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615)

192화 새로운 판도 (2)

모든 판단에는 근거가 있다.

크로노스 제국군을 추격해 격퇴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그간의 사례를 확인했다.

‘크로노스는 매년 잡음이 끊이질 않는 나라다. 항상 먼저 타국의 국경을 침범하고 무력을 행사하는 그들이, 반대로 공격을 당한다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이를 확실하게 확인하지 않는다면 내 판단으로 인한 대가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대륙의 역사.

원하는 사실을 확인할 세 가지 예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왕국 연합과의 분란이었다.

왕국 연합은 크로노스 제국을 기준으로 남부에 있는 네 개의 왕국을 말하는데, 그들은 카이로와 마찬가지로 크로노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를 보호하는 연합을 형성했다.

그때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크로노스의 공격을 받았는데, 울분에 찬 왕국 연합의 기사가 적의 수장을 잔인하게 도륙했다는 이유로 크로노스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받았다.

조건은 황당했다.

해당 사건의 기사가 무릎을 꿇고 사과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나머지 두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크로노스 제국은 분명히 먼저 실수를 저질렀지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과정에서 공명정대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비슷한 맥락의 사건이 역사적으로 무려 세 번이나 발생했다.

그 말은 크로노스 제국의 판단이 단순히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 대해 명확한 기준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카이로 왕국도 똑같은 일을 당했었다. 되려 사과를 요구하는 그들의 행동에, 어느 순간부터는 매년 반복되는 침략에도 적들을 일벌백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라 간의 싸움은 명분이 중요하지만, 그것 또한 힘의 논리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크로노스 제국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고, 만약 이번 전쟁에서 합당한 복수를 행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일반적인 판단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제국이 어떠한 기준으로 행동하는지를 알았다.

강자의 논리였다.

그들은 본인들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부분은 약자가 자신들에게 감히 적의를 드러냈다는 사실이었다.

로만 또한 강자의 삶을 살았기에 알았다.

사람들이 그것이 옳은 일이냐며 비난할지라도, 약자가 선을 넘는 행동을 강하게 벌한다면 공포를 이용한 지배가 가능하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약자의 마음을 장악하는 순간, 약자는 일반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강자가 무슨 일을 하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판단에 의한 대가를 알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공격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카이로 왕국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간의 선례를 알고도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

노엘 남작을 바라보며.

로만이 말했다.

“크로노스 제국은 누군가의 잘잘못을 떠나, 단 한 번도 국익(國益)에 해가 되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반란에 가담했고, 그들이 먼저 국경을 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약소국에 불과한 카이로 왕국이 성문을 열고 크로노스의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노엘 남작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전쟁이 끝난 줄만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에, 그는 더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이전과 똑같습니다. 처음 크로노스 제국을 공격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순간부터, 이번 싸움은 한발 물러나는 쪽이 피해를 온전히 떠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간단합니다.”

속국이 되지 않을 생각이라면.

부러질지언정, 한번은 확실한 태도를 보여야 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협상 테이블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 * *

로만의 예상대로였다.

전장이 거의 정리되어 갈 즈음, 카이로 왕실은 크로노스 제국의 연락을 받았다.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크로노스 제국의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외교부 소속.

찰튼 남작이었다.

화면 너머로 다니엘 카이로를 바라보며, 그는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크로노스 제국은 ‘베네딕트 후작’의 요청에 따라 이번 전쟁에 가담했습니다. 전쟁에 참전하는 명분은 카이로에서 내주었고,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명분의 주체인 베네딕트 후작이 패배하자, 병력을 후퇴시키고 더는 전쟁을 지속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카이로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성문을 열고 추격해 크로노스를 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국의 귀중한 인재인 파비오 백작과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적을 벌한 것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상대는 일개 귀족이다.

하지만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에, 다니엘 카이로는 상대를 하대할 수 없었다.

이번 협상.

왕국의 수뇌부들은 유리한 대화를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되도록 평화적으로 해결할 생각이었으나, 크로노스 제국의 주장은 시작부터 카이로를 충격에 빠트렸다.

[예.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길 바랍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크로노스와의 전쟁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공격을 당했고, 우리의 선택은 정당한 반격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합당한 대가를 받길 바란다니요. 크로노스가 이렇게 나온다면 저희로서는 ‘국제사회’에 이번 사건을 정식으로 문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카이로는 평화적으로 포로들을 풀어 주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크로노스가 계속해서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저희로서도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강하게 나갔다.

카이로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으려 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국제사회에 문제를 제기해도, 카이로가 전쟁에 참전할 명분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크로노스는 포로들의 목숨을 대가로 한 그 어떠한 협상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협상은 없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제국의 생각을 밝혔다.

[우리는 파비오 백작을 잔인하게 살해한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처벌을 바랍니다. 그 대가로 팔 하나만 받아 가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제국을 찾아와 팔을 바치고,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다면. 그리고 크로노스의 포로들을 모두 풀어 준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이번 사건을 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선택지입니다. 만약 첫 번째 선택지를 거절한다면, 두 번째 선택지는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입니다. 협상은 불허(不許)합니다. 기간은 열흘. 그 안에 직접 찾아와서 입장을 밝히십시오. 그러지 않을 경우, 크로노스는 곧바로 카이로 왕국과의 전쟁을 정식으로 선포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찰튼 남작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통신을 끊어 버렸다.

툭.

* * *

카이로 왕궁.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인물이 충격에 빠졌다.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에 말을 잃어버렸고,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히 잡히질 않았다.

억지였다.

크로노스 제국은, 본인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를 내뱉는지를 알고도 선택을 강요했다.

사이먼이 말했다.

“국왕 폐하. 크로노스 제국은 지금 사과를 받겠다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장에서 보여 준 로만 드미트리의 능력에, 후에 위협이 될 존재를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

왕국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매번 틀에 박힌 생각과 약소국에 어울리는 태도를 보여 주었던 카이로가, 로만 드미트리를 내세워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게다가 구스타보를 죽인 일까지.

현장의 증언이 크로노스 제국에게 닿았다면,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압도적인 무력에 경계심이 들었을 것이다.

겨우 20대 중반.

로만 드미트리는 구스타보를 쓰러트렸다.

단순히 승리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압도적이었던 승부는 그의 무력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사과는 명분에 불과했다.

크로노스의 노골적인 태도에, 다니엘 카이로는 이를 악물었다.

‘국력이 약해 이런 수모를 겪는구나.’

자신의 아버지.

전대 국왕은 평화를 추구하는 분이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자라며 다니엘 카이로도 아버지의 인자함을 물려받았지만,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니 아버지가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알았다.

국왕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크로노스와 같은 잔인한 포식자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강력한 국력을 갖추어야 했다.

문제는.

이미 늦었다.

현실은 닥쳤고, 크로노스는 피할 수 없는 선택지를 강요했다.

다니엘 카이로에게 집중되는 시선.

사이먼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조언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다니엘 카이로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의 영웅이다. 그는 카이로를 위한 일을 행했고,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카이로의 모든 백성이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자 그런 존재를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은 안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크로노스 제국은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의 팔다리를 자르려 할 테고, 더는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선례가 있기에. 카이로는 자연스레 무너질 수밖에 없다.”

위험한 선택이다.

크로노스는 빈말을 내뱉을 존재가 아니고, 자신의 결단이 정말 전쟁으로 직결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 새로운 카이로에서는 나라를 위협하는 파벌 싸움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인재들을 홀대하는 일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가 파멸일지라도.

그것은 카이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적어도 일국의 왕으로서, 크로노스를 공격하겠다는 결단을 허락한 사람으로서.

다니엘 카이로는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를 불러들여라. 이번 문제에 대해서, 그와 직접 논의할 것이다.”

* * *

이틀 뒤.

로만 드미트리가 왕궁에 들어섰다.

다니엘 카이로는, 서부 전선에서 고생한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고생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솔직하게 물었다.

크로노스의 제안.

범인의 두뇌로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존재가 필요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판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본인들의 제안이 상식에 벗어났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선택지를 강요하는 이유는, 제국의 위상을 바로 세우면서 저라는 존재를 처리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크로노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카이로가 크로노스의 속국으로 흡수되는 미래는 피할 수 없습니다.”

“나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힘을 내세운 선택지는 우리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네 말처럼 크로노스가 제국의 위상을 바로 세우려 한다면, 내뱉은 말이 있기에 선택지 중 하나를 반드시 이행할 것이다.”

첫 번째는 결렬되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륙 제일 검이라고 가정해도, 카이로의 힘으로 제국을 쓰러트릴 방법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 공격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순간부터,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제게 실리를 챙기면서도 전쟁을 피할 방법이 있습니다. 저를 크로노스 제국의 사절단(使節團)으로 보내 주십시오. 직접 제국으로 찾아가, 이번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불허한다. 크로노스 제국은 지금 너에 대한 처벌을 바란다. 그런데 직접 사지에 들어간다면, 최악의 상황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로만의 제안.

대담했다.

그의 말처럼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로만 드미트리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무책임한 판단이다.

결단의 책임은 같이 떠안아야 하건만, 로만의 제안은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였다.

왕궁에 자리한 사람 중 한 명.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이로 국왕 폐하는,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을 찾아가는 것이 위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카이로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제국으로 떠나면 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언변과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을 완벽하게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카이로로서는 가장 최적의 합의점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계획.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이 실행할 생각이었다.

다니엘 카이로가 결정의 책임을 떠안듯, 그 또한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로만은, 그의 말에 힘이 있음을 알았다.

다니엘 카이로 또한.

적절한 합의점에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우스 백작. 네가 직접 크로노스의 사절단으로 떠나겠다는 의미인가?”

“맞습니다. 제가 카이로를 대표해, 극악무도한 크로노스 제국에 카이로의 의사를 전달하겠습니다.”

카이로스의 너구리.

그가, 새로운 활로(活路)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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