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드미트리 공국 (5)
왕국 연합.
샐러맨더 대륙 남서부에 있는 네 개의 왕국을 말하는데, 지리적으로 크로노스 제국과 발할라 제국과 국경을 마주한 그들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왕국 연합’을 창설했다.
그들은 카이로와 마찬가지로 항상 제국과 관련한 이슈에 예민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도 내부적으로 잘 뭉쳐 있다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말하길 제국의 위협이 없었다면 그들은 절대 타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과 기름.
생존을 위해 뭉친 연합.
그들은, 본능적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알아챘다.
드미트리 공국 선포식 며칠 전.
움베르토 왕실에서는, 베르디 백작의 주도하에 회의가 진행되었다.
“국왕 폐하. 이번에 벌어진 카이로의 내란은, 샐러맨더 대륙 역사상 단 한 번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그동안 제국의 만행에 분노해서 복수하는 사건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마무리마저 깔끔한 적은 없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담하게 성문을 열고 나가 파비오 백작과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죽였고, 제국의 분노를 대비해 저희 왕국 연합을 끌어들였습니다. 그것은 무력뿐만 아니라, 머리를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행보가 대륙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로만 드미트리가 하는 모든 일을 주목했다.
“크로노스 제국의 만행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왕국 연합의 힘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움베르토 왕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때마침 그는 미혼의 상태입니다. 왕녀님과 그의 혼인을 진행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움베르토의 미래는 안전할 것입니다.”
“베르디 백작. 왕녀는 지금 흠모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대륙의 정세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드미트리 공국이 이번 전쟁에서 보여 준 저력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얼마큼 성장할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나아가, 드미트리 공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파혼.
유일한 흠이다.
과거에는 그것을 문제 삼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흠으로 보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쓰러트렸고, 드미트리 공국의 후계자이며, 이번 전쟁으로 피닉스 마탑마저도 드미트리 소속이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대륙 최대 규모의 철광산을 보유한 대부호이기도 하기에, 그들은 재력마저 갖춘 그야말로 완벽한 우방국이었다.
군침이 흘렀다.
베르디 백작의 강력한 주장에, 움베르토 국왕은 말했다.
“알겠다. 이번 일의 전권을 일임할 테니,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와의 혼사를 성사시키거라.”
“명을 받듭니다.”
그런데.
다른 왕국들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왕국 연합의 레드포드, 오델리아 왕국.
프랑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에서도 똑같은 얘기가 거론되었다.
그렇기에.
드미트리의 파티에서 서로의 의도를 파악한 지금, 그들은 본능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 * *
이번에도 선수(先手)는 베르디 백작이었다.
다른 왕국 대표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로메로 공작을 향해 몸을 틀면서 노골적으로 말했다.
“이게 참. 괜히 자랑하는 것 같아서 자제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드미트리 공작님. 움베르토 왕녀님은 움베르토 제일의 미녀라 불리며, 명문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미모와 지혜를 모두 갖추신 분입니다. 사실 여러 왕국에서 움베르토 왕녀님과의 혼사를 바랐지만, 움베르토 국왕 폐하가 딸을 내줄 수 없다면서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허언이 아니다.
실제로 움베르토 왕녀는 많은 남정네의 관심을 받았고, 사실상 골라서 결혼해도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움베르토 국왕 폐하도 로만 드미트리 정도 되는 남자라면 두 팔을 벌려 반긴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지 않습니까? 움베르토 최고의 여인과 드미트리 최고의 사내가 결혼을 한다니. 이는,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고 확신합니다.”
왕녀를 칭찬한 직후.
로만 드미트리를 동급으로 올렸다.
상대의 마음을 녹이는 화법에, 베르디 백작은 반드시 먹힌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베르디 백작님. 움베르토 왕녀님의 명성이야 익히 들었지만, 그분은 따로 흠모하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남작 가문의 사내와 종종 만나면서 미래를 얘기한다던데, 그에 관해서는 얘기가 끝난 부분입니까?”
링고 자작이었다.
그가 비밀로 묻어 두었던 부분을 언급하자, 베르디 백작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소문입니다.”
“에이, 공공연한 사실인데 뭘 그렇게 부정하십니까? 드미트리 공작님. 짝이 있는 사람은, 그 짝과 어울려야 행복한 법입니다. 혹시라도 어떤 여인을 원하는지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제가 왕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명문 가문 여식들의 리스트를 뽑아 오겠습니다. 파혼과 관련한 문제는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링고 자작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베르디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자, 이번에는 마르텐 후작이 말했다.
“다들 적당히들 좀 하십시오. 드미트리의 혼사는 저희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드미트리 공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고, 그렇기에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막말로. 드미트리 공국과 어울리는 나라는 저희 오델리아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움베르토나 레드포드는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데, 드미트리 공국과의 혼사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선을 넘었다.
역린(逆鱗)을 건드린 상황에, 여유로운 표정을 보이던 링고 자작마저도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좋은 자리에서 갑자기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마르텐 후작님. 그동안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무례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당장 사과하십시오!”
“사과는 무슨 사과! 드미트리 공작님은 아무 말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혼사를 강요하는 당신들이야말로 무례합니다!”
난리가 났다.
세간의 소문대로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뭉쳤을 뿐, 물과 기름처럼 그리 어울리는 사이가 아니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분위기.
로메로 공작이 말했다.
“다들 그만하십시오.”
우뚝.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 로메로 공작에게 잘 보여야 하기에, 그의 말을 거스르면서까지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로만의 혼사는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정략결혼에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로만이 평생의 인연을 데려온다면, 그것은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제게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로만을 유혹해 보십시오. 제 아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여인이라면, 저도 두 팔 벌려 반기겠습니다.”
그 말에.
왕국 대표들이 또다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그들은 돌아가는 대로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았다.
* * *
한참 난리가 난 그때.
프랑크 왕국의 대표인 라르손 남작은, 로만 드미트리와의 혼사보다도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펠릭스 님.”
“……라르손 남작님?”
파티장 한편.
사람들과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던 펠릭스는, 라르손 남작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정확히는 피닉스를 프랑크로 끌어들이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었던 인물이었다.
“프랑크의 대표로 오신 겁니까?”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따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테라스로 이동하자, 라르손 남작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피닉스 마탑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프랑크 국왕 폐하가 많이 당황하셨습니다. 드미트리 공국으로 거처를 옮긴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 프랑크로 돌아오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동안 저희가 섭섭하게 해 드린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성하고 있고, 앞으로는 피닉스 마탑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는, 제 이름을 걸고서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카이로의 내란.
로만 드미트리가 명성을 떨치는 과정에서, 그와 더불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세력이 있었다.
바로 피닉스였다.
대륙에 존재하는 마탑 중에서 최하위로 평가받는 그들은, 그동안 소실되었다고 알려진 버닝을 구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베네딕트 성을 무너트리는 펠릭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고, 비기를 찾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한 소문에.
프랑크는 난리가 났다.
그들은 피닉스가 더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마탑은 끊임없이 돈을 빨아들이는 괴물인데, 비기를 잃어버린 피닉스 마탑은 그만한 돈을 투자할 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상황이 바뀌었다.
은근슬쩍 지원을 끊어 나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마탑을 비우고 사라진 피닉스가 ‘버닝’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 상태로 나타난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피닉스가 본래는 본인들의 세력이라는 생각에, 프랑크 왕국은 다급히 사람을 보냈다.
라르손 남작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인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염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펠릭스의 표정이 굳었다.
“본인도 잘 아시는군요. 프랑크가 피닉스와의 약속을 어겼다는 것을.”
“이번에는 이전과 다릅니다. 제가 책임지고…….”
“아니요. 어떤 제안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드미트리로 거처를 옮긴 뒤에, 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뢰를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미트리는 저희에게 성과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며 처음에 한 약속을 과할 정도로 이행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피닉스는 많은 연락을 받았다.
모두가 피닉스를 자신들의 터전에 들이고 싶다고 말했지만, 엄청난 제안에도 대답은 똑같았다.
“저희는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건 조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희는 저희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찾았고, 그분이 먼저 내치기 전까지는 다른 길을 찾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프랑크로 돌아가서 국왕 폐하에게 말씀하십시오. 프랑크와의 인연은 이제 끝났습니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한 모습에.
라르손 남작은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프랑크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도, 한낱 귀족 가문에 불과했던 드미트리에게 보물을 빼앗기는 실수를 저질렀다.
두통이 일었다.
왕국으로 돌아가, 어떻게 보고할지 걱정이 밀려오는 라르손 남작이었다.
* * *
동상이몽(同牀異夢).
파티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목적에 따라 움직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두 제국은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은 이미 암살을 예고하면서 본인들의 목적을 밝혔고, 발할라 제국은 이번 선포식을 통해 덴버 백작의 죽음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제국.
그들의 위치는 견고하다.
사람들은 크로노스를 대륙의 악(惡)이라 부르지만, 발할라 제국도 그렇게 선한 집단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제국이라는 위치에 오르기까지 발할라는 어떻게 살았을까.
당연히 주변의 왕국들을 짓밟아 본인들의 힘을 증명했고, 크로노스와 마찬가지로 위상이 떨어지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똑같았다.
크로노스가 암살을 예고한 것처럼, 발할라도 덴버 백작의 복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제국을 따르는 사람들.
그들을 위한 복수다.
제국이 제국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냥 넘어가는 문제는 없었다.
‘대륙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크로노스 제국은 공공연하게 대륙 정벌의 야망을 드러낸 상태고, 발할라 제국 또한 야망이 적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자리에 왕국의 대표들이 모인 것처럼, 앞으로는 제국과 왕국 연합 간의 싸움이 되겠지.’
왕국 연합.
약자들이 힘을 합쳤다.
프랑크, 움베르토, 레드포드, 오델리아.
그리고 카이로와 헥토르.
로만 드미트리는 약자들의 연합을 맹목적으로 신뢰할 생각은 없었다.
힘이 약해서 뭉쳤다는 것은, 누구라도 배신해서 강자에 붙는 순간 힘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주변 왕국들과의 동맹은 일시적이다.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제국에 대항할 수 있어야만 한다.’
목이 탔다.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순간, 한스가 다가와 말했다.
“도련님. 접객실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전에 약속된 손님은 없을 텐데. 누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거지?”
접객실을 찾은 손님.
그는 바로.
“헥토르 왕국의 왕자님입니다.”
며칠 전.
성문을 지키는 조나단 기사단장을 당황하게 만든, 에드윈 헥토르가 로만을 찾는 의외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