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반격 (3)
2시간 전.
척후병으로부터 크로노스의 동태를 보고받은 로만 드미트리는, 회의실 탁자에 지도를 펼쳤다.
탁.
촤르르르륵.
“우리의 예상대로 크로노스 제국이 회군을 택했습니다. 혹시라도 함정일 가능성을 대비해서 척후병들을 보냈지만, 우리를 유인하려는 특별한 움직임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적들은 현재 평야를 지나 지도에 나와 있는 이 길목을 통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수풀이 우거진 지형이라 적들로서는 추격대의 공격을 대비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들은 다소 헐거울 정도의 대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군요.”
“맞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본인들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형을 촘촘하게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그들은 카이로 왕국의 추격을 완전히 배제한 것 같습니다.”
명백한 무시였다.
성 밖.
카이로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었다.
그간 수차례 카이로의 영토를 침범했지만, 전투의 승패를 떠나 카이로는 단 한 번도 추격대를 보내지 않았다.
서로가 진실을 알았다.
성의 존재로 간신히 버텨 내는 것일 뿐,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공간에서는 크로노스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추격대를 편성했다.
안일하게 생각하는 상대에게, 단 한 번의 선례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우리의 계획은 간단합니다. 적들은 길게 행렬을 유지하고 있으니, 우리는 병력을 두 개로 나누어서 중간과 후방을 동시에 공격할 생각입니다. 중간을 끊어 버리면 적들로서는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때 앞뒤로 빠르게 후방을 집어삼킨다면 적들이 대응하기 전에 많은 숫자를 줄일 수 있습니다.”
“……좋은 계획입니다만, 문제는 병력이 고립되었을 때입니다.”
노엘 남작이었다.
로만의 말.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일 뿐, 최악은 말하지 않았다.
“적들의 반항이 거세서 계획이 틀어진다면, 중간을 공격한 병력은 앞뒤로 고립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역으로 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라리 같이 힘을 모아서 후방을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적들이 하나로 뭉쳐서 대응한다면 그때부터는 전면전으로 변하겠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치고 빠지는 전략은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한 번의 선례입니다. 적들을 전멸시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선례를 남겼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이번 계획.
어중간한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
확실하게, 카이로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우리는 이번 공격으로 반드시 대승(大勝)이라고 표현할 만한 전과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방 공격은 필수고, 기습적인 공격으로 적들의 대열을 와해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엘 남작님의 말처럼 위험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우리는 어느 정도의 위험 부담은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뇌부들을 보며 확고하게 말했다.
“중간을 공격하는 것은 제가 맡겠습니다. 단언컨대, 현재 드러난 적들의 전력으로는 우리의 공격을 버텨 낼 방법이 없습니다. 적들의 방심이, 이전까지는 없었던 상황이. 크로노스 제국을 나락으로 빠트릴 것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 드미트리라면.
서부의 수뇌부들은, 이번 계획을 따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 * *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계획은 시작되었다.
지름길로 따라붙은 반덴버그 백작의 병력은, 수풀에 몸을 숨긴 채로 선발대의 신호를 기다렸다.
팡.
팡팡.
하늘에 터지는 신호탄.
반덴버그 백작이 검을 뽑았다.
“전군 공격하라!”
“공격하라!”
“와아아아!”
확.
타다다닥.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수풀을 뚫고 달려드는 카이로의 병사들에, 크로노스 제국군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대비하지 못한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의 병사들과 충돌하자마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뭘 해 보기도 전에 살을 파고드는 감촉을 느꼈다.
푹.
“커억.”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가 눈을 부릅떴다.
피를 토해 내며,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카이로의 병사들은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서 빠르게 적들을 처리했고, 공격을 막아 내는 존재가 있다면 두세 명씩 달라붙어서 몸에 검을 박아 넣었다.
방금까지 살아 있던 생명체가 걸레짝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슬로 엮은 갑옷을 뚫지 못하는 검에, 카이로의 병사는 적의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목을 베어 버렸다.
전쟁의 잔혹함이었다.
사방이 새빨갛게 물들며, 반덴버그 백작의 병력이 후방을 완전히 장악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등신 새끼들. 정신을 차려라! 상대는 카이로다! 저따위 녀석들에게 무너지지 마라!”
크로노스 제국의 기사.
그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의 검에서 오라가 피어오르더니, 기세등등하게 달려드는 카이로의 병사들을 단번에 도륙해 버렸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제국군이 기사의 외침에 따라 서로에게 등을 맡기기 시작했고, 득달같이 밀려드는 카이로의 병사들을 상대로 차분하게 대응했다.
조금씩.
크로노스가 우위를 가져갔다.
비슷한 숫자의 병사들이 격돌할 때면, 제국군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카이로의 병사들을 죽였다.
크로노스와 카이로.
병사들은 질적인 차이를 보였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침략을 일삼았던 만큼 전투에 단련되어 있는 강군(強軍)이라면,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은 성벽 안에서만 싸울 줄 아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초반에 기습적인 공격으로 기세를 탔던 것은 잠깐일 뿐이었다.
크로노스가 안정을 되찾고 원래의 모습을 보여 주자,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은 수적인 우세에도 적들을 전혀 압도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반덴버그 백작은 발군의 무력을 보였다.
4성의 오라를 폭발시키며 적들을 빠르게 베었지만, 그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불리하다.’
기세가 점점 기울었다.
제국의 방심은 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떻게 대형을 형성하던 카이로 왕국을 이길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그럴 자격이 있음을 무력으로 보여 주었다.
반덴버그 백작은 조급함이 일었다.
현실적으로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병력을 후퇴시키는 것이 옳지만, 계획을 위해서는 끝까지 버텨야만 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중간을 공격했다.
자신보다도 더 위험한 상황에서, 양쪽의 공격을 뚫고 후방을 도와주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미 검은 뽑았고, 반덴버그 백작은 이 싸움의 결말이 파멸일지라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물러나지 마라! 극악무도한 제국군에게, 카이로의 저력을 보여 주어라!”
피 튀기는 전장.
반덴버그 백작은, 지휘관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 * *
그 시각.
로만 드미트리는 병력을 이끌고 중간을 공격했다.
고전하는 반덴버그의 병력과는 다르게, 중간에서는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콰르르르릉.
폭발하는 오라.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피를 흩뿌렸다.
가장 선두에서 달려들어 십수 명의 적들을 단번에 베어 버렸고, 그를 따라 들이닥치는 병사들도 첫 격돌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보였다.
단순히 기습적인 우위로 인한 승리가 아니었다.
공방을 몇 번 주고받으면, 크로노스 제국군은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로 목이 날아갔다.
퍽.
드미트리의 병사들.
그들은 제국군 못지않은 강군이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로만 드미트리를 따랐던 사병들은,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보였다.
카앙!
카카캉!
일반 병사.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존재가, 검에서 오라를 일으키더니 크로노스 제국의 기사를 밀어붙였다.
상대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데, 오라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밀어붙이는 모습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라 심법의 위력이었다.
로만을 따르는 이들은 하나둘씩 오라의 영역에 들어섰고, 이제는 일반 병사들도 그 벽을 허물었다.
번뜩.
기사의 머리가 날아갔다.
일반 병사가, 기어코 기사를 쓰러트렸다.
“이런 미친.”
“막아! 적들을 막으라고!”
크로노스 제국군.
그들은 확실히 강군이었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와 케빈과 같은 핵심 인물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보였고,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적들의 숫자를 빠르게 줄였다.
반덴버그 백작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양쪽에 둘러싸이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병력은 예상을 넘어서는 결과를 보였다.
압도했다.
적들을 학살했고, 순식간에 길을 열었다.
‘……이게 무슨.’
혼란한 상황 속.
일련의 상황에 당황스러움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적을 베어 낸 로드웰 드미트리는, 넋을 잃은 얼굴로 주변을 보았다.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
* * *
카이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도로 가라.
로드웰 드미트리는, 수도에 처음 올라왔을 때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변방의 오합지졸들과는 다르게 경비병들마저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변방에서는 흔하게 찾아볼 수 없었던 오라 검사가 심심치 않게 보였다.
사람들의 말이 옳았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우물 안에서는 천재라고 불렸지만, 진짜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도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
그것이.
드미트리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수도의 수준에는 발끝에도 쫓아오지 못했던 존재들이, 지금 눈앞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보였다.
푹!
“크악.”
드미트리의 병사.
정말 평범한 얼굴을 한 병사가, 크로노스 제국군을 밀어붙이더니 상대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제국의 병사는 강군으로 유명하다.
로드웰 드미트리의 기억대로라면 드미트리의 수준으로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건만, 제국군 여럿이 병사 한 명에게 애를 먹었다.
그 병사가 유독 특별한 것이 아니다.
드미트리의 복장을 착용한 병사들은, 그 누구도 제국군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크리스.
기억 속에 있었다.
수도로 떠나기 전에 드미트리의 천재라고 불리던 존재는, 몇 년 만에 상식을 넘어서는 괴물이 되었다.
번뜩!
푸확.
크리스가 피를 흩뿌렸다.
크로노스 제국의 기사들이 오라를 일으키며 달려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는 적들이 몰려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적들을 학살했다.
기억의 괴리감이 일었다.
평범한 얼굴의 병사들이나, 드미트리 기사단의 크리스나.
로드웰 드미트리가 기억하는 수준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자신 또한 드미트리의 일원이었기에, 눈으로 확인되는 상황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였다.
압도적이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의 무력은, 카이로 제일 검의 칭호를 어떻게 차지했는지를 증명했다.
“너는 내 동생이다. 네가 나를 따라 전장으로 간다면, 앞으로 드미트리 가문의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보여 주마. 로만 드미트리의 동생 로드웰 드미트리가 눈을 하나 잃은 대가로. 크로노스 제국은 수많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로만의 말.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드미트리 가문.
완전히 달라졌다.
변방에서만 이름을 알아주는 정도였던 가문이,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환골탈태(換骨奪胎)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실이었고, 자신이 서부 전선에 있는 동안 드미트리는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안대로 눈을 보호하면서까지 전장에 나온 로드웰 드미트리였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역할은 없었다.
그때였다.
“크리스!”
“예!”
저 멀리.
크로노스 제국군이 밀려들고 있었다.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에, 선두에서 이동하던 병사들이 모두 중간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로만은 달려드는 적을 베며 말했다.
“지금부터 계획대로 병력을 두 개로 나눈다. 너는 당장 병력을 이끌고 후방으로 가라. 반덴버그 백작님을 도와 후방을 공격하는 동안, 이쪽으로 오는 크로노스 제국군은 내가 막고 있겠다.”
무모한 작전이었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둘의 대화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명령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위험천만한 선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에 옮겼다.
“알겠습니다. 제 2조는 지금부터 나를 따르라!”
크리스가 물러났다.
그 뒤로.
로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적들이 들이닥치는 순간.
콰르르르르르르릉.
로만은 오라를 폭발시키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