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반격 (2)
이번 회의.
플로라 로렌스는 긍정적인 감정을 받았다면, 로드웰 드미트리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저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라고?’
왕국군의 지휘관.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서부 전선의 병사들은 양쪽으로 길을 열어 주며 엄청난 환호성을 내질렀다.
로만 드미트리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가 겨우 3일 만에 반란군을 정리하고 서부 전선에 도착했다는 것은, 카이로가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에도 더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간의 행보.
헥토르 왕국을 물리치고, 카이로 제일 검이 되었으며, 베네딕트 후작마저도 무너트렸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는데도, 그를 바라보며 맹목적인 신뢰를 보였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도 전투에 나섰던 로드웰 드미트리는, 병사들과 같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존재는, 자신이 기억하는 로만 드미트리와 동일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리고 이어진 회의.
경악의 연속이었다.
최선을 물으며 수뇌부들을 다그치는 모습에, 자꾸만 기억의 괴리감이 일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로만 드미트리는 술에 절어 사는 폐인이었어. 검술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삶이었고,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경비대에 끌려가기 일쑤였지. 그때와 지금은 시간상 그리 오랜 차이가 나지 않아.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문을 들으면서 항상 들었던 의문은, 기억 속의 존재가 어떻게 5성의 경지에 올랐느냐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
확실했다.
외모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지만, 얼굴에 남은 흔적들은 그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이 절반만 진실일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는 존재일 수가 없었다.
회의를 진행하는 내내.
시선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말에 공감하기에,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났다.
밤공기를 들이켜며, 로드웰 드미트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서부 전선에서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았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한순간에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어. 재능의 차이일까. 사람들은 모두가 나를 드미트리의 미래라고 불렀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닌 발악에 불과했던 걸까.’
진실을 받아들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형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자괴감이 일었다.
형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폐인처럼 살던 시절에도 자신은 악착같이 노력했는데, 그 차이가 한 번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왼쪽 눈이 쓰라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쓰러트린 상대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쓰러트린 대가로, 로드웰 드미트리는 영영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참담했다.
이제껏 무엇을 위해 노력했단 말인가.
그때였다.
“로드웰.”
익숙한 목소리였다.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기억 속의 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선이 굵은 얼굴.
남자다운 목소리.
로만 드미트리가 분명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과는 달리, 로만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눈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그 물음에.
로드웰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서부 전선에 도착하고 단 한 번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던 로만이, 자신의 안부를 물을 줄은 몰랐다.
“신경 쓸 것 없어.”
“네 희생으로 크로노스 제국의 마법사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잘했다. 네가 계획을 완벽하게 이행하지 않았다면, 내가 도착할 때까지 서부 전선은 버티지 못했겠지.”
로드웰은 입을 다물었다.
어색했다.
이 대화가, 이 상황이.
형의 존재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로만 드미트리가,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로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먼저 말을 걸었다.
‘로드웰 드미트리. 나의 혈육.’
지난 1년.
아버지는 항상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어렸을 때부터 의젓해서 항상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려 했지만, 결국 그 또한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래서 형으로서 그를 보살펴 주기를 바랐다.
후계자 문제로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둘 다 소중한 자식이었다.
혈육(血肉)이라는 단어.
로만 드미트리, 아니 백중혁에게는 그리 좋은 말이 아니었다.
천마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쟁을 강요받았고, 그들의 피를 대가로 정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 삶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였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새로운 자신을 받아들이는 존재들을 배척하진 않았다.
그렇게 하나둘씩 현생의 인연을 만들어 갔다.
한스가 그러했고, 크리스와 케빈도 그에 포함되며, 플로라 로렌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로드웰 드미트리를 만났다.
그간의 얘기들은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로만은 개의치 않았다.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때. 내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한스는 맹목적인 감정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배척하고 싫어할 수도 있었지만, 한스가 먼저 다가와 준 덕분에 나는 이 세상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지. 로드웰 드미트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무조건적으로 상대가 다가오길 기다릴 이유는 없다. 현생에 맺은 인연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나는 로드웰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새로이 형성할 필요가 있다.’
드미트리의 둘째.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로만 드미트리는 먼저 다가갈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부탁 때문이 아니었다.
동생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그것만으로도, 로드웰 드미트리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자격이 있었다.
형제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대상에 불과했던 전생과는 다르게, 현생은 가족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로만이 말했다.
“아직은 내가 그리 달갑게 않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해라.”
눈을 보았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로드웰 드미트리는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에 한쪽 눈을 잃어버렸다.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덤덤하게 반응하려고 해도, 다른 한쪽 눈에 보이는 씁쓸함을 모르지 않았다.
“너는 내 동생이다. 네가 나를 따라 전장으로 간다면, 앞으로 드미트리 가문의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보여 주마. 로만 드미트리의 동생 로드웰 드미트리가 눈을 하나 잃은 대가로. 크로노스 제국은 수많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순간.
로드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의외였다.
말을 먼저 거는 것도, 이런 말을 해 주는 것도.
한스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로만은 로드웰 드미트리의 모난 부분마저도 품었다.
“그러니 기억해라. 너와 내가, 형제라는 사실을.”
하늘에 별이 가득한 밤.
두 형제는, 그렇게 재회했다.
* * *
그 시각.
크로노스 제국은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다.
[……베네딕트 후작의 반란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왕국군이 서부 전선에 도착한 이상,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더는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만 회군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외교부 소속, 찰튼 남작이었다.
회군(回軍).
짜증이 일었다.
파비오 백작으로서는, 이대로 병력을 후퇴시킬 수 없었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기껏 서부 전선을 공격해 주었더니,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꼴이라니. 찰튼 남작. 회군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난 며칠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딱 하루만 더 주게나. 그 안에, 주제도 모르는 녀석들에게 제국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오겠네.”
승패의 문제가 아니다.
대전사 전투 직후.
마법사들이 마법 트랩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며, 파비오 백작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카이로 왕국은 대전사를 내보내고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치렀고, 상대의 함정을 예상하지 못하고 마법사를 잃은 것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렇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겨우 카이로 따위에게 한 방 먹었다고 생각하자, 잠을 이룰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딱 한 번.
마지막으로 복수하고 싶었다.
실질적인 이득을 떠나,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저도 파비오 백작님의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의 왕국군이 합류한 상태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이고, 자칫 잘못했다간 감당하지 못한 손실을 볼 수도 있습니다. 파비오 백작님. 현재 크로노스 제국은 왕국 연합과의 분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파비오 백작님이 병력을 잃는다면, 그 여파는 남부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래도 끝까지 전쟁을 계속해야겠습니까?]
“……크흠.”
파비오 백작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 전쟁.
서부 전선에 보유한 병력으로 치렀다.
만약에 카이로 왕국과의 전투로 크나큰 피해를 입는다면,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병력을 끌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카이로 왕국을 상대로 패배한 것으로도 모자라, 왕국 연합과의 분쟁에 영향을 끼친 죄는 죄송하다는 말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결국.
“빌어먹을. 알겠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병력을 회군시키도록 하지.”
파비오 백작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직도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을.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파비오 백작은 신경질적으로 통신을 끊어 버렸다.
* * *
다음 날.
크로노스 제국은 곧바로 회군을 택했다.
아침 일찍부터 진지를 정리했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전에 회군을 시작했다.
“지휘관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척후병(斥候兵)들을 남겨 두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라도 카이로 왕국이 추격조를 보낸다면, 저희로서는 꼬리를 물릴 수도 있습니다.”
부관의 조언.
올바른 판단이었다.
회군을 택한다고 해서 그냥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척후병들을 통해 적의 동태를 살필 필요성이 있었다.
평소라면 파비오 백작은 부관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밤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그는, 공격적인 눈빛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카이로 따위가 감히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추격조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적들이 우리를 상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성벽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네 말처럼 성문을 열고 추격조를 보낸다면, 우리는 그대로 그들을 격파하고 서부 전선을 무너트리면 그만이다.”
넓은 평야.
이곳에서는 몸을 보호할 장소가 없다.
서로의 전력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상황에서, 카이로 왕국에 패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이 성 밖으로 나오길 바랐다.
카이로가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안일한 판단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알겠습니다.”
부관이 물러났다.
그도 파비오 백작의 명령에 수긍했다.
척후병들을 남기는 것은 만일을 위한 판단이었지만, 그 만일의 상황도 크로노스 제국에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크로노스 제국은 회군하는 대열도 안일하게 구성했다.
보통은 적의 공격을 대비해서 최대한 대열을 좁게 형성해서 움직이는데, 지금은 일렬로 길게 행렬을 이루었다.
공격을 당하는 순간.
중간에서 끊길 위험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크로노스 제국은 대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카이로 왕국. 지금이야 반란을 정리하면서 너희의 세상이 찾아온 것 같겠지만,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카이로는 대륙 정벌을 위한 교두보다. 크로노스 제국이 병력을 이끌고 다시 한번 서부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때는 제국의 행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파비오 백작이 히죽 웃었다.
적들의 미래를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말을 타고 터덜터덜 이동하며, 그는 머릿속으로 카이로 왕국의 미래를 그려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중천에 떠오른 해가 강한 햇살을 내리쬘 무렵, 아까 물러났던 부관이 창백한 얼굴로 뛰어왔다.
“지휘관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적들이, 후방을 공격했습니다!”
“뭐라고?!”
순간.
파비오 백작은 귀를 의심했다.
적들이 후방을 공격했다니.
그 말인즉, 성문을 열고 나왔다는 의미가 아닌가.
“옳거니. 카이로 녀석들이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구나.”
꽉.
히이이이잉!
말의 고삐를 당겼다.
적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면.
“당장 병사들에게 명하라. 주제도 모르는 카이로의 버러지들을 모두 죽여 버리라고!”
파비오 백작은, 지금이야말로 복수를 행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