. 드미트리와 같은 우물 안과는 다르다는 것을. 온갖 고생을 하면서 수도에 도착한다면, 대결을 치르기도 전에 기가 꺾이겠지.”

그런 이유로.

안내인을 보내지 않았다.

발할라 사람들의 인종 차별에 고생하고 나면, 나중에야 사람을 보내서 상황을 수습하고 수도로 인도하려던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무력시위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르게 해결해야만 했다.

파울로 남작이 말했다.

“야인(野人)들을 불러들여라. 내 직접, 로만 드미트리에게 발할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 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집무실을 나서는 파울로 남작.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터질 듯한 분노를 표출했다.

* * *

“크윽.”

“……으으.”

사람들이 신음했다.

벌써 십수 명이었다.

호기롭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앞선 차례가 항복을 외친 것을 비웃었던 모습이 쪽팔릴 정도로 허무하게 당해 버렸다.

정신을 잃지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되는 폭력.

세간의 사람들이 ‘강철’과도 같다고 평가하던 발할라의 정신이, 무력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 버렸다.

그런데도.

도전은 계속되었다.

악착같이 버티는 상대의 입에서 항복이 흘러나왔을 때, 파울로 남작이 병력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오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엉망이 되어 버린 얼굴로 쓰러진 사람들보다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충격 받은 표정이 파울로 남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그간 믿었던 발할라의 긍지가 완전히 꺾여 버린 느낌이었다.

발할라의 사람들은 절대 항복을 외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눈앞의 광경은 너무 처참했다.

파울로 남작이, 다그치며 물었다.

“로만 드미트리. 당신은 외지인이며, 발할라의 손님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행패를 부리는 것입니까? 만약 정당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신을 처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당한 이유라. 저는, 발할라가 이런 상황을 원하는 줄 알았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였다.

그는 십수 명의 전사들을 상대하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로 파울로 남작을 바라보았다.

“저는 바르보사의 상대로 초대된 손님입니다. 파울로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그 사실을 밝혔고, 경비병을 통해 수도로 향하는 길의 안내를 부탁했지만, 그들은 저희를 적대적으로 대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에 들어선 이후에는 인종 차별의 연속이었습니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손님을 이리 대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더군요. 발할라는 무력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그래서, 저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를 가르쳐 주었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파울로 남작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예상을 넘어섰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사람들보다도 호전적인 존재였다.

본인에게 적합한 대우를 해 주지 않는다고, 설마 발할라의 방식으로 무력시위를 할 줄은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

일부분 이해했다.

사실 아무리 외지인이라고 할지라도 직접 초청한 상대는 그만한 대우를 할 필요가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복수의 대상이기에 특별히 배려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일련의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은 딱히 없었다.

발할라의 사람들을 처참하게 쓰러트리기는 했지만, 애초에 대결이라는 것은 발할라에서 일상처럼 벌어지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다만.

주도한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고, 발할라의 사람들이 굴욕적으로 패배했다는 게 문제였다.

‘상황을 이대로 마무리했다간, 수뇌부들에게 질책을 당할 것이 뻔하다. 다소 억지일지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에서 마음껏 날뛸 수 없도록 제한할 필요가 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렇다 할지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발할라에는, 패배자를 이렇게 짓밟으라는 법이 없습니다. 대결은 순수하게 대결의 의미를 추구할 뿐. 상대에 대한 예의가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일단 정당한 절차에 따라 조사를 받으십시오. 그 과정에서 죄가 없음이 밝혀진다면, 그때는 제가 직접 수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답이 정해진 논쟁이었다.

파울로 남작이 억지를 부리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피식 웃었다.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에게 거절할 권한은 없습니다. 이곳은, 발할라의 땅입니다.”

“발할라의 땅이라. 그렇다면 발할라의 법도대로 이번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발할라에는, 서로의 책임이 모호할 때 결투 재판을 통해 상황을 정리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결투 재판을 바랍니다. 저를 데려가 조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라면, 직접 제 손을 포박하고 끌고 가십시오. 파울로 남작님이 원하신다면, 대동하고 온 병력 전부를 동원하셔도 괜찮습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파울로 남작이 싸늘한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선을 넘었으나, 무력을 동원한 상황 정리는 그가 바라는 전개였다.

한 발 뒤로 물러나더니.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병사들은 들어라.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를 포박하라!”

* * *

결투 재판은 명확한 룰이 없다.

그때마다 부여되는 상황이 다르고, 파울로 남작은 정당하게 ‘다수의 병사’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일대 다수의 대결.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무기를 들어 살의를 드러내는 모습에도, 로만 드미트리 뒤에 도열한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해!”

훅.

창을 찔러 넣는 병사들.

로만 드미트리는 스텝을 밟으며 공격을 모두 흘려보냈고, 이전 대결과 마찬가지로 무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

그 모습에 병사들은 분노를 표출하며 더욱 격렬하게 무기를 휘둘렀지만, 그들의 공격이 실패할 때마다 강력한 충격이 병사들에게 작렬했다.

빠악.

몸에 힘이 풀렸다.

주먹질 한 번에, 병사는 눈을 뒤집으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처음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무기의 사용을 배제했다.

자신과 상대의 차이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두 손과 두 발로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 님. 발할라를, 우습게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파울로 남작이 이죽거렸다.

그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에, 병사 하나가 얼굴을 얻어맞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마치 강철을 때린 것만 같은 엄청난 반발력. 병사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더니, 그의 얼굴과 전신에서 털이 생겨났다.

“크르르르르륵.”

병사의 정체.

그는 바로 야인이었다.

몸 전체로 번져 나가는 변화에, 병사는 어느새 ‘짐승과 인간’의 모호한 경계선에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크악!”

야인이 달려들었다.

날카롭게 돋아난 발톱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할퀴었고, 같이 공격하던 병사들도 연쇄적으로 변화하며 야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변화는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존재는 늑대의 모습을, 어떤 존재는 곰의 모습을, 또 어떤 존재는 사슴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짐승의 야성을 드러냈다.

야인.

남부 밀림에서 발견한 소수 민족.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동물들의 젖을 먹으면서 자랐고, 가장 친근한 짐승의 외형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통해 진정한 야인으로 거듭났다.

발할라에서도 전투력으로는 가장 상위에 해당한다고 알려진 민족이었다.

일반 병사들의 모습을 했을 뿐, 야인 부대는 발할라의 정예였다.

득달같은 공격.

사람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인들이라면, 건방지게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곰의 형상을 한 야인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순간.

콰직.

그의 얼굴에 작렬한 주먹에, 야인의 눈동자가 풀리고 말았다.

* * *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만병지왕(萬兵之王).

검은 천마 백중혁을 대표하는 무기다.

검 하나로 백중혁은 무림을 정벌했고, 명실상부 무림 역사를 대표하는 천하제일인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다음으로 잘 사용하는 무기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백중혁이 모든 무기를 잘 다룬다면서 다양한 무기를 언급했지만, 사실 백중혁에게 검을 제외하고 익숙한 무기는 손과 발이었다.

차가운 삶의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에 있는 무기로 쓸 만한 모든 것들뿐만 아니라 손과 발을 활용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백중혁은 정점에 올랐다.

야생보다도 더 야생 같은 환경에서, 백중혁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을 손과 발로 무너트렸다.

야인의 존재.

알고 있었다.

그들의 내부에서 마나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콰직!

“……커억!”

야인의 얼굴이 뭉개졌다.

짐승의 단단한 두개골에 금이 갔고, 짐승은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충격이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곰의 형상을 한 야인은 야인 중에서도 내구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는데, 외피에 오라를 일으키고도 주먹질 한 번에 쓰러질 줄은 몰랐다.

“크르르르륵.”

“크륵, 한 번에, 크륵, 공격해!”

일촉즉발의 상황.

야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양옆에서 공격하는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발차기를 뻗어 얼굴을 박살 냈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새의 형상을 한 야인은 날개를 잡아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아 버렸다.

이번에도 단단한 내구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뼛속 깊이 박히는 고통에, 야인들은 비명을 참지 못했다.

일대 다수의 대결.

로만 드미트리가 명백히 불리한 싸움이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육체 전부가 무기인 야인들을 상대로 패배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파울로 남작이 입을 떡 벌리는 동안,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빠악.

“꾸엑.”

얼굴이 홱 돌아갔다.

그대로 고개를 떨구는 야인의 모습에, 이제 마지막 남은 야인은 들소의 형상을 한 존재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다가갔다.

“항복하겠다고 말해. 그러면, 빨리 끝내 주지.”

짜악!

뺨을 날렸다.

야인은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짐승의 성질을 타고 난 야인은, 오히려 포식자의 기세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벌벌 떨면서 로만 드미트리의 손길에 연약하게 딸려 왔고, 로만 드미트리는 그런 야인의 뺨을 계속해서 날렸다.

짜악.

짜악, 짜악.

무림에는 금강불괴(金剛不壞)가 존재한다.

강철과 같은 육체를 지닌 그들도, 천마 백중혁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는 강철을 뚫는 고통에 제발 살려 달라면서 목숨을 구걸했었다.

강철마저도 일그러트리는 폭력. 로만 드미트리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야인의 뺨을 때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짜악.

피가 튀고.

짜악.

이빨이 날아갔다.

짜악.

초점을 잃은 눈에, 야인의 야생성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압도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포식자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야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툭.

야인을 내려놓는 손길.

로만 드미트리가, 파울로 남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파울로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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