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론돈 백작 (2)
1급 암살 대상.
그들의 존재는 왕국 연합의 약점이었다.
움베르토 왕국의 드레이크 가문은 나라를 지탱하는 군부의 핵심이라면, 레드포드 왕국의 론돈 백작은 그야말로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순간.
어떻게든 막아 내고 있었던 레드포드의 부채가, 빠르게 왕국을 몰락의 길로 빠트릴 것이다.
벼랑 끝.
론돈 백작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일면식 하나 없는 사람을 찾아와, 대부호라 불리는 거물인데도 고개를 숙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골든 뱅크의 부채는 시작일 뿐이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레드포드를 압박하기 시작한다면, 레드포드에 빚을 받아 낼 사람들도 덩달아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나라의 몰락은 채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나라의 기둥까지 뜯겨 나가기 전에, 뭐라도 하나 건지려고 열을 올리겠지.’
왕국.
그 거대한 땅덩어리를 론돈이라는 기둥 하나가 버텨 냈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기둥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넋을 잃은 상대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론돈 백작님의 말씀처럼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담보는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저나, 론돈 백작님은 이번 거래가 드미트리에 그리 득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십시오. 카이로가 크로노스의 잔재를 물리치고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레드포드 또한 어떻게든 버텨 내십시오.”
10만 골드.
단순한 선의(善意)가 아니다.
대륙의 균형을 위해, 레드포드의 시간을 샀다.
그들이 버티면 버틸수록, 드미트리가 준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이었다.
순간.
론돈 백작은 말을 잃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외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설마 드미트리 가문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간 친근한 관계를 맺어 왔던 존재들.
그들조차도 차가운 얼굴로 레드포드의 위기를 등졌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말한 바를 이해하고 선뜻 손을 내밀었다.
물론, 그 또한 진실을 알았다.
레드포드의 몰락은 전쟁을 앞당기는 신호탄일 테고,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속내를 아는데도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사실 지난 며칠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면서, 론돈 백작은 이대로 레드포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자신의 아버지.
항상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답은 생긴다고 말했다.
진짜 끝은.
고개를 숙였을 때부터였다.
더는 방법이 없다고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지 못했을 때,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다면서 아버지는 론돈 백작의 마음에 단단한 무언가를 심어 주었다.
어렸을 적에는 가문의 부유함을 흥청망청 누리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짐을 물려받고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오늘을 잊지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레드포드의 위기를 이겨 내고, 저희에게 손을 내밀어 준 드미트리 가문의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마지막 기회.
론돈 백작은, 기회의 끈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 * *
채무 상환 5일 전.
레드포드로 돌아온 론돈 백작은, 빠르게 골든 뱅크와의 일을 준비했다.
돈은 준비되었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골든 뱅크의 일을 해결하고 자력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문제들도 차례로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생(自生)이었다.
언제까지고 외부의 힘으로 버틸 수는 없기에, 론돈 가문이 진행하는 사업을 확장하고 정당하게 돈을 벌어들일 방법을 다각도로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드미트리는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그들과의 상업적인 협력은, 레드포드의 자원을 원활하게 수출하는 통로를 열어 주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로만 드미트리는 레드포드를 방문했다.
약속했던 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고, 겸사겸사 레드포드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자 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어서 오십시오!”
로만의 방문에.
론돈 백작은 방긋 웃었다.
처음에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버선발로 나와 환대할 만큼 레드포드와 론돈의 귀중한 손님이 되었다.
저택의 문을 활짝 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위한 파티를 마련했고,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클래식 음악과 산해진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일행분들과 편히 이 자리를 즐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레드포드는 자국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론돈 백작의 존재를 더는 용납할 수 없겠지. 그들은 분명히 1급 암살 대상을 척결하려 할 것이다.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골든 뱅크와의 협상 전에 한 번은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이번 방문.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면 처음 만난 날에 주었거나 수하를 보내면 됐지만, 일부러 레드포드를 방문했다.
협상을 진행하는 그날까지라도.
론돈 백작의 안전을 지켜 줄 생각이었다.
만약 협상 전에 암살을 당한다면,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레드포드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크리스.”
“예.”
“론돈 가문의 저택 구조를 파악해 두거라.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다면, 론돈 백작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알겠습니다.”
한 발 물러나는 크리스.
그는 이번에 대동한 병력을 이끌고 파티장 밖으로 사라졌고, 로만 드미트리는 샴페인의 향기를 음미했다.
폭풍전야(暴風前夜)였다.
레드포드의 사람들은 앞으로의 밝은 미래에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턱밑에는 크로노스 제국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레드포드.
그리고 론돈.
그들은 활용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이번 위기만 넘기고 정상궤도에 오른다면, 그들은 왕국 연합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론돈 백작의 표정과 그 눈빛.
도와줄 가치가 있었다.
먼 걸음을 이동한 이유는, 앞으로의 혼란에 확실한 우방국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파티장 한편.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점점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 * *
그날 저녁.
허름한 호프집을 찾은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쾅!
“개 같은 귀족 새끼들. 나라가 이렇게 힘든데, 값비싼 음식들을 늘어놓고 웃으면서 파티를 벌이다니.”
하인, 재클린이었다.
이번 파티.
상당히 과했다.
론돈 백작은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최고의 파티를 준비했고, 파티장에 마련되어 있던 음식이나 주류는 정말 엄청난 가격대를 자랑했다.
재클린은 파티를 위해서 잠시 외부에서 불러들인 인력이었다.
드미트리와 론돈의 속사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쫄쫄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자니 속이 완전히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재클린, 무슨 일이야?”
호프집 주인이었다.
평소에 재클린과 마찬가지로 신세 한탄이 잦았던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재클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긴. 이번에 론돈 가문의 파티에 일하러 갔는데, 웬만한 평민들 수년은 먹고 살 음식들을 깔아 놓고 하하호호 웃으며 파티를 벌이더라고. 이게 말이 돼? 레드포드 왕실은 매번 나라가 힘들다면서 세금을 강제하고 우리를 핍박하는데, 귀족들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잖아!”
맥주를 들이켰다.
차가운 맥주를 들이부었는데도, 뜨거운 속은 가라앉질 않았다.
“그리고 뭐? 드미트리 가문과의 화합을 축하하는 자리라고? 좆 까라고 그래! 론돈 백작이 수도의 사업들을 집어삼키면서, 정말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어. 그렇다고 그 녀석이 나라를 위해 하는 게 뭐가 있어? 돈만 밝히는 욕심쟁이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와 붙어먹고 웃는 모습을 보니까 속이 뒤집히더라고.”
“귀족들이 그렇지. 언제 그 녀석들이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긴 했어?”
“그래도 정도가 있잖아. 나라가 힘들면,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부터 챙기는 게 맞잖아.”
주인의 맞장구에.
분노를 더욱 표출했다.
재클린이 목소리를 높이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그들도 재클린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매국노가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론돈 백작은 나라의 재산을 끌어모아서, 드미트리 같은 녀석들에게 재산을 퍼 주는 매국을 저지르고 있어. 우리가 대체 언제까지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 있어야 해? 이렇게 있다가는, 크로노스 제국이 아니라 굶주림에 죽어 나갈 것이 뻔하다고.”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발언이 선을 넘어섰고, 재클린의 눈빛에 살의가 넘실거렸다.
그때.
호프집의 주인은, 직원에게 문을 잠그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클린. 네 말처럼, 이대로라면 우리는 굶주려 죽을 것이 분명해. 당장 네 아내도 셋째를 낳았는데, 먹질 못해서 모유가 나오질 않는다며. 이럴 바에는 이 상황을 뒤집어 버리자. 론돈 백작의 저택을 털어서 재물을 훔치고 레드포드를 떠난다면, 우리는 굶주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그, 그게 무슨.”
재클린이 당황했다.
분노하긴 했어도, 귀족을 공격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모여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동조하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재클린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에 동화되었다.
“그래, 씨발. 우리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우리의 뜻에 동조할 사람들을 불러모으자고. 그리고 론돈 백작을 찾아가,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거야.”
처음에는 작은 불만이었던 것이.
거센 불길에 휩싸여,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 * *
화륵.
화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횃불이 밤길을 밝히며, 일련의 사람들이 론돈 백작의 저택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찰그락, 찰그락.
그들의 무기가 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그럴듯한 병장기가 아니라, 대부분 농사에 사용하는 낫과 같은 농기구였다.
이윽고.
거대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순간 당황한 얼굴로 무기를 치켜들었다.
“멈춰라!”
“더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외부 경비병은 겨우 두 명.
평민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재클린이 목소리를 높이자 수백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것은 시각적으로 경비병들을 압도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경비병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기를 겨누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들이 제발 공격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자.
재클린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지금 당장 론돈 백작을 불러라!”
“그분은 너희가 함부로 나오라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함부로? 개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론돈 백작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야. 레드포드의 백성들은 굶주림에 배를 움켜쥐고, 모유를 짜내야 하는 아내에게 먹일 빵도 하나 없는데, 외부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호화스러운 파티를 벌였지. 너희가 파티에 쓴 돈을 우리에게 베풀었다면, 우리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은 넘도록 따뜻한 밤을 보냈을 거야. 그러니까 당장 론돈 백작을 불러. 직접 보고, 무엇이 옳은지를 말해 줘야겠으니까.”
살의가 넘실거렸다.
원래의 계획은.
경비병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양심은 그만한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재클린은 론돈 백작을 불러들여 대화하는 것을 택했고, 평민의 신분으로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힘을 동반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처음에는 귀족 가문을 찾아가겠다는 말에 당황하던 사람들이, 그간의 일을 전해 듣고는 하나같이 분노를 표출했다.
레드포드.
빈민(貧民)들이 들끓는 나라다.
거리에만 나가도 거지들이 널린 이곳에, 더는 부유한 귀족들의 삶을 방관할 인내는 허락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재클린이 이를 악물었다.
만약 상황이 틀어진다면.
일말의 양심조차 무너지고, 경비병들의 목에 낫을 박아 넣을 것이다.
그때였다.
끼익.
문이 열렸다.
론돈 백작일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로만 드미트리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