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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화 (223/615)

223화 눈 뜬 맹인들의 나라 (2)

방금의 발언.

그건 지금까지의 논쟁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론돈 백작이 세간의 소문과는 다르게 매국노가 아니고,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레드포드 왕국의 빚을 대신 해결해 주었을 수도 있다.

그것만 해도 충격적인 일이다.

무고한 병사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에서, 애나벨 보육원의 언급은 선을 넘었다.

애나벨.

그녀가 어떤 인물인가.

처음에는 집을 잃은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내어 주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돌보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냐는 사람들의 물음을 들었다.

그렇게 애나벨 보육원의 탄생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애나벨은 단순히 아이들뿐만 아니라, 굶주린 이들이 안식을 바랄 때 잠시나마 그들의 그늘이 되어 주길 망설이지 않았다.

레드포드의 성녀(聖女).

사람들은 애나벨을 떠받들었다.

일국의 왕조차 나라의 안위를 돌봐 주지 않는데, 그녀의 선행은 어둠을 비추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렇기에.

믿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론돈 백작이 애나벨 보육원의 후원자라고?”

“말도 안 돼. 매국노라고 불리던 사람이, 애나벨 보육원을 후원했을 리가 없잖아.”

사실.

애나벨 보육원의 구조는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음식을 베푸는 정도였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보육원이 베푸는 선행은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사람들도 의구심을 가지긴 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들이진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애나벨이 사람들을 위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혼란한 세상이라지만, 레드포드에도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맹목적으로 믿고 싶었다.

그런데.

매국노가 애나벨의 후원자라면.

이후에 꼬리를 무는 진실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애나벨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떠들어 대면서, 꼭 론돈 백작과 같은 매국노가 나라를 망친다는 험담을 덧붙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폭동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처음 목소리를 높인 것은 재클린이 맞지만, 상대가 론돈 백작이기에 모두가 무기를 드는 것에 동의했다.

다들 입을 다물었다.

당황한 얼굴로 갈피를 잃은 그때.

인파를 뚫고.

한 로브인이, 앞으로 나섰다.

* * *

로브를 걷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로브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그들이 ‘레드포드의 성녀’라고 말하는 애나벨이었다.

“……애나벨 님. 로만 드미트리의 저 말이 정말 사실입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 주십시오. 우리가 매국노라고 비난하던 론돈 백작이, 보육원을 후원한 적이 없다고 이 자리에서 증명해 주십시오.”

한 시민이었다.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그 말에, 애나벨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말은 전부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들고 있는 무기들을 전부 내려놓으세요.”

시민들이 망설였다.

당사자의 증언에도.

자신들의 목숨줄을 지켜 줄 무기는, 선뜻 내려놓질 못했다.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먹던 음식을 조금 나누어 주었을 뿐인데, 어느 날 론돈 백작님이 저를 직접 찾아왔어요. 그동안 제 선행(善行)을 지켜보았다면서, 보육원을 차려 사람들을 보살펴 준다면 매달 운영비를 지급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죠. 그게,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애나벨 보육원의 진실이에요.”

그녀가 착한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선행에는 그만한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단순히 인격만으로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보육원을 운영하는 일은 현실적인 문제예요. 만약 제게 사람들에게 베풀 음식을 살 돈이 없었다면. 그리고 제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다면. 저는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그간의 모습처럼 보육원 일에 헌신하지 못했을 거예요. 저 또한,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에 불과했으니까요. 사실, 그동안 론돈 백작님을 향한 비난에 진실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분은 매달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보육원에 지원금을 보내 주셨고, 매국노라고 비난받는 상황에서도 지원을 멈추지 않았어요.”

말을 할수록.

애나벨은 울먹였다.

당황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론돈 백작과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게 레드포드의 성녀라는 칭호는 너무나도 과분해요. 론돈 백작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텐데, 왜 진실을 밝히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분은 언제나 ‘누가’ 하느냐보다는 ‘누군가’라도 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씀을 하셨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론돈 백작님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는 백작님이 만류했을지라도 진실을 밝혔을 거예요. 그분은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는 분이니까. 사람들이 진실을 모를 뿐, 제가 누려 왔던 것들을 온전히 받아 마땅한 분이니까. 이건, 이건 정말 아니에요.”

사람들을 탓하고 싶진 않았다.

그들은 진실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애나벨은 책망 섞인 목소리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대단한 사람처럼 부풀렸지만, 론돈 백작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절대 없었다.

폭동이 끝나고.

아이들이 환한 얼굴로 보육원으로 달려왔다.

아이들은 저마다 손에 반짝이는 금화 하나를 보여 주며, 자신들을 돌봐 주었던 애나벨에게 받아 달라면서 해맑은 웃음을 보였다.

얼마나 따뜻한 마음인가.

금화의 출처가 론돈 백작의 피로부터 비롯되는 사실을 몰랐다면, 애나벨은 아이들의 마음에 진심으로 웃음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진실을 들었다.

세상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공격했다는 말에, 그녀는 한달음에 론돈 백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로만 드미트리는, 론돈 백작을 위해서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애나벨이 말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진실을 보지 못한 여러분도, 진실을 알고도 말하지 않은 저도. 그러니까, 더는 후회할 일을 하지 말아요. 여러분들이 매국노라고 말하던 론돈 백작님은 그 누구보다도 레드포드 왕국을 위하시는 분이고, 여기에 있는 로만 드미트리 님은 론돈 백작님의 부탁을 받아서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오셨어요. 마지막 기회예요. 그만,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사람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침묵에 빠져들었다.

* * *

정적을 깬 것은 로만 드미트리였다.

“너희들이 론돈 백작을 공격하겠다고 저택에 들이닥친 날. 나는, 론돈 백작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느냐고. 레드포드 왕국의 빈곤은 론돈 가문의 책임이 아니고, 매국노라고 불리는 것과는 다르게 왕국을 위해 많은 일을 하면서도 비난을 감수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날.

론돈 백작은 말했다.

혐오의 시대에서, 이 각박한 현실에서.

레드포드 왕국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들일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본인을 향한 비난이 사그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혐오의 시대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상대가 일개 귀족이 아니라 레드포드 왕국을 다스리는 국왕이라면. 오늘의 폭동은, 나라를 뒤엎을 봉기로 번졌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재클린을 보았다.

애나벨이 나타난 그 순간부터, 재클린은 창백한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재클린. 이번 폭동은 순전히 너의 의도였나? 골든 뱅크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화를 마차에 실은 것은 내부 관계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비밀이었는데도, 너는 마차가 이동하는 길목을 정확히 알아채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정보. 누가 말해 주었지? 그리고 정보를 말해 준 사람이, 지금도 이 자리에 존재하나?”

“……그게 무슨!”

재클린이 눈을 부릅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존재했다.

여느 날과 똑같이 불만을 토로했을 뿐인데, 호프집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폭동을 부추기는 발언으로 상황을 키웠다.

론돈 백작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하는 발언에, 재클린은 상황이 심각해질까 봐 마음을 졸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호프집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마차의 이동 경로를 말해 주었던 그는, 금화를 강탈한 순간부터 마치 신기루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 정보를 말해 준 존재는 이미 사라진 뒤겠지. 너희들은 분명히 진실을 볼 기회가 있었다. 정보의 출처가 이상하다는 사실도, 그리고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마차를 호위하는 오라 검사들을 쓰러트렸다는 사실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련의 상황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레드포드의 혼란을 주도하는 선동꾼들이 존재했고, 너희는 그들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론돈 백작은 그 누구보다도 나라를 위하는 인물이었는데도. 너희의 선택 한 번에, 무고한 병사들이 죽고 론돈 백작은 피를 흘렸다.”

진실은 가혹했다.

10만 골드의 목적.

애나벨.

그리고, 선동을 당했다는 사실까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금화를 강탈하고 기뻐했던 그 일이, 알고 보니 레드포드 왕국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멍청한 판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재클린이, 정녕 레드포드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인가.”

* * *

사고가 정지되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불과 몇 분 전.

그들은 분노했다.

론돈 백작을 공격한 것은 옳은 일이고, 레드포드의 영웅을 핍박하는 로만 드미트리를 물리치기 위해서 힘을 모았다.

광장 가득 몰려든 사람들.

굶주림에 매일 힘든 나날을 보냈던 사람들은, 손에 쥐고 있는 금화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그런데.

진실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론돈 백작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일들을 해 왔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그만 손에서 힘이 풀리고 말았다.

카앙.

쨍그랑.

무기를 떨구었다.

적의를 상실했다.

더는 무기를 들 수도, 감히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 볼 수도 없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본인들이 한 행동들을 돌아보며,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그 중심에는.

재클린이 있었다.

일련의 상황을 주도했던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선동에 당했다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로만 드미트리의 말들.

가슴에 푹푹 박혔다.

맞는 말이다.

진실을 볼 기회는 있었다.

사람들은 론돈 백작을 매국노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최대한 외부 인력을 불러들였다.

처음에는 적의에 찬 반응을 보였다.

싼값에 노동력을 착취한다고 생각했는데, 외부 인력을 대하는 태도와 대우에서 오히려 과분할 정도로 챙겨 주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이곳에서의 생활이 어떻냐는 재클린의 물음에, 론돈 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하인은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론돈 가문에서의 생활이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론돈 백작님은 사람들의 말처럼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인들을 챙겨 주고 대우해 주시는 분이고, 우리도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론돈 백작님을 어떻게 표현하든, 우리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황당한 말이었다.

세상 모두가 매국노라고 비난하는데, 론돈 가문의 하인만 다른 말을 하는 상황에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저것은 안락함의 대가이리라.

론돈의 그늘에서 굶주릴 일이 없으니, 론돈 백작이 아무리 매국노라고 한들 하인들로서는 고마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진실을 보았고.

진실을 들었고.

진실을 경험했다.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진실을 아는 존재들이 있었지만, 재클린은 그들과는 달리 진실을 외면했다.

파티에 참석한 날.

아내에게 먹일 음식을 챙기고도, 호프집을 찾아간 그는 불만을 토로했다.

어쩌면 그것은,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순간.

“……아아.”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는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던 붉은 흔적이, 눈에 콱 박히면서 주변을 와르르 무너트렸다.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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