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운명의 수레바퀴 (3)
일주일 전.
플로라 로렌스는 카이로스에 머무는 동안, 한때 자신을 가르쳤던 전술 교수와 시간을 보냈다.
탁.
폰(pawn)의 일보전진.
공격적으로 압박을 시도한 플로라 로렌스는, 체스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카이로스에서 전투가 벌어진 직후, 로만 드미트리는 반란군을 처단하겠다는 명분으로 베네딕트 성으로 향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반란을 빠르게 정리하는 판단이 되었지만, 사실 그 판단에는 위험 요소가 많았습니다. 일단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를 반란군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제국파의 수장을 포박한 건 과감하면서도 매우 위험한 판단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제국파가 내란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효과를 보이겠지만, 베네딕트 성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길어졌다면 분명히 제국파는 내란에 개입했을 겁니다.”
일종의 복기(復棋)였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일련의 상황들을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결과를 보고 과정이 옳았다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 낸 과정을 다시 한번 분석했다.
교수가 폰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 또한, 안경 안으로 보이는 시선은 체스판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단 3일. 그 정도만 시간이 지체되었어도, 카이로의 내란은 지금과는 다른 양상으로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은 과감하면서도 확실한 근거를 갖추었다. 그는 반란군이 예상하지 못한 ‘피닉스 마탑’이라는 무기를 확보했고, 베네딕트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판단하에 일부러 성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명확했다. 적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허락했다간 전쟁이 장기화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일부러 그들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선택지를 강요한 것이지.”
탁.
나이트(Knight)로 반격을 시도.
안경을 올리며, 플로라를 슬쩍 살폈다.
“무모함과 과감함은 한 끗 차이다. 크로노스 제국이 개입하고도 흔들리지 않고 계획을 속행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본인의 계획에 확신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획의 성패를 갈랐다. 베네딕트의 반란군은 보유한 전력보다 허무할 정도로 일찍 무너지고 말았지.”
“그렇다면 성문을 연 판단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이로가 당하지만 않는다는 선례를 보여 주기 위한 결단이라고는 하나, 실패로 인한 대가는 매우 치명적입니다. 이미 반란군을 정리해서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굳이 서부 전선을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위험한 선택임에는 나도 동의한다. 성문 밖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이전의 승리는 의미가 없어졌겠지.”
말들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전술을 분석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은 강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구스타보 기사단장과 같은 변수를 본인이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 게다가 크로노스의 전력은 왕국 연합과의 분란으로 가늠하기 쉬운 상황이었기에, 힘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반란군을 제압할 때보다도 변수는 크지 않다.”
탁.
교수의 말들이 플로라 로렌스를 압박했다.
처음에는 불리했으나, 어느새 상대를 잡아먹는 형태를 취했다.
“플로라. 이번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로만 드미트리의 과감한 판단이 빛을 발했다. 그것은 단언컨대 책으로는 습득할 수 없는 경험의 영역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노련하게 전쟁을 자신이 의도하는 바로 이끌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의 행보다. 결과론적으로 따져 보자면 모든 것이 묘수(妙手)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던 위험한 판단들이었다. 이번 전쟁은 전술의 완성도를 떠나, 로만 드미트리의 개인 역량으로 만들어 낸 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탁.
퀸(Queen)의 전진.
상대를 궁지에 몰았다.
“체크메이트(checkmate).”
적의 말로 둘러싸인 판국에, 플로라 로렌스는 왕을 눕힘으로써 본인의 패배를 인정했다.
* * *
홀로 남은 공간.
플로라 로렌스는 체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술 교수와의 승률은 반반이었는데, 로만 드미트리의 전술을 분석하느라고 체스에 집중하지 못했다.
“……책으로는 습득할 수 없는 영역이라니.”
교수의 말.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플로라 로렌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삶을 모르지 않았다.
한때는 본인의 배우자로 맞이하려던 사람이기에, 주변을 수소문해서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았다.
교수가 말하는 경험의 근거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전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계기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갑작스럽게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재능의 영역이라는 건가.”
그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
바르코와의 전투에서부터 남부 전선, 그리고 동북쪽 일대의 분란까지.
플로라 로렌스는 카이로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슈들을, 전술적인 공부를 위한 교본으로 삼았다.
소름이 돋았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해낸 일들에 단순히 감탄하는 정도였다면, 시야가 트일수록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루어 냈는지가 보였다.
특히 남부 전선에서의 행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다.
에드윈 헥토르가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려 한다는 의도를 간파하고 순간적으로 판단한 조치들은, 결국 카이로 왕국이 남부 전선을 되찾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동안 플로라 로렌스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위인들의 전술을 공부하면서, 로만 드미트리가 그들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떻게 목숨이 걸린 전장에서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걸까. 전쟁이 끝나고 보면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확신이 있지만, 그때 당시에 나는 그와 같은 결정을 하지 못했을 거야.’
그녀 또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다니엘 카이로가 진급을 약속하면서 서부 전선에 남을지 고민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와의 일은 그녀를 크나큰 혼란에 빠트렸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서부 전선으로 향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에서는 그곳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지난 일들을 되돌아볼수록.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가 보였다.
‘인간관계를 배제하고,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한 최선을 택하자.’
그렇다면.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파티 당일.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플로라 로렌스는 아버지를 마주했다.
“플로라. 이만 가문으로 돌아와라.”
로렌스 자작.
그는 술을 마셔서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그동안 억눌렀던 진심을 말했다.
“처음에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지원해 주고 싶었다. 네게 가문의 짐을 짊어지게 한 것은 아비로서 너무나도 무책임한 결정이었고, 전술을 공부하겠다는 이유를 모르지 않기에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런데, 크로노스 제국이 국경을 침범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불안한 시간을 보내는지 아니? 혹시라도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이 아비는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다.”
서부 전선.
사람들은 그곳을 사선(死線)이라고 부른다.
남들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장소이건만, 플로라 로렌스는 당당하게 본인의 의지로 서부를 택했다.
마음이 타들어 갔다.
전장에서 여자의 몸으로 버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로렌스의 금지옥엽이 고생하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면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서 악착같이 드미트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로렌스만의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플로라를 보았다.
아비로서, 그녀를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말리지는 않겠다. 정략결혼을 강요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귀족 가문의 여식들처럼 살아가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다만. 이 아비가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만 있어 다오.”
진심을 말했다.
플로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온실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 저는 서부 전선에서 많은 일을 경험했어요. 로렌스에서 지낼 때는 동북쪽 일대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동북쪽 일대. 아니, 카이로는. 샐러맨더 대륙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해요. 크로노스 제국이 마음을 먹고 전쟁을 선포하는 순간, 우리는 그동안 살았던 터전이 불타오르고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온실 속의 화초.
제한된 환경에서는 좋은 것만 보고 자랐다.
그때처럼 살았다면 눈과 귀를 막고 현실을 외면했겠지만, 현재의 플로라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이 세상.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는, 평화가 그리 오래가지 않음을 암시했다.
“전쟁은 이미 현실이 되었어요.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그널은, 그것을 외면한다고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임을 말해 주고 있어요. 아버지. 그때가 된다면 로렌스는 어떻게 행동할 건가요? 바르코와의 전투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해서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빌렸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그때처럼 기댈 세력을 찾을 수 없어요. 크로노스 제국은 대륙 정벌을 바라기에. 그들에게 반하는 세력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겠죠.”
현실을 직시했다.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다가올 시련에서.
플로라 로렌스는, 스스로가 무언가를 하길 바랐다.
“그러니까, 저는 그때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 발전할 필요가 있어요.”
“플로라…….”
카이로스를 떠나며.
이미 결단을 내렸다.
플로라 로렌스는, 안타까운 눈빛을 보이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 드미트리 군(軍)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 * *
다음 날.
아직 파티의 여파가 가라앉지도 않았을 그때, 드미트리를 들썩이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했다.
플로라 로렌스의 방문.
크리스는, 그녀를 마주하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드미트리 군에 참모로 들어오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예, 맞아요.”
당돌한 발언이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플로라 로렌스는 말을 덧붙였다.
“제가 바라는 건 로만 드미트리 님의 직속 군대예요.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 참모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할 테고, 서부 전선에서 전쟁을 경험한 저라면 드미트리 가문에도 필요한 인재라고 확신해요.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 대우해 달라고 말할 생각은 없어요. 저를 참모로서 유용하게 사용해 준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 드미트리를 위해 헌신할 생각이에요.”
크리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
플로라의 거취는 본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기에, 조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미트리 군에 들어오는 것은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주군에게 보고해서 의향을 전달해 드릴 수는 있지만, 당신을 받아 준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알겠어요.”
플로라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크리스는 걸음을 돌렸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는데, 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플로라 로렌스는 유용한 자원이다. 참모로서 받아들인다면, 분명히 제 역할을 해내겠지.”
서부에서의 전투.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크로노스의 공격에 자칫 잘못했으면 서부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빠르게 마법사부터 처리한 판단은 카이로를 유리한 고지로 이끌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덕분에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수월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고, 한때는 그리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보았던 플로라 로렌스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편견은 없었다.
지난 과거가 있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판단했다.
현재의 플로라 로렌스는.
유용한 인물임이 확실했다.
게다가 동북쪽 일대 출신이기에, 한정된 인력에서 그만한 자원을 찾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드미트리 군에 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플로라에게 전해라. 앞으로 일주일. 훈련 스케줄에 합류해서 본인이 드미트리 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때 정식으로 받아 주겠다고.”
“알겠습니다.”
크리스가 명을 받들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크리스.
일반적인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승낙의 의미로 보이겠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사실상 거절하겠다는 의미인가.”
드미트리의 훈련.
아마도, 플로라 로렌스가 버텨 내기에는 조금 고된 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