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273/615)

273화 천마재림 (天魔再臨) (5)

로만 드미트리가 두 이름을 불렀다.

“크리스, 케빈. 앞으로.”

그들을 호명한 이유.

사람들이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방금 내뱉은 발언의 연장선이라면, 크리스와 케빈은 그렇게 적절한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두 인물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 너희를 드미트리의 대전사로 내세우고자 한다. 승리할 자신이 없다면, 물러날 기회를 주겠다.”

“드미트리를 대표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둘의 말.

로만 드미트리는, 이제 어떻게 하겠냐는 듯이 뱀포드 공작을 보았다.

뱀포드 공작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분노가 한계를 넘어서자, 들끓는 감정을 속으로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전사 전투를 제안한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바르보사를 쓰러트린 괴물이라면,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대전사 전투’라는 변수를 활용해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와 케빈은 다르다.

로만 드미트리를 조사하면서, 그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에 대한 파악도 끝냈다.

둘의 발전은 비약적이었다.

최초의 만남으로 추정되는 그때부터 지금은 같은 인물인지 의심이 생길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대륙의 기준에서 강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인즉.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하는 이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 만큼의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들이 대전사랍시고 나선 것 자체만으로도,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대로 따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물러난다면,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의문을 표할 것이다.

대체 왜.

뱀포드 공작은 대단한 검사들을 휘하에 두고, 겨우 크리스와 케빈을 상대하는 대전사 전투를 거절했단 말인가.

승기를 잡을 절호의 기회다.

로만 드미트리도 아니고 크로노스 제국에서 랭킹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들을 상대로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은,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명백한 무시였다.

뱀포드 공작이, 살벌한 음성으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크로노스가 왜 제국(帝國)이라고 불리는 줄 아느냐. 단순히 황제 폐하가 다스리는 땅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득 메울 만큼 인재가 넘쳐나기에, 왕국에서 대단하다고 칭송받는 존재들이 이 땅에서는 흔하디흔한 재능이기에 제국이라 불리는 것이다.”

한니발?

그가 나설 필요도 없다.

이번 전쟁에는, 그를 제외하고도 강자들이 많았다.

“너와의 대전사 전투를 거절한 상황에서, 한니발을 대전사로 내세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허무맹랑한 제안을 내뱉었겠지. 오냐.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이마. 한니발이 나서지 않더라도, 10년 전에. 아니, 5년 전에는 사람들이 이름조차 알지 못했을 애송이들로는, 크로노스 제국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마.”

씰룩.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그가 눈짓으로 크리스에게 신호를 보내자, 크리스는 담담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뱀포드 공작이 소리쳤다.

“디에고! 가서, 저 녀석의 목을 가져와라!”

* * *

호명된 인물.

크로노스 랭킹 6위.

대륙 랭킹 12위에 랭크되어 있는, 대륙 십이검의 일원인 디에고였다.

그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일이었다.

바르보사와 같이 대륙 십이검의 말단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일반 검사들은 차마 올려다보지도 못할 6성의 검사였다.

뱀포드 공작의 말처럼 크로노스 제국에는 인재가 많았다.

한니발을 굳이 출전시키지 않더라도,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6성의 검사가 존재했다.

“나는 디에고라고 한다.”

앞으로 나섰다.

상대를 힐끗 살피고는, 짜증이 난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한니발을 통해 들었다.

전장에서 크리스를 만났는데, 크리스는 살려고 동료인 니콜라스 백작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크리스의 현실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만한 발전이면 확실히 미래의 가능성이 대단했지만, 문제는 지금 자신을 마주할 레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디에고가 말했다.

“드미트리 녀석들의 충성심이 대단하다더니, 너를 보니까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겠군. 겨우 네 녀석 따위가 크로노스를 상대하는 대전사라니. 로만 드미트리는 네 충성심을 언제까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대륙은 네가 얼마나 무모하고 같잖았는지를 역사에 기록할 것이다.”

“입으로 싸울 생각인가.”

크리스의 반응에.

디에고가 웃었다.

명령을 떠나, 크리스는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 언제까지 그 입을 나불거리나 보자.”

신호는 필요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동의.

서로가 싸울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에, 디에고는 오라를 폭발시키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팟.

눈가에 피가 튀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크리스에게서 마나가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더니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상대는 5성에도 도달하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한데, 방금의 공격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할 만큼 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진 않았다.

상대의 공격은 전력(全力)을 발휘한 것일 테고, 그게 먹히지 않았다면 승부는 이미 끝났다.

오히려.

콰르르르르릉.

약간의 방심조차도,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 * *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6성의 오라가 폭발했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치는 힘에, 크리스는 전신의 감각을 일으켜 상대의 공격을 보았다.

빠르고.

강했다.

그간의 발전으로 4성의 오라를 발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저 무지막지한 힘에 정면으로 부딪쳤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는 케빈을 가르치며, 오라의 존재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분출은 일시적일 뿐이다.

파괴력이 극한에 도달했을 때의 힘을 사람들은 6성이라고 규정하지만, 그것을 조금만 어긋 내버려도 상황은 달라졌다.

탓.

타닥.

스텝을 밟았다.

적이 원하는 최적의 타이밍.

몇 발 물러나는 것만으로 타이밍을 조금 늦추었고, 순간적으로 오라가 완벽히 분배되지 않은 위치를 찾았다.

검을 둘러싼 오라는 불규칙적이었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부분은 6성의 오라를 150% 발휘하고 있다면, 그렇지 못한 부분은 절반에 달하는 미약한 힘이 오라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미세한 차이였다.

보통의 검사들은 알아보지 못할 변화를, 로만 드미트리와의 훈련으로 크리스는 찾아낼 수 있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오라가 부닥쳤다.

엄청난 충격에 크리스는 쭉 밀려났지만, 그것만으로도 디에고는 충격받은 표정을 보였다.

겨우 4성의 오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현실을 부정하듯이 더욱 밀어붙였다.

콰앙!

콰콰콰쾅!

격렬한 격돌이었다.

폭발하는 오라가, 한순간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을 몰아칠수록.

디에고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크리스는 진즉에 무너져야 하건만, 아직도 버티고 있는 모습이 디에고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자신의 승리가 당연한 싸움이었다.

사람들은 승패보다는 얼마나 압도적으로 쓰러트릴지에 관심을 보였기에, 시간이 1분 1초가 흐를 때마다 굳어 가는 표정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문제는.

승부를 일찍 결정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다가도, 크리스가 기습적으로 뻗는 반격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번뜩.

빨랐다.

공격과 공격의 연결 고리.

약간의 틈을, 크리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착했다.

지난 며칠.

격변(激變)의 시간이었다.

육체의 성장과 더불어, 확장된 정신은 그간의 상황들을 되돌아보았다.

예전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던 행동과 발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라를 사용하지 않아도 압도적으로 패배하는 상황에, 실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결국.

오라는 검술(劍術)의 연장선일 뿐이다.

대륙에서 통용되는 진리는 오라의 위력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말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매번 검술 그 자체를 강조해 왔다.

섬전과 같은 기술을 알려 주었던 것처럼.

단순히 오라로서 상대를 압도하는 게 아니라, 검술을 이해하고 상대를 무너트리는 방식을 대련을 통해 전달했다.

한니발과의 대결.

심적으로 패배했다.

파괴적인 오라에, 어차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자리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면.

그가 4성의 오라만을 발현할 수 있을지언정, 한니발을 상대로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였을까.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검술로 상황을 뒤집었을 것이 분명했다.

드미트리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처럼 압도적인 경지의 강자가 아니었는데도 항상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상대를 쓰러트렸다.

크리스는 그 길을 따라가고자 했다.

상식적인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그랬듯 현실의 한계를 이겨 내고 싶었다.

확.

콰르르르르르릉.

오라가 공간을 갈랐다.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크리스는 끝까지 상대를 바라보며 찰나의 틈을 공략했다.

번뜩.

일격.

상대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처음으로 그가 검을 회수하며, 공격이 아닌 방어를 택했다.

문득.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떠올랐다.

드디어 그와 합류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크리스의 변화를 알아채고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 한때 사람들은 너를 드미트리 최고의 재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지금, 사람들의 평가는 틀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크리스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샐러맨더 대륙에서, 너를 능가하는 재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단언(斷言).

느낌이 달랐다.

그 범위에 로만 드미트리 본인은 포함되지 않았겠지만, 바르보사와 같은 대륙의 괴물들을 상대하고도 그는 자신이야말로 대륙 제일의 재능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크로노스 제국과의 대전사 전투에 자신을 내세웠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의 확신은,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공격을 막았다.

혼란스럽게 얽혀 들어가는 공방 속에서, 크리스는 때를 기다렸다.

오라가 들끓었다.

예열을 끝마친 오라가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크리스는 단전 밖으로 분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꾹꾹 억눌렀다. 섬전은 순간적인 분출을 예리하게 압축시키는 것이다.

조나단 기사단장의 비기는 폭발적인 분출로 스피드를 살리는 것이다.

둘을 토대로. 크리스는 단전에서부터 검까지 뻗어 나가는 길목을 재구성했고, 얇고 강철처럼 단단한 통로를 만들었다.

환골탈태에 의한 결과물.

숨을 들이켰다.

디에고가 평정심을 잃고 무리하게 들어오는 그 순간.

번쩍.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단전에서부터 검까지 오라가 단 0.1초 만에 도달하며,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속도를 보였다.

일섬(一閃).

한계를 초월한 속도.

디에고가, 화끈하게 일어나는 통증에 눈을 부릅떴다.

* * *

보지 못했다.

반응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시도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빛의 번뜩임과 동시에 디에고가 화끈한 고통에 휩싸였다.

“……크흡?!”

피가 튀었다.

가슴팍이 베였다.

디에고는 당황한 나머지 검을 회수하며 추가 공격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크리스는 틈을 놓치지 않고 연속해서 몰아붙였다.

앞을 막으려는 상대의 다리를 베어 균형을 무너트렸고,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검을 위로 들자 가슴팍이 걷어차이며 그대로 뒤로 나뒹굴고 말았다.

콰당!

방심하진 않았다.

전력을 다했고, 크리스를 벌하겠다는 생각에 단 한 번의 반격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만.

너무 빨랐을 뿐이었다.

공간을 가르는 번뜩임은 극한에 달한 쾌검이었고, 디에고가 살아온 세상에서 그만한 검술을 사용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로서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대전사 전투는 이미 시작되었고, 크리스가 생각보다 무서운 존재라는 변명은 크로노스 황제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대결에.

목숨이 걸렸다.

디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크리스의 공격이었다.

단 한 번.

흐름을 잃었다.

디에고는 분명히 강자였고, 크리스로서도 백 번의 대결에서 백 번 모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크리스가 어떤 무기를 보유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패인(敗因)이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낸 크리스라는 존재는, 단 한 번이라도 흐름을 잃는 순간 상황을 뒤집을 수 없을 만큼의 강자가 되었다.

서걱.

팔이 날아갔다.

무릎을 꿇었고, 디에고는 남은 팔로 반격을 시도하려고 했다.

항복은 말하지 않았다.

그럴 바에 죽음을 택할 것이다.

가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디에고는 나머지 팔마저 날아가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끝났다.

이대로 검을 거둔다면.

사람들은 크리스의 승리를 인정할 것이다.

그때.

크리스가 경악으로 얼룩진 사람들 사이로.

한니발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콰직!

모두에게 보란 듯이, 죽음으로 승부의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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