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615)

172화 숙청 (3)

로만의 제안.

일반적이지 않았다.

카이로의 검을 자처하면서도, 로만 드미트리는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거래를 언급했다.

그렇기에.

다니엘 카이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혼란한 권력 체계에 항상 귀족파가 무너지는 것을 바랐지만,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두려움이 앞섰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침묵을 뚫고, 로만이 말했다.

“헥토르 왕국이 국경을 넘었을 당시, 저는 남부 전선에 있었습니다. 카이로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안일한 방어 체계는 헥토르 왕국의 의도를 저지할 수 없었고,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하고 워프 게이트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병력을 이끌고 산에 숨어 있으면서, 카이로 왕실이 어째서 빠르게 대응하지 않았는지 원망했습니다. 분명히 카이로 왕국에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방어 체계는 허술할지언정, 위험을 직시하고 빠르게 대응했다면 남부 전선 전체를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책망이었다.

사람들이 분개하는 기색을 보이든 말든, 카이로 왕가의 잘못을 지적했다.

“카이로는 이번 일로 권력 체계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년간 조금이라도 바뀐 부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서부 전선에서 크로노스 제국이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카이로 왕실은 회의를 열어 중앙 정부의 승인이 떨어질 때까지 상황을 관망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면서도, 결국 방관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네 개의 파벌.

카이로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마법 폭탄과도 같은 관계는 섣불리 건드릴 수 없기에, 남부 전선의 일을 경험하고도 문제를 고치지 못했다.

“현재 샐러맨더 대륙의 정세는 심상치 않습니다.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만약 크로노스 제국이 국경을 넘어온다면 카이로는 버틸 방법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대체 언제까지 방관하실 작정입니까? 누구 하나는 권력을 휘어잡아야 합니다. 카이로를 하나로 만들어, 훗날 일어날 일들에 대응할 체계적인 구조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당연히 국왕 폐하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중앙 정부를 들먹이며 본인이 왕인 것처럼 구는 베네딕트 후작이 아니라, 국왕 폐하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만의 발언.

국왕을 추대하는 말은, 그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저는 저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베네딕트 후작을 공격했습니다. 국왕 폐하로서는 저의 의도가 의심스럽겠지만, 드미트리가 위험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드미트리 가문은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국왕 폐하가 드미트리의 선택을 외면한다면, 저와 드미트리는 모든 위험을 떠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선택하십시오. 끝까지 방관하실 생각입니까. 아니면, 드미트리가 판을 깐 이 상황을 이용하시겠습니까?”

선택권을 넘겼다.

이제는.

국왕의 몫이었다.

한참을 침묵에 빠져 있던 다니엘 카이로는, 이내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물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물을 것이 있다. 이번 일을 대가로, 드미트리 가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로만이 언급한 약속.

지금은, 그것이 중요했다.

* * *

새로운 삶.

현생의 목표는 무엇일까?

로만 드미트리는 정점의 자리에 오르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카이로를 집어삼키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만이 바라는 목적은 드미트리로도 충분하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서, 대륙 전체의 문화를 짓밟고 무분별한 학살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전생.

천마 백중혁의 무림 정벌은 기존의 방식과는 달랐다.

한때 무림을 호령하던 존재들은 무림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길 바랐다면, 백중혁이 추구하는 것은 정신적인 굴복이었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그 외의 세력들.

그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살아오던 방식을 이어 갔지만, 무림의 하늘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는 진심으로 천마 백중혁을 말했다.

그뿐이다.

무림 정벌을 막으려는 세력들을 모두 무너트리고.

백중혁은 다시 십만대산으로 복귀했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통제하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무림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천마신교를 떠받들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백중혁은 성역이 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림의 세력들은 서로 다툼을 벌였지만, 감히 천마신교의 백중혁을 올려다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림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

역사를 뒤져 보면.

무림은 항상 위험한 생각을 하는 존재들로 인해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백중혁이 건재할 당시에는 확실한 절대자가 존재했고, 그가 중심을 잡아 주었기에 감히 위험한 생각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게 바로 백중혁의 무림이었다.

일방적으로 남들을 착취하고 조공을 받는 의미의 제국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휘어잡는 구조의 지배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삶.

현생도 다르지 않았다.

로만은 정점의 자리에 오르길 바라지만, 그것은 크로노스 제국이 말하는 대륙 정벌과는 달랐다.

‘나는 드미트리에 천마신교의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파멸을 바라진 않는다. 내 앞을 막아서는 세력들은 확실하게 짓밟겠지만, 필요에 의하면 카이로든, 혹은 그 이외에 무엇이든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존속하게 허락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드미트리를 대륙 제일이라고 인정했을 때. 나는 드미트리로 돌아와 나만의 평안을 찾을 것이다.’

확고한 목표.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리고 지금.

다니엘 카이로의 물음에, 로만 드미트리는 목적을 솔직하게 밝혔다.

“저는 드미트리를 포함한 동북쪽 일대의 독립을 바랍니다. 카이로 동북쪽 일대를 독립적인 세력으로 인정하고 공국(公國)의 칭호를 부여한다면, 드미트리는 카이로와 같은 뿌리를 둔 입장에서 언제든 카이로를 위해 힘을 쓰겠습니다. 카이로에서 떨어져 나가 완전히 독자적인 노선을 걷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카이로와 같이 가되, 저희는 저희만의 세상을 구축하기를 바랍니다.”

그건 언뜻.

반란을 의미하는 발언이었다.

충격으로 물드는 다니엘 카이로의 표정을 바라보며, 로만은 흔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국왕 폐하.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면, 가장 최선의 선택으로 카이로를 취하십시오.”

* * *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로만의 발언.

왕의 자발적인 선택이라면 모르겠지만, 반대로 요구하는 상황에 국왕파는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국왕 폐하. 이건 아닙니다.”

“맞습니다. 세상 어디에 신하의 요구로 공국의 칭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드미트리는 지금 귀족파를 명분으로 본인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의도입니다. 절대 허락해서는 아니 됩니다.”

국왕파가 반발했다.

로만은 그들을 보며 웃었다.

“예, 맞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있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 귀족파의 만행에도 입을 다물고 계실 때, 저는 그들을 상대로 검을 뽑았습니다. 피를 보았고, 지금부터는 귀족파와의 싸움을 온전히 감당해야만 합니다. 저는 희생의 대가를 바랄 뿐입니다. 공국은 카이로에서 파생되는 것이고, 카이로와 드미트리는 언제까지고 운명 공동체일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항할 힘입니다. 만약 남부 전선에서처럼 안일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때는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확실한 충언을 할 수 있겠지요.”

선을 그었다.

반란이 아님을.

그런 의도가 다분하게 보일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그걸 완벽하게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다.

이건 거래였다

동북쪽 일대가 떨어져 나가는 상황에, 긍정적인 호의를 바랄 수 없음을 알았다.

결국.

선택은 국왕의 몫이었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다니엘 카이로는 생각에 잠겼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로만 드미트리.

그는 무기 하나 없이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는데도, 두려운 기색은커녕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오만함이 아니다.

만약 로만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들.

로열 나이트는 로만 드미트리를 제압하지 못할 것이다.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린 그 순간부터, 로만은 더는 카이로가 통제할 수 없는 괴물임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제안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는 무능력한 모습으로 카이로의 권력 체계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을 방관했다. 드미트리의 도움이 아니라면, 애초에 귀족파에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그런데 카이로 왕실이 아무런 희생 없이 왕실의 권리만 주장한다면, 드미트리로서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드미트리가 귀족파를 쓰러트린 직후.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만한 힘이 있고, 명분은 만들면 그만일 테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로만 드미트리는 같이 동반할 기회를 주었다.’

현실을 직시했다.

다니엘 카이로.

유약한 왕이라 불리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왕실은 힘이 없다.

만약 드미트리의 힘을 빌려 왕국의 혼란을 바로잡는다면, 이건 그리 밑지는 장사라고 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 왕실이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시작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드미트리는 카이로 왕실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카이로는 선택해야만 한다. 현재의 체계에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것을 포기하고 카이로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나갈 것이냐.’

이미.

선택은 내렸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건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는 문제였다.

‘나는 매번 나의 왕국을 이룩하길 바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 한들, 나를 허수아비로 내세우는 작자들에게 휘둘리다가 명을 달리하는 것보다 최악일 수는 없다. 로만 드미트리는 적어도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그렇다면, 확실한 선택으로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옳겠지.’

이번 결단.

위험한 선택임을 알았다.

드미트리 하나를 믿고 일을 벌였다가, 역풍이라도 맞는 날에는 자신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보며 확신을 얻었다.

이 사내라면, 자신이 해내지 못한 일을 확실하게 끝맺을 것이라고 믿었다.

“카이로 왕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이번 일이 모두 마무리된다면. 드미트리를 포함한 동북쪽 일대를 공국으로 칭하고, 드미트리 남작에게 공작 위를 내리겠다. 그러니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하라. 그리고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히는 반역도 베네딕트 후작을 처단하라.”

명령이 떨어졌다.

혼란했던 카이로.

허수아비라고 불리던 왕이, 마침내 결단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 *

나라가 시끄러웠다.

귀족파와 드미트리의 격돌에, 발할라를 따르는 덴버 백작은 자택에서 상황을 관망했다.

“로만 드미트리. 정말 무서운 녀석이구나.”

경악의 연속이었다.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린 것만으로도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데, 그대로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를 들이받아 버렸다.

보통 덴버 백작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로만 드미트리가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릴 수는 있어도, 귀족파와의 격돌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결단을 내렸다. 어느 한 세력을 택해서 몸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드미트리 동맹을 형성한 것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겠다는 의미겠지. 수도 카이로스에서 베네딕트 후작을 직접 공격한 이상, 드미트리와 귀족파는 어느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움을 멈출 수 없다.’

끼익.

의자에 몸을 기댔다.

웃음이 나왔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돌아가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덴버 백작에게 그리 나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로만 드미트리는 왕궁으로 향했다. 국왕과 미리 계획한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귀족파와의 대결 구도에서 국왕의 힘을 빌리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국왕파와 드미트리, 그리고 귀족파의 대결이라. 볼만한 싸움이 되겠지. 두 세력이 죽을 듯이 싸우고 나면, 그때 나는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 발할라가 유리한 판을 만들면 그만이다.’

위험 요소는 하나다.

그레고리가 이끄는 크로노스파.

그들도 본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역으로 잡아먹힐 수도 있다.

마음이 들떴다.

카이로.

망조(亡兆)가 든 나라다.

이따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바에는, 얼른 제국에 바치고 한자리를 꿰차길 바랐다.

그때였다.

벌컥.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가문의 기사였다.

덴버 백작이 표정을 찌푸리자, 기사는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병력을 이끌고 저택에 들이닥쳤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빨리 몸을 피…… 컥!”

퍼억.

기사의 몸이 옆으로 처박혔다.

문 뒤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민 드미트리는, 천천히 걸어 나와 덴버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덴버 백작. 지금부터 왕명(王命)을 받들라.”

눈을 부릅뜨는 덴버 백작.

숙청을 시작하며.

로만 드미트리가 가장 먼저 선택한 일은, 바로 분란의 씨앗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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