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숙청 (4)
척척.
병사들이 덴버 백작을 둘러쌌다.
왕실 경비병들이 로만의 명령을 따르는 모습에, 덴버 백작은 표정이 굳어 가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왕명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사태를 파악하는 눈빛에, 로만 드미트리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덴버 백작. 당신이 그동안 발할라 제국과 내통하며, 카이로의 기밀을 빼돌렸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이에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카이로 국왕 폐하는 덴버 백작 당신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니 순순히 왕명을 받아들여라. 만약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반란을 도모한 것으로 판단하고 즉결처분하겠다.”
“바, 반란이라니!”
덴버 백작이 당황했다.
반란.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단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날 때부터 심상치 않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처음부터 반란을 들먹일 줄은 몰랐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내가 발할라를 따르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와 관련한 증거는 애초에 차고 넘치는 데도, 그동안 카이로 왕실은 나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귀족파와 충돌한 직후에 바로 나를 체포하겠다니. 왕명에 응하는 순간, 내 팔다리는 완전히 묶일 수밖에 없다.’
본능이 경고했다.
절대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왕실 밖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대응할 수 있지만, 이대로 발할라파의 수장인 자신이 끌려간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털릴 가능성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바짝바짝 마른 입은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덴버 백작은 최대한 침착하게 반응했다.
“네 이놈들. 지금 너희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느냐!”
목소리를 높였다.
의도적으로 분노하며, 왕실 경비병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같은 눈빛을 보였다.
“내가 발할라 제국과 내통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지금 왕명을 들먹이면서 나를 체포하려는 것이냐! 다시 돌아가서, 카이로 국왕 폐하에게 물어라. 정녕 이런 일을 벌이고도 뒷감당을 하실 수 있냐고. 나를 공격한다면, 발할라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적반하장이었다.
어차피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덴버 백작이 카이로의 실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온전히 발할라의 후광 덕분이지 않은가.
병사들이 당황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는 그들과는 달리, 로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덴버 백작. 지금부터는 단어 하나하나 조심히 내뱉는 게 좋을 거야.”
“네 이놈!”
“목소리 낮춰.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인데, 카이로 왕실은 귀족파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미 내란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귀족파와 싸우는 상황에서, 너희는 분명히 사태를 관망하며 이득을 보려고 하겠지. 이번 싸움은 단순히 귀족파를 제압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발할라와 크로노스를 따르는 반역도들. 바로 너희까지 같이 그 뿌리를 뽑아 버려야겠지.”
“……미친 새끼.”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덴버 백작의 반응.
뻔했다.
그가 궁지에 몰린다면, 발할라를 들먹이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번 싸움에 카이로의 명운(命運)이 걸렸다. 발할라? 그들이 널 위해서 뭘 할 수 있지? 크로노스와 달리 발할라는 국경이 떨어져 있고, 그들이 병력을 이끌고 카이로에 들이닥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시작한 일을 멈출 수 없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니까.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싸움이라면, 차라리 그 대가를 확실히 취할 필요가 있다. 어중간하게 분란의 씨앗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정리하는 것이 카이로의 미래를 위해 옳은 판단이겠지.”
힐끗.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왕실 경비병들이 덴버 백작에게 다가갔다.
“덴버 백작. 지금부터는 아주 재밌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로만의 말에.
덴버 백작은, 그만 의자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 * *
작전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덴버 백작의 자택을 습격한 그 시각.
로열 나이트의 부기사단장 사이먼은, 병력을 이끌고 그레고리 백작을 급습했다.
“이런 개새끼들이!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무사할 것 같냐고!”
포박하라는 명령에.
그레고리 백작은 격렬하게 반항했다.
병사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바락바락 소리치던 그는, 사이먼을 바라보면서 살벌한 눈빛을 보였다.
“사이먼. 너는 날 건드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겠지. 크로노스 제국은 카이로와 국경을 맞닿고 있어. 카이로가 날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제국은 분명히 경고성의 의미로 병력을 보내겠지. 그러니까 현명하게 판단하라고. 그렇지 않아도 대륙을 정벌하겠다고 몸이 달아오른 크로노스 제국이, 이번 사건을 명분 삼아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순간.
병사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그들로서는 흘려들을 수 없는 경고였다.
그나마 발할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크로노스 제국은 눈앞에 존재하는 위험이었다.
‘그레고리 백작의 말이 옳다. 크로노스 제국은 말뿐인 협박이 아니라, 정말 행동에 옮길 존재들이다.’
위험했다.
크로노스의 심기를 자극했다가, 카이로는 분명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병력을 끌고 오는 길에 사이먼은 수도 없이 고민했다.
이게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왕궁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왕에게 내뱉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국왕 폐하. 제국의 눈치를 보지 마십시오. 크로노스 제국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도 매년 카이로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대체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언제고 크로노스가 대륙 정벌을 선언한다면, 카이로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습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이 선택으로 카이로가 크로노스의 공격을 받는다고 한들, 그것은 매년 일어나는 시련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악의 뿌리를 뽑고, 카이로를 완벽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만이 앞으로 카이로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옳은 말이다.
크로노스 제국의 눈치를 본다고 해서.
그들은 카이로를 배려해 주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국경을 넘었고, 서부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카이로의 병사들이 학살을 당했다.
그때.
그레고리 백작은 무엇을 했을까?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크로노스가 카이로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도, 그는 카이로의 귀족이라는 명함을 달고서는 안락한 삶을 살았다.
치가 떨렸다.
그렇게 죽어 나간 사람 중에는 사이먼의 동료들도 있었기에, 니콜라스 백작과 시간을 보낼 때면 카이로의 현실에 탄식을 내뱉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테니 힘을 보태라고 말했다.
‘카이로 왕국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왕실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크로노스 제국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안에서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로만 드미트리가 경고했던 것처럼, 조금의 변수도 남겨서는 안 된다.’
이를 악물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이는 그레고리 백작의 모습에, 그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빡!
“크악.”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레고리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사이먼을 보려고 했지만, 사이먼은 그의 머리를 짓누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닥쳐, 이 새끼야.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만약 크로노스가 너를 구하겠답시고 국경을 넘어온다면, 내 직권을 넘어서는 일이라 할지라도 네 목을 잘라서 성벽 위에 효수(梟首)해 주마. 그러니까 더 나불대지 마. 그때는, 반역으로 간주하고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테니까.”
사이먼.
그가, 마침내 억눌렀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 * *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레고리 백작, 덴버 백작을 포박해 감옥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전투 경계 태세를 발령해서, 국경부터 시작해서 수도 주변 일대의 경계를 강화했다.
또한.
제국파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을 포박한 일은 일시적인 조치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는 그들을 다시 풀어 줄 것이다.”
혹시 모를 움직임을 방지하는 연락이었다.
물론 귀족들로서는 일시적인 조치라는 말을 믿지 않겠지만, 사실 그것을 믿고 말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제국을 따르는 귀족들은 제국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섣불리 일을 벌일 수 없다.
그동안 아무리 친 제국을 부르짖었다 한들, 결국 그들도 카이로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지 않은가.
내란.
피바람이 부는 상황에, 그들은 눈과 귀를 막았다.
카이로 왕실에서 돌린 연락은, 후에 그들이 변명할 수 있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시각.
로만 드미트리는, 상황을 정리하고 다니엘 카이로를 만났다.
“지금 당장 제국이 움직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발할라는 국경이 멀리 떨어져서 병력을 보내기에는 제약이 많고, 크로노스 제국의 경우에는 최근 남부에 있는 왕국 연합과의 분란으로 인해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황입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카이로가 아닙니다. 병력을 남부로 집결시키는 것만 보더라도, 카이로보다는 남부의 일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번 계획.
운에 맡긴 판단이 아니었다.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고, 제국파를 건드려도 된다는 판단하에 일을 진행했다.
‘대단하구나.’
다니엘 카이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
대단한 사내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과감한 행동력과 완벽한 계획성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우리는 단시간에 너무 많은 적을 상대하고 있다.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 덴버 백작의 발할라 제국파, 그레고리 백작의 크로노스 제국파. 그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카이로 왕국에 거대한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중앙 정부는 카이로의 전부였다.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카이로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공백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카이로.
오랜 시간 중앙 정부에 의해 움직였다.
그들의 공백은 무시할 수 없고, 어쩌면 나라의 기능을 상실해 버릴지도 몰랐다.
로만이 말했다.
“이번 내란으로 인한 위험성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최선을 택할 뿐입니다. 카이로 왕국을 사분하는 세력들이 활개를 치는 상황이 최악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생겨나는 위험은 감수해야만 합니다. 최악보다는 나은 차악(次惡)이기에. 되도록 빠르게 각 세력의 우두머리를 제거해서 내란을 종결시킨다면, 국왕 폐하가 걱정하는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최악이 아닌 차악.
다니엘 카이로는 현실을 수긍했다.
로만의 말이 옳았다.
칼을 뽑은 순간부터, 카이로에게 최상의 선택지란 없었다.
* * *
카이로 왕실이 빠르게 움직이는 그때.
베네딕트 후작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기어코 일을 벌이는구나.”
자신을 공격한 직후.
로만 드미트리가 왕궁을 찾아갔고, 국왕과 손을 잡은 뒤에 제국파를 공격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확실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적의를 드러냈고, 국왕의 선택은 그런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지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국왕파와의 전쟁이었다.
언제고 왕좌를 찬탈(簒奪)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건방진 새끼.”
로만 드미트리.
그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공격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이던 모습을 떠올릴 때면, 베네딕트 후작은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그때의 자신은 너무나도 구차했다.
살기 위해서 발악했고, 그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제는.
누구 하나는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이 되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귀족파의 소집을 명령했다.
‘귀족파는 카이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귀족파의 전력을 소집한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버티고 있다고 한들 카이로를 밀어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나를 공격했을 때 확실히 끝을 봐야만 했다. 지금은 네가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리면서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세상일이 네 마음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빠르면 일주일 안으로.
병력을 이끌고 수도로 향할 것이다.
압도적인 머릿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확신했다.
상황은 순조로웠다.
귀족파의 병력이 속속들이 소집에 응하는 상황에서, 수하로부터 정말 뜬금없는 보고를 받았다.
“다시 한번 말해. 뭐라고?”
목소리가 분노로 들끓었다.
방금.
수하의 보고가 맞는지, 귀로 듣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수하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베네딕트 후작의 호통에 겁을 먹은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전달받은 내용을 말했다.
“……파비우스 백작. 그가 소집에 불응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불응.
그것은, 베네딕트 후작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