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615)

181화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7)

손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떨어진 통신기가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베네딕트 후작의 정신이 깊은 심연(深淵)에 빠져들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기억을 되돌아보았다.

랭킹전 직후.

베네딕트 후작은 귀족파를 이끌고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가 선택을 강요했다.

그로 인해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잘못된 선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려 1년이 넘도록 공을 들였던 존재다.

그런데도 대놓고 독자적인 노선을 타겠다고 말하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귀족파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지고 권력 체계가 무너질 것이 뻔했다.

아직 완전히 커지기 전에.

싹을 자르려 했다.

분명히 올바른 판단을 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대담하게도 카이로스에서 검을 뽑았다.

혹시 본진을 공격한 게 잘못되었던 걸까.

드미트리로 병력을 돌리지 않고 베네딕트에서 승부를 보았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그 많은 병력으로도 텅텅 비어 있는 드미트리를 무너트리지 못했는데, 베네딕트에 집중했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전력의 차이가 극심했다.

선택들을 되돌아보았을 때, 베네딕트 후작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모든 계획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라.

카이로스에서의 계획이든, 베네딕트에서의 양동 작전이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실패가 허락되지 않는 작전이었다.

객관적인 전력이 그러했다.

백의 검사를 동원해 십의 전력을 제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겨우 일조차도 제압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홀로 백을 도륙해 버리는데, 머리를 아무리 굴려서 계획을 짜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압도적인 힘.

실패의 요인이었다.

카이로가 감히 제국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것처럼, 귀족파는 애초에 상대를 잘못 고르고 말았다.

끝났다.

통신기의 잔해를 바라보며, 베네딕트 후작은 덜컥 겁이 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카이로의 악마.

그가 쫓아오고 있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정신을 차리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네딕트 성에서의 수성전은 완전히 실패했다. 우리는 일단 몸을 피하고, 크로노스 제국의 힘을 빌려서 상황을 반전시켜야만 한다. 빨리 움직여라. 이대로 붙잡힌다면, 귀족파의 미래는 그것으로 끝이다.”

“아, 알겠습니다.”

귀족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딕트 성에는.

아직 수많은 병사가 남았다.

그들은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에 목숨을 걸었지만, 수뇌부들은 그들의 안위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목숨을 부지하고 크로노스 제국을 이용해 카이로 왕실을 점령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새로운 병사들을 확보할 수 있다.

걸음을 서둘렀다.

다행히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눈에 띄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길목이다 보니, 혼란 속에서도 아직 희망의 불씨는 남아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차올랐다.

괜히 멋을 부리겠다고 착용한 갑옷은 몸을 짓눌렀고,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평소라면 불만을 표출했을 귀족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걸음을 늦추었다간 카이로의 악마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앞서가는 인물을 밀면서까지 나아가려고 했다.

마침내.

통로 끝에 도달했다.

어두컴컴한 지하를 지나 환한 불빛을 마주했을 때, 선두에 있던 베네딕트 후작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뚝, 뚝.

검날을 따라 핏방울이 떨어졌다.

시체 위.

한 사내가 시체를 의자처럼 사용했다.

베네딕트 후작을 확인한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늦었습니다, 베네딕트 후작님.”

그는 바로.

케빈이었다.

* * *

베네딕트 후작의 선택.

뻔했다.

수성에 실패한다면, 그가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비밀 통로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케빈을 비롯한 병사들은 그중 하나를 지키고 있었고, 베네딕트 후작은 하필이면 케빈이 버티고 있는 통로를 통해 나타나고 말았다.

심장이 완전히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얼굴이지만, 케빈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를 카이로스에서 경험했었다.

‘드미트리의 악귀……!’

로만의 명령에.

두 검사가 달려들었다.

케빈은 그중 하나였고, 수백의 병력을 향해 몸을 날리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황급히 자신을 따라 나온 호위들 뒤에 몸을 숨기더니,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공격해! 저놈들을 죽이란 말이다!”

호위 기사들.

그들도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 서로를 살피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베네딕트 후작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케빈은 그들을 보고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빤히 쳐다만 보고 있는 모습에, 한 기사가 이를 악물더니 앞으로 달려들었다.

“공격해!”

“죽여!”

십수 명의 기사.

그들이 목숨을 걸었다.

공포를 꾹꾹 억누른 표정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케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푸확!

목이 날아갔다.

머리가 둥실 떠오르며 피가 뿜어졌고, 케빈은 그대로 상대의 품을 파고들었다.

사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모두 간발의 차이로 피해 버렸다.

팔락이는 머리칼을 잘라 내는 검도 있었지만, 케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작은 키를 이용해서 상대의 턱에 검을 쑤셔 버렸다.

푹.

“크르르륵.”

피거품을 물었다.

상대의 눈이 흰자를 드러내더니, 그대로 쓰러지며 바닥에 먼지를 일으켰다.

단 한 명.

케빈만 움직였다.

그의 뒤에는 다른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케빈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사고 회로를 완전히 굳어 버리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호위 기사들은 발악하며 케빈을 공격했지만, 신체 부위가 하나씩 잘려 나가며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자 오른손이 잘렸고, 적의 공격을 막으려고 왼손을 들자 왼손이 잘렸다.

그리고 겁에 질린 얼굴로 도망치려고 걸음을 돌리자, 케빈은 상대의 등에 올라타더니 그대로 목을 베어 버렸다.

드미트리의 악귀.

소문대로의 모습이었다.

피가 물줄기를 이루어 흐르는 상황에, 베네딕트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호위 기사들.

그들도 결국 소모품에 불과했다.

원망의 눈빛으로 귀족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시선에서 귀족들은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케빈은 귀족들을 쫓지 않았다.

발악하는 호위 기사들의 숨통을 끊을 뿐,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베네딕트 후작은 독 안에 든 쥐에 불과했다.

* * *

“하악, 하악.”

베네딕트 후작이 숨을 헐떡였다.

병사들을 버리고.

호위 기사들도 버렸다.

비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래부터 자신을 위해 존재하기에, 도망치면서도 조금의 죄책감도 생기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개 같은……!”

새로운 퇴로에.

또 다른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

크리스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검사들은 이번 공성전에 나서지 않았다.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상대도 같이 무너지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특명을 받아서 베네딕트 후작이 도망칠 만한 길목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번 전쟁. 반란에 가담한 인물을 단 한 명도 살려 둘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처리하는 방식은, 후대(後代)에 선례로 남을 것임을 알았다.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

크리스가 다가갔다.

베네딕트 후작은 황급히 몸을 틀었다.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모습에, 크리스는 베네딕트 후작은 내버려 두고 다른 귀족들을 붙잡았다.

푹.

“크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리스는 그 자리에서 귀족파의 귀족들을 죽였다.

일부러 비명을 더 지르라고 천천히 검을 찔러 넣었고, 베네딕트 후작은 도망치면서 자신의 두 귀를 막았다.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자신이 패배한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과도한 공포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디를 가든.

로만의 수하가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따르던 많은 귀족이, 새로운 벽에 부닥칠 때마다 하나둘씩 죽음을 맞이했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도망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 날 마음껏 농락해라. 내가 어떻게든 이 지옥에서 살아남는다면, 크로노스 제국을 끌어들이든 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복수해 주마. 그때는 네가 제발 살려 달라고 울부짖어도, 눈앞에서 너를 따르던 놈들을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마.’

생존에 대한 열망.

복수를 원동력으로 삼았다.

발이 부르트고.

발톱이 깨졌다.

수풀을 헤치면서 몸에 상처가 생겼지만, 그런 자잘한 고통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치다가.

베네딕트 후작의 눈에 희망이 보였다.

‘여기다.’

바위 아래.

자그마한 틈이 보였다.

주변에 짐승들의 배변이 끔찍한 냄새를 풍겼지만, 지금은 목숨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바위 아래에 몸을 숨기더니, 배변과 뒤섞인 흙을 끌고 와서는 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화려한 장신구가 보이지 않도록, 구석에 최대한 몸을 밀착해서는 숨을 죽였다.

구차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베네딕트 후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타올랐다.

* * *

해가 저물었다.

살면서.

이토록 밤이 길었던 적은 없었다.

몸을 엄습하는 굶주림과 추위에 벌벌 떨다가도, 주변에 인기척이 들리면 입을 틀어막았다.

“흡.”

로만의 병사들.

그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 주변을 이 잡듯이 확인하는 것 같았지만, 짐승들의 배변이 곳곳에 보이는 이곳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베네딕트 후작은 권력의 상징이다.

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한들, 설마 배변을 몸에 묻히면서까지 숨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지독한 냄새는 적응이 되었지만,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도 처량했다.

‘로만 드미트리. 다 그 녀석 때문이야. 카이로의 왕좌가 눈앞에 있었는데, 그 녀석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어. 난 절대 무너질 수 없어. 반드시 살아남아, 카이로의 왕좌를 차지하고 말겠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자꾸만 의식이 희미해졌지만, 입 안을 베어 물어서라도 억지로 버텼다.

그때였다.

“……베네딕트 후작님.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제발 나오십시오.”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웬 자작.

그가 분명했다.

베네딕트 후작은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분명히 포로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당장 자신을 끌어내면 그만이지 않은가.

“베네딕트 성이 완전히 함락당했습니다. 귀족파의 병력은 모두 포박을 당했고, 수뇌부들은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후작님. 우리는 끝났습니다. 후작님의 가족들마저 개처럼 끌려 나와 지금 목숨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후작님이 로만 드미트리를 설득해 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리던 목소리가.

말을 할수록, 점점 근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후작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도망칠 방법은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애초에 우리가 도망칠 것을 예상하고, 퇴로를 모두 막았습니다. 도망치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우리는 농락을 당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저 말이.

자신의 위치를 알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한 인간이 발악하는 움직임과 더불어, 공포에 찬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네가 거기에 숨어 있다는 걸 사람들이 모를 줄 알아? 네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낸다면 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했는데, 너는 기어코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제발, 지옥에 떨어…… 컥.”

죽음의 소리였다.

베네딕트 후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제야 알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위치는 발각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걸 알면서도,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처럼 일부러 방관했다.

바닥에 피가 흘렀다.

오웬 자작으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베네딕트 후작의 옷을 적셨다.

그리고.

“나와.”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

철렁 내려앉는 심장에, 베네딕트 후작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