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론돈 백작 (4)
이른 아침.
론돈 백작은 곧바로 마차에 몸을 실었다.
골든 뱅크와의 만남은 같은 도시 안에서 예정되어 있지만, 10만 골드의 금화를 도보로 옮길 수는 없었다.
울퉁불퉁한 땅을 지날 때마다 마차가 들썩였다.
나라의 예산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다 보니, 수도인데도 불구하고 레드포드는 어느 시골의 도시처럼 환경이 좋지 못했다.
마차 안.
론돈 백작은 금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론돈의 땅과 가보를 걸면서까지 힘겹게 얻은 돈은, 나라의 위기를 넘기는 일에 사용될 것이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론돈 백작을 미쳤다고 말했다.
나라의 현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사태를 관망한다면, 론돈 백작은 레드포드의 존망(存亡)과는 상관없이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크로노스 제국은 변절자들에게 관대하다.
나라를 배신하고 제국을 위해 살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지금처럼 힘들게 살아갈 필요가 없다.
본인도 알았다.
장사꾼들은 이해타산에 밝았지만, 세상에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존재했다.
‘골든 뱅크의 빚은 시작일 뿐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레드포드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빚을 청산하면.
국왕을 찾아갈 것이다.
만약 이번에도 나라를 위한 선택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반역도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뒤엎을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반란에 대한 생각을 억눌렀다.
하지만 며칠 전에, 이번 일과 관련해서 국왕의 후계자인 왕자의 동의를 받았다.
“론돈 백작님. 이 나라는 벼랑 끝에 몰렸습니다. 제 아버지의 통치가 이 나라의 몰락으로 직결된다면, 나라를 물려받을 의무를 타고난 저로서는 레드포드를 위한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사실.
레드포드의 국왕은 처음부터 막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도박 중독이라는 일탈에 빠져들기 전에, 레드포드 국왕은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왕이었다.
사람들은 레드포드 국왕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랐지만, 몇 년 전에 그의 정신을 무너트리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국왕이 낳은 세 명의 자식.
이남 일녀 중에 장남이 승마를 연습하는 도중에 낙마 사고로 사망했고, 얼마 뒤에 막내딸이 장남의 죽음에 힘들어하다가 목을 매달았다.
연달아 벌어진 사고.
국왕은 절망에 빠졌다.
매일 술에 찌들어 살던 그는, 도박판에 발을 들이면서 삶의 낙을 찾았다.
돈을 벌어들일 때의 쾌락.
자식을 잃은 슬픔을 날려 버리는 강렬한 자극은, 레드포드 국왕으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론돈 백작은 끝까지 국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매국노들에 의해 나라가 엉망이 될 것이라는 상황적인 이유를 떠나서, 레드포드 국왕에게 칼을 들이미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드미트리 가문의 돈을 빌리면서까지 골든 뱅크의 빚을 해결한 지금, 마지막 기회마저도 새로운 빚더미로 날려 버린다면 레드포드는 정말로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반란.
착잡했다.
한때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그때였다.
덜그럭, 덜그럭.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더니,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차를 보호하라!”
“공격해!”
기사의 외침.
마차 밖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 * *
넓은 도로.
아직은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한산한 시간에, 골목길 곳곳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와 일제히 달려들었다.
“공격해!”
“저 안에 금화가 있다!”
무려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
그들이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허름한 행색에 들고 있는 무기도 상당히 조잡했지만, 시야를 가득 메우는 그들의 머릿수는 론돈 가문의 병사들을 당황하게 했다.
병사들이 황급히 방패를 들었다.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붙였지만, 그들로서는 레드포드 수도 한복판에서 공격을 당하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바로 코앞에서 열기를 뿜어내는 그들의 모습에, 론돈 가문의 기사가 오라를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콰르르르르릉.
“마차를 보호하라!”
“공격해!”
전투의 시작이었다.
병사들이 사람들을 맞닥트리자마자, 수십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가죽 갑옷조차도 착용하지 못한 허름한 행색이었다.
병사들의 창칼은 나풀거리는 옷을 베어 버리며 단번에 상대의 목숨을 취했지만, 사람들은 광기 어린 얼굴로 시체를 짓밟으며 달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퍽-
팔이 날아갔다.
어떤 이는 목이 베였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상황에, 어떤 사람이 마침내 한 병사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푸확.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피.
주변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머릿수를 이겨 내지 못한 병사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고, 론돈 가문의 기사들은 이를 악물며 적극적으로 무력을 발휘했다.
상대는 겨우 일반인이다.
오라 검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건만,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푹.
“……?!”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목에 박힌 가시.
누군가가 발사한 것이었다.
사람들 틈에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가 섞였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미 희미해진 정신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몸이 비틀거렸다.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도 검을 휘두르며 적을 베어 내던 기사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사람들에 의해 얼굴에서 피가 튀고 전신이 난도질을 당했다.
털썩.
기사의 죽음.
패색이 짙어졌다.
마차 밖의 상황을 확인한 론돈 백작은, 창백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당장 멈추어라! 마차의 재물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돈이다! 너희들이 레드포드의 백성이라면, 우리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 제발, 제발 멈추어다오! 이 돈을 강탈해 간다면, 레드포드의 미래는 없다!”
상대의 목적.
돈임을 직감했다.
론돈 백작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순간.
퍽.
비틀.
세상이 뒤흔들렸다.
론돈 백작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뒤통수에서부터 피가 흘렀다.
점점 옅어져 가는 현실감에, 자신을 공격한 사람의 얼굴을 힘겹게 확인했다.
“마차 안을 확인해 봐!”
“금화야! 금화가 있다고!”
기쁨에 소리치는 사람들.
그중.
재클린이 있었다.
처음에는 바늘 도둑에 불과했던 그가, 대담하게 수도 한복판에서 론돈 가문의 마차를 공격했다.
“……제, 제발.”
더는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람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잦아들어 가는 목소리는 흥분한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문득.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떠올랐다.
골든 뱅크와의 만남은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자, 로만 드미트리는 10만 골드의 금화 상자를 넘기며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백작님은 손을 써야 할 때, 관용을 베푸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저택을 공격한 사람들이 어떠한 사연을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론돈이라는 가문이, 레드포드 왕국이. 생각보다 높지 않은 벽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때부터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외면했다.
적어도 이 나라가, 그렇게까지 나락으로 처박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차가운 바닥에서 숨을 헐떡였다.
금화를 챙기는 재클린을 바라보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만 벙끗거렸다.
그렇게.
희미해지는 정신에, 론돈 백작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이번 공격.
호프집 주인의 정보로부터 비롯되었다.
“재클린. 내일 아침 일찍, 론돈 가문이 나라의 재산을 빼돌리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어. 론돈 가문에서 일하는 하인이 말해 준 정보인데, 레드포드가 몰락할 것을 대비해서 재산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려는 속셈이겠지. 드미트리와 만난 것도 그의 연장선이야. 크로노스 제국이 아니라, 드미트리 공국으로 망명(亡命)을 떠날 생각이 분명해.”
그 말에.
재클린은 분노했다.
레드포드의 사람들은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쓸 방법이 없는데, 레드포드 제일의 대부호라는 사람은 도망칠 생각부터 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론돈 가문이 다른 사람들을 무너트리면서 벌어들인 돈은, 적어도 이 나라를 위해 다시 빼앗아 올 필요가 있었다.
“더러운 매국노 새끼. 우리는 더는, 매국노의 만행을 방관할 수 없어.”
지난 사건.
론돈 백작은 한발 물러났다.
조잡한 농기구를 들이댔는데도, 순순히 타협을 말하는 태도는 재클린의 마음에 자신감을 심었다.
그렇게 마차를 털었다.
장소를 옮겨 금화 상자를 확인한 재클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대체 얼마야?”
“적어도 수만 골드는 넘겠는데?”
순간.
화가 났다.
수만 골드면 수많은 사람이 최소 일 년은 생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인데, 론돈 백작은 이런 막대한 거금을 빼돌리려 했다.
자신의 판단은 옳았다.
레드포드 백성들의 피와 땀이 녹아들어 있는 이 돈이, 쓰레기 같은 매국노를 위해 사용되는 것은 세상의 정의와는 부합하지 않았다.
그는 광장으로 향했다.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모두 이곳으로 모이십시오! 지금부터 매국노 론돈 백작에게서 강탈한 금화를 하나씩 나눠 드리겠습니다!”
재클린.
그는 자신을 일반적인 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의적(義賊).
악인에게서 빼앗은 돈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주는 존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금화라는 말에, 먹지 못해 앙상한 얼굴의 사람들은 어디서 힘이 났는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들에게 금화를 나누어 주었다.
하나씩, 하나씩.
빠르게 줄어드는 금화 상자를 바라보며, 재클린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때만 해도.
재클린은, 본인이 정말 올바른 일을 행한다고 굳게 믿었다.
* * *
째깍째깍.
시간이 흘렀다.
만남을 약속했던 9시가 넘도록 론돈 백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한 사내가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재무관님. 골든 뱅크는 나름대로 레드포드 왕국의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왕 폐하의 말을 믿고 거금을 빌려주었고, 이자를 일부분 면제해 주었으며, 지금까지 원금 상환은커녕 이자조차 갚지 않는 모습에도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록, 어째서 론돈 백작은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
골든 뱅크 소속.
집행관(執行官)이었다.
말 한마디에 레드포드를 나락으로 빠트릴 수 있는 권력자였고, 그렇기에 재무관은 다급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론돈 백작님은 시간 약속을 어길 분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곳으로 오는 길에 무슨 일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팍.
서류를 내던졌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서류에, 재무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집행관이 말했다.
“우리도 레드포드에서 론돈 백작의 평판을 모르지 않습니다. 잔인한 장사 수완으로 주변 사람들을 무너트리고, 본인의 잇속을 챙기는 그런 인물이라는 평판이 파다하지요. 그렇다 할지라도 골든 뱅크는 평판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와의 관계가 원만했다면, 집행관의 개인 역량으로 재무관님의 말을 믿고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동안 론돈 백작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레드포드를 대표해 이번 일을 맡아 놓고 돈을 갚을 시기를 차일피일 미루어 왔고, 만남을 약속한 오늘에는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신뢰란 한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재무관님의 말보다는, 론돈 백작이 레드포드를 버리고 제 살길을 찾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군요.”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곳에서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지금부터 골든 뱅크는 ‘레드포드 왕국’을 악성 채무자로 분류하겠습니다. 채무 상환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이른 시일 내로 국제사회에 이번 문제를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지, 집행관님!”
확.
걸음을 돌렸다.
그를 따라가는 수행원들의 모습에, 재무관은 다급하게 일어나서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드미트리 공국의 후계자, 로만 드미트리 님이 입장하십니다.”
문 너머.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활짝 열리는 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