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4)
머리가 빙글 돌았다.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지.
불과 보름 전만 하더라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베네딕트 후작은, 멍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해결책을 말해 보십시오!”
“해결책이랄 게 있겠습니까? 이미 끝났습니다. 윈스턴 남작의 군대가 완전히 박살이 났고, 베네딕트 성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국파도 이 소식을 듣자마자 갑작스럽게 연락을 끊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지금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성문을 열고 투항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투항이라니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난리가 났다.
베네딕트 후작을 중심으로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눈치를 보지도 않고 서로 얼굴을 붉혔다.
참으로 참담한 상황이었다.
한때는 귀족파야말로 카이로의 미래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위기를 마주하니 카이로 왕실보다도 더한 모래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였다.
콰앙!
“다들 그만하십시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오웬 자작이었다.
테이블을 내리치는 그의 행동에, 귀족파들은 씩씩거리면서도 말을 삼켰다.
“여러분들의 말처럼 우리는 벼랑 끝에 몰렸습니다. 하지만 절대 투항은 불가합니다.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일이지만, 동북쪽 일대로부터 흘러나온 정보에 의하면 바르코의 멸문에 로만 드미트리가 개입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간 보여 준 행보만 보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적대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짓밟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연약하고 무른 국왕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성문을 열어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반 병사들이야 목숨을 구제하겠지만, 우리 수뇌부들은 모두 목이 날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마법 방어진을 유지할 마나석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앞으로 길어야 이삼일입니다. 그 안에, 우리는 상황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베네딕트 후작을 보았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그를 바라보며, 오웬 자작은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베네딕트 후작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세력은 제국파만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들을 건너뛰고 제국과 직접 손을 맞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어차피 끝난 싸움입니다. 이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속국(屬國)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저희의 제안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늘 카이로를 대륙 정벌의 교두보로 삼으려던 그들이라면, 우리가 희생을 자처하는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이겠지요. 제국파의 수장들이 모두 끌려간 상황. 지금이야말로 제국을 설득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베네딕트 후작의 눈빛이 살아났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베네딕트 성이 무너지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의 패를 비싸게 팔아먹을 마지막 기회였다.
고민은 짧았다.
나라를 팔아먹는 결정은, 그만큼 가벼운 고민거리였다.
“지금 당장 크로노스에 연락하라. 내가 직접 그들과의 협상을 진행할 것이다.”
* * *
마법 통신은 곧바로 연결되었다.
크로노스 외교부 소속 찰튼 남작이 얼굴을 드러내자, 베네딕트 후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했다.
“저희의 사정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귀족파를 살려 주십시오. 저희를 도와 카이로 왕실을 무너트린다면, 저희는 속국을 자처하고 앞으로 크로노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가식은 없었다.
머리를 숙이는 일에, 괜한 오만은 떨지 않았다.
[……흐음. 죄송합니다만, 카이로 왕국에는 이미 크로노스 제국을 따르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게 그레고리 백작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저희가 카이로 왕실을 지배할 허수아비를 고른다면 그간의 노고를 생각해 그레고리 백작을 택해야지, 베네딕트 후작 당신은 아닙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설득하지 못한다면, 카이로의 악마가 들이닥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카이로 왕실은 로만 드미트리를 앞세워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으로 제국을 따르는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을 먼저 포박했습니다. 그들이 무사히 풀려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를 따르는 귀족파가 무너지는 순간, 그들의 생명도 끝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이번 기회에 카이로를 완전히 장악하려고 할 테고, 그때는 제국이 파고들 틈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서로를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크로노스가 조금의 자비를 베풀어 준다면, 귀족파는 제국의 앞잡이로서 카이로 왕실을 무릎 꿇리겠습니다. 후일 대륙 정벌을 선언했을 때, 카이로 왕국은 크로노스 제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것입니다.”
대륙 정벌.
희생이 필요한 결단이다.
하지만 크로노스가 승자로만 남는다면, 사실 병사들만 죽을 뿐 수뇌부들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왕국을 담보로 걸었다.
본인의 생존을 위해, 베네딕트 후작은 매국노가 되길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선택입니다. 그레고리에서 베네딕트로. 크로노스 제국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달라질 뿐, 제국은 저희가 일굴 과실만 취하면 그만입니다.”
[말씀을 참 재밌게 하시는군요.]
찰튼 남작이 히죽 웃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본질을 보았다.
사실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교두보에 불과한 왕국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때.
필요한 역할을 해 줄 사람.
그레고리가 아니라, 베네딕트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저희도 그레고리 백작이 무력하게 포박당해 버린 상황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지원해 주었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습니다.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크로노스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랍니까?]
“서부 전선을 공격해 주십시오.”
[큭큭큭, 지금 자국을 공격해 달라는 말입니까?]
“예.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일차 저지선 정도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을 넘어서 카이로 왕실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 주십시오. 크로노스 제국과 귀족파가 힘을 합쳤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도록. 서부 전선에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여 준다면, 그 이후의 일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이 귀족파의 편을 들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베네딕트 후작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일단 어려움을 외면한 제국파를 다시 끌어들일 명분이 생길 것이고, 이 사실을 바탕으로 카이로 왕실을 협박한다면 그들로서도 베네딕트 성을 계속 공격할 수 없다.
그대로 방관했다간.
서부 전선에서 밀려온 병력이 왕실을 함락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왕국 연합과 분쟁 중이라 할지라도, 서부 전선을 공격하는 정도는 크로노스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외교부의 권한.
황제의 허가가 필요하지도 않을 정도로 쉬운 문제였다.
찰튼 남작의 대답 한 번에, 약소국에 불과한 카이로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 *
겨우 12시간.
크로노스가 제안을 받아들인 직후, 서부 전선에 들이닥친 제국군으로 인해 아비규환의 지옥이 펼쳐졌다.
3개의 저지선.
그중 2개가 뚫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3번째 저지선도 공격하려는 움직임에, 카이로 왕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사이먼이 말했다.
“……현재 크로노스 제국은 전열을 가다듬고 3번째 저지선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곳마저도 뚫린다면 카이로의 영토에 크로노스 제국군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국왕 폐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서부 전선에서 밀려오는 제국군을 어떻게든 막아야만 합니다.”
이번 공격.
명분도 없는 갑작스러운 재앙이었다.
나중에 국제사회를 통해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당장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참극이었다.
그때였다.
“베네딕트 후작으로부터 통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거절할 수 없었다.
제국의 움직임.
그것은 귀족파로부터 비롯되었을 확률이 높기에, 다니엘 카이로는 싸늘한 표정으로 통신을 연결했다.
화면 너머.
베네딕트 후작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국왕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아무리 너희가 불리하다고 한들, 왕국 내의 문제에 제국을 끌어들인단 말이냐!”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내세워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을 해 오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잘 들으십시오. 귀족파는 크로노스 제국과 손을 맞잡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크로노스 제국은 서부 전선을 공격했고, 왕국군이 베네딕트 성을 눈앞에 두고 시간을 끄는 사이에 카이로의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입니다.]
사나운 목소리였다.
고개를 조아리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오만한 얼굴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크로노스 제국은 항상 카이로를 탐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내란에 개입할 명분을 내주었고, 이제 카이로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베네딕트 성을 함락시킨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습니까?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허수아비의 역할에 만족하겠다고 약속하신다면, 국왕 폐하의 수족들을 잘라 내는 것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뭐, 로열 나이트 정도는 살려 드리겠습니다. 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국왕 폐하는 카이로의 왕으로서 오래오래 살아 계실 수 있습니다. 그게, 그간의 정을 생각한 제 마지막 배려입니다.]
국왕의 자리?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국왕이라고 불리든, 사람들은 베네딕트 후작이야말로 카이로의 지배자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래서 살길을 열어 주었다.
상대를 끝까지 밀어붙여 결사의 항전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 국왕은 살려 주겠다는 제안은 드미트리와의 내분을 유도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우유부단한 국왕이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베네딕트 후작은 이 판을 뒤집을 자신이 있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나선 이상 끝난 문제입니다. 국왕 폐하. 마지막 기회입니다. 잘 생각하시고,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툭.
통신이 끊겼다.
사라진 베네딕트 후작의 얼굴.
너무나도 일방적인 대화에, 다니엘 카이로는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 * *
왕궁 회의실.
침묵에 빠졌다.
그 누구도 섣부르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결사의 항전을 택한다면 왕실이 멸망할 것이고, 그렇다고 반대를 택한다면 왕실을 따른 드미트리와 같은 세력들이 쓸려 나갈 것이다.
선택의 문제였다.
베네딕트 후작은 잔인하게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내분을 유도했다.
베네딕트.
한때는 외삼촌이라 불렀던 사람이다.
같은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 지금은 자신을 벼랑 끝에 몰아붙였다.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구나.’
국왕의 자리.
다니엘 카이로는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다.
왕족으로 태어났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고, 어린 나이에 차지한 권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허수아비 왕.
그의 현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으로 카이로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했건만, 베네딕트 후작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끌어들여 버렸다.
차라리 선택지를 주지 않고 죽였다면 어땠을까.
크로노스에 의해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니엘 카이로는 덤덤히 현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드미트리를 버린다면 난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알량한 목숨은 유지한다고 한들, 허수아비로서 남들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드미트리를 도와서 귀족파를 쓰러트려도 내 권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드미트리는 왕실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할 테고, 어쩌면 또 다른 허수아비로 남을 수도 있겠지. 나 다니엘 카이로는 허수아비로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났다. 그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나는 내 삶이 어떻게 되든 왕국을 위한 선택을 내리고 싶다.’
베네딕트.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다.
그의 허수아비로 살아남을 바에는, 적어도 왕국의 미래를 말하던 드미트리의 말을 대변하고 싶었다.
기구한 삶.
현실을 받아들였다.
약소국을 강국으로 만들 능력은 그에게 없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믿고 따랐다.
“사이먼.”
“예.”
선택을 내렸다.
카이로 왕실은.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에게 연락하라.”
나약하고 무능력한 왕으로 남을지언정, 매국노로서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