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615)

182화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8)

툭.

“빨리 걸어가.”

딱딱한 물체가 등을 떠밀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처참한 몰골을 한 베네딕트 후작은, 신발을 한 짝 잃어버린 채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수풀을 뛰어다니며 발바닥이 찢어진 상태였다.

발에서부터 고통이 올라왔지만, 베네딕트 성에 도착하자마자 사방에서 집중되는 시선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베네딕트 후작이다!”

“개새끼!”

“혼자 도망치더니만 꼴 좋다!”

귀족파의 병사들.

끝까지 베네딕트 성을 지키고자 발악했던 사람들은, 성을 함락당하면서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들이닥치고도 끝까지 싸우던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히 성벽 위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카메론이 자취를 감추었고, 베네딕트 후작을 비롯한 귀족파는 처음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전쟁은 끝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면서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고, 그러한 감정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이번 전쟁.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내란이다.

병사들을 이끄는 수뇌부들이 내세우는 대의명분에 따라 일어난 전쟁인데, 수뇌부들이 도망쳤으니 싸울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팽팽했던 균형이 와르르 무너졌다.

왕국군은 적의를 상실한 병사들을 전부 포박했고, 날이 저물 때까지 성 내부를 살피며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했다.

끝났다.

왕국군의 승리였다.

그리고 처참한 몰골로 끌려온 베네딕트 후작의 모습에, 포로들은 지나가는 길에 침을 뱉었다.

“카악, 퉷!”

“지옥에나 떨어져라!”

얼굴에 침을 맞았다.

진득하게 흘러내리며 바닥에 떨어지는 침에, 베네딕트 후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몸에 바른 배변 냄새 때문에 침이 그렇게 역겹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이로 제일의 권력자인 자신을 향한 병사들의 만행이, 오감으로 전달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퍽.

“크윽.”

무릎을 꿇었다.

광장 중앙.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였다.

고개를 치켜든 베네딕트 후작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그 순간.

베네딕트 후작의 정신이,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에 빠져들었다.

* * *

수십 년 전.

카이로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카이로 왕가와 카이로 제일의 명문인 베네딕트의 결합에, 다른 나라에서도 사절단(使節團)을 보내서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 자리에 베네딕트 후작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아비의 자리를 물려받은 그는, 자신이 딸처럼 여겼던 동생의 결혼에 흐뭇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부터.

정말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다니엘 카이로의 아버지.

전대 국왕이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크로노스 제국의 만행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국경을 침범하고, 나라 안에서도 제국의 끄나풀들을 내세워 국정(國政)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국왕 폐하. 카이로는 힘이 없습니다. 제국의 만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권력을 바로 세우십시오. 끄나풀들의 목을 잘라서, 카이로의 의지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서부 전선.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끓어오르는 피에 왕궁을 찾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앞으로의 미래를 말했다.

그때의 베네딕트는 애국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베네딕트 가문과 카이로 왕가는 한배라는 생각에, 크로노스 제국이 왕국을 우습게 보는 만행을 도저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국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백성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없다는 것.

제국의 끄나풀들을 죽였다가는 그 보복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국왕의 판단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왕의 덕목이라지만, 베네딕트 후작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 번의 방관은. 미래를 길게 보았을 때,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앗아 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국력보다는 평화를 지향하는 국왕이었고, 겉보기에만 좋은 이상(理想)은 의미 없는 평화를 주었다.

그때부터였다.

카이로의 권력은 붕괴했다.

국왕이 우유부단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에,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따르는 제국파는 무섭게 세력을 부풀렸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베네딕트 후작은 세력을 끌어모았다.

카이로 왕실이 멍청하게 군다고 할지라도, 카이로를 통째로 제국에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무렵.

사건이 벌어졌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왕비가 시름시름 앓더니, 국왕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베네딕트 후작의 아버지와 똑같은 지병이었다.

카이로 왕실과 간신히 연결해 주던 유대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 여동생의 장례식에서 싸늘한 표정으로 장례를 지켜보는 동안, 베네딕트 후작은 카이로 왕국이 이대로 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왕비를 추모하는 자리.

제국파는 껄껄껄 웃었다.

슬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표정이, 베네딕트 후작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나는 더는 카이로 왕실을 믿을 수 없다. 카이로를 대변할, 카이로를 진정으로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것이다. 나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전하라. 앞으로 카이로 왕실이 아니라 나 ‘베네딕트’를 따를 생각이라면, 지정한 날짜에 나와 내게 충성을 맹세하라.”

귀족파.

그들이 변질되었다.

이상적인 말만 지껄이는 카이로 국왕은 믿을 수 없었고, 유일한 후계자인 다니엘 카이로는 너무 어린 데다가 국왕을 빼닮은 녀석이었다.

왕국의 미래는 없었다.

훗날 카이로의 역사는 자신을 권력에 미친 존재라고 평가할지라도, 결단을 내리는 순간만큼은 본인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전대 국왕이 죽었다.

모두가 바라던 결과에, 베네딕트 후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왕좌에 올랐다.

* * *

처형(處刑).

죽음을 앞두었다.

최대한 덤덤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건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기억들에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억울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처음부터 그레고리나 덴버처럼 왕국을 그대로 갖다 바칠 수 있었는데도, 베네딕트 후작은 카이로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비록 카이로 왕가를 따르진 않았지만, 그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왕국을 위한 일을 행했다.

탁.

바로 앞.

로만이 걸음을 멈추었다.

검을 들고 차갑게 내려보는 시선에, 베네딕트 후작은 얼굴을 치켜들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나는,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나를 죽이려 든단 말이냐! 카이로의 전대 국왕은 제국파의 끄나풀들이 세력을 키우기 전에 처리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 백성들이 죽는 것이 무섭다는 이유로 선택을 미루었다. 정말 좋은 왕이지. 만약 이 세상이 피와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 천국이라면, 그는 백성들이 사랑을 바칠 그런 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약해 빠진 왕이 나라를 망치는 동안, 나는 카이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았다!”

목에 핏대를 세웠다.

처절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속에 쌓인 감정을 토해 냈다.

“전대 국왕이 죽고. 다니엘 카이로는 백성들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얼빠진 소리를 내뱉으며 왕좌에 올랐다. 로만 드미트리. 너라면 그런 국왕을 진심으로 모실 수 있겠나. 냉정하고 항상 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너라면 내 심정을 잘 알겠지. 크로노스 제국이 수차례 국경을 넘어오고, 안에는 매국노들이 들끓고 있으며, 최근에는 헥토르 왕국마저도 우리를 우습게 보고 전쟁을 선언했었다. 그게 카이로다. 그렇다면 왕좌에 오른 이는, 이 혼란한 판국에서 왕국을 보호할 강인함을 갖추는 것이 옳은 일이지 않은가. 대답해 보아라. 내 말이 틀렸다고, 내 눈을 보고 말해 보란 말이다!”

악에 받쳤다.

눈에서 혈관이 터졌고, 마치 피눈물처럼 핏물이 흘러내렸다.

로만은 덤덤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베네딕트 후작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기억하는 다니엘 카이로를 떠올렸다.

“네 선택을 비난하지는 않겠다. 카이로에는 네가 말한 것처럼 왕권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대 국왕의 선택 또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네가 ‘귀족파’를 이끌고 정말 카이로를 강인한 왕국으로 만들었다면, 더 좋은 시기에 검을 뽑지 못한 전대 국왕의 선택은 정말 어리석다고 비난할 일이겠지. 하지만 결과를 보아라. 넌 대체 뭘 이루어 냈지? 네가 귀족파를 형성하고도 권력의 체계는 그대로였고, 헥토르 왕국이 국경을 넘어올 때 너는 나라의 안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에 미친 쓰레기였고, 네가 말하는 대의는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네가 정말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너는 크로노스와 손을 잡는 것을 택했다.”

척.

검을 겨누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죽음을 마주한 순간에도 본인이 억울하다는 듯이,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표출했다.

“힘이 없는 이가 고개를 숙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 결정에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것도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짊어진 국왕이라면. 침묵을 택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지금 네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나. 네가 결정권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너는 네가 비난하던 존재보다도 더한 쓰레기가 되었다. 카이로 왕실은 무능력하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왕실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데도, 단 한 번도 나라를 팔아먹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순간.

베네딕트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로만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무릎으로 기어 갔다.

로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제발, 제발 살려다오. 그냥 내 노력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내뱉은 말이다. 앞으로는 카이로 왕실, 아니 드미트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러니까 목숨만은 제발 살려다오.”

빌었다.

구차했다.

몸에 배변을 발랐던 것처럼, 베네딕트 후작은 죽음 앞에서 의연하지 못했다.

로만이 말했다.

“아니. 카이로스에서 검을 뽑은 순간부터, 나는 내 결정으로 인한 대가를 각오했다. 내가 만약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드미트리를 불태우고 가문의 식솔들은 농락을 당했겠지. 우리는 애초부터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어느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 누구의 선택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의 책임은 패자가 모두 떠안는 법. 나는 베네딕트 너를 상대로, 사람들에게 잘못된 선택의 말로가 무엇인지를 보여 줄 것이다.”

“제발, 한 번만……!”

“카이로는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번뜩.

검을 내리쳤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떤 이는 눈을 부릅뜨며 똑바로 바라보았고, 어떤 이는 시선을 피했으며, 어떤 이는 경악했다.

반란의 대가.

로만의 검이, 베네딕트 후작의 머리를 베었다.

툭.

데구루루.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머리를 잃은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카이로의 거인.

한때는 살아 있는 권력이라고 불리던, 베네딕트 후작의 최후였다.

* * *

카이로 왕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다니엘 카이로는, 나라의 명운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3일 중 하루가 지나고 있다. 조금이라도 귀족파를 제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크로노스 제국이 서부 전선을 뚫고 카이로의 영토에 들이닥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정말 옳은 선택을 내린 것일까.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면, 적어도 카이로의 백성들은 일시적인 평화라도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럴 때면.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자신과 같은 범인(凡人)은 한 번의 결단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도, 다시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는지에 대한 상념을 머릿속에서 떨쳐 보낼 수 없었다.

눈을 똑바로 떴다.

왕좌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서, 최대한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 의지를 굳게 먹었다.

자신의 아버지.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처럼, 좋기만 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국왕 폐하! 승전보입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베네딕트 성을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뭐라고?!”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겨우 하루.

하루 만에 베네딕트 성을 무너트리다니.

엄청난 기쁨이 발끝에서부터 전율을 일으키면서도, 자신의 말을 현실로 만들어 낸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소름이 돋았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앞으로 그와 같은 괴물과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군신의 관계는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허수아비의 삶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카이로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기쁨도 잠시.

“전공(戰功)에 대한 치하는 후에 확실하게 할 것이다. 일단 곧바로 서부 전선으로 가라고 명하라. 크로노스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조금이라도 늦게 대응했다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승리의 기쁨을 억눌렀다.

내란은 정리되었지만.

아직, 카이로의 현실은 평화를 장담할 수 없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