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615)

166화 카이로 제일 검 (1)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다.

당당한 자신감을 보이던 얼굴은 한쪽 광대뼈가 내려앉은 모양인지 대칭이 맞지 않았고, 크게 부풀어 오른 코에서는 걸쭉한 피가 흘러내렸다.

제론의 눈동자는 초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을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고, 항복을 말하면서도 겁에 질린 아이처럼 벌벌 떨었다.

“……이런.”

“제론 님을 챙겨!”

그레고리 백작의 사람들.

그들이 무대에 난입했다.

제론은 그레고리 백작이 애지중지하는 인물이기에,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눈으로 보고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제론이 무대에 오를 때만 하더라도 승패를 논의하던 사람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치료를 받는 제론의 모습에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랭킹 10위.

사람들은 그때부터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말했다.

단순히 말뿐인 허명이 아니라, 제론은 그간 본인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패배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치열한 접전 끝에 제론이 무릎을 꿇었다면 사람들은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겠지만, 너무나도 일방적인 승부에 머리가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대 위.

로만이 우뚝 섰다.

모두가 말없이 지켜보는 상황에, 로만은 군중을 둘러보았다.

‘판은 깔렸다.’

지금까지의 대결.

본 무대를 위한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카이로는 약소국이다.

적어도 우물 안에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줄 생각이었다.

로만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1년 전. 저는 사전에 공개 랭킹전을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저 자신을 갈고닦을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제가 상대할 카이로의 랭커들이 저를 맞이할 준비를 하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모습입니다.”

패자에 대한 예우는 없었다.

제론을 조롱했다.

그가 얼마나 형편이 없는지를, 로만은 대놓고 강조했다.

“랭킹 10위라고 평가받던 제론을 쓰러트리고 알았습니다. 니콜라스 백작님 외에는, 카이로에서 제 검을 받아 낼 적수가 없다는 것을. 고로, 의미 없는 과정을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3일 뒤. 오늘 이 자리에서 9위부터 2위의 랭커를 차례로 상대하겠습니다.”

순간.

사람들이 경악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귀로 듣고도, 머리가 이해하질 못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쓰러트리고, 카이로 제일 검에 도전하겠습니다.”

로만의 발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간 상식을 벗어난 행보를 보여 주었던 로만 드미트리였지만, 이번 발언은 정도를 과하게 넘어섰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오만하다 못해,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 * *

카이로가 발칵 뒤집혔다.

로만의 선전포고.

99위부터 차례로 쓰러트린 것도 대단한 일인데, 최상위 랭커들을 연달아 상대하겠다는 발언을 내뱉었다.

충격적이었다.

해당 발언의 주인공들은, 곧바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걸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기권할 생각이었습니다. 저와 제론은 실력에서 크게 차이가 없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제론을 압도적으로 쓰러트리지 않았습니까?”

랭킹 9위의 브루노였다.

그날.

브루노는 현장에 있었다.

로만을 상대할 것을 대비해 미리 정보를 얻으려는 속셈이었는데, 일방적으로 밀리는 제론의 모습을 지켜보며 겁을 먹고 말았다.

이건 자신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어차피 패배가 뻔히 예견되는 싸움인데, 굳이 객기를 부렸다가 제론과 같은 험한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

랭킹 2위의 오스카가 말했다.

“그래도 기권은 할 수 없습니다.”

“오스카 님!”

“이 자리에는 국왕파를 따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가 니콜라스 백작을 상대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결과적으로는 힘을 들이지 않고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제론 님을 조롱했습니다. 그가 랭킹 10위에 부합하는 실력자가 아니라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깎아내렸고, 우리 모두를 같은 날에 상대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번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니콜라스 백작을 상대로 패배한다면,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해 보지도 않고 2위의 자리를 내준 우리를 겁쟁이라며 조롱하겠지요.”

이번 사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부터, 섣불리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럼 정말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겠다는 말입니까?”

랭킹 5위의 말이었다.

다들.

로만의 발언에 화가 났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99위부터 10위까지 도달한 괴물이다.

이렇다 할 휴식도 없이 카이로의 랭커들을 쓰러트리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보며, 카이로의 랭커들은 같은 검사로서 존경심이 일었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언제고 대륙에서 활약할 재능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릴 뿐이지, 그의 재능만큼은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카가 말했다.

“예, 직접 상대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소집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자신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무조건 희생을 강요하는 제안이라 조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제 앞에 도달할 때까지 최대한 체력을 깎아 주십시오. 그에 대한 보상은 제가 모시는 베네딕트 후작님이 확실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눈빛이 변했다.

2위로서의 자존심.

베네딕트 후작이 로만을 탐내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길을 열어 주고 싶지 않았다.

“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겠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길 수 없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오스카의 말에.

랭커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희생하는 역할.

탐탁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놓고 도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애초에 이 자리에 모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판은 이미 깔렸다.

뒤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스카 님의 계획을 따르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 천둥벌거숭이에게 현실의 벽을 보여 줍시다. 뭐? 차례로 우리를 모두 쓰러트리겠다고? 장담하는데, 오스카 님에게 도전하기 전에 제 선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끝장내겠습니다!”

“맞습니다! 힘을 합칩시다!”

의욕을 불태우는 랭커들.

세력을 떠나.

그들은 타도(打倒) 로만 드미트리를 부르짖으며, 밤이 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 * *

정확히 3일 뒤.

로만은 약속한 장소에 나타났다.

인파에 둘러싸인 채로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이로의 랭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브루노에 오스카까지! 정말 2위부터 9위까지 전부 나타났어!”

“설마 로만 드미트리의 도발에 응할 줄이야. 이렇게 되면, 누가 이길지 예상할 수 없겠는데?”

제론과의 대결.

사람들은 로만을 쓰러트릴 존재는 니콜라스 백작이 유일하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차례로 8명의 검사를 상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도 어디 이름도 모를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라, 9위인 브루노만 하더라도 한때 카이로 왕국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검사였다.

서부 전선에서 브루노의 이름을 말하면 모두가 알아주었다.

강대국인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도, 브루노는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8명의 검사.

그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로만은 그들을 바라보며, 3일 전에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가 은밀히 병력을 소집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의 목적은 반란이 아니라 나겠지. 내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베네딕트 후작은 분명히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예상했던 바다.

귀족파.

그들이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따르는 세력들은 어떻게 건드리기가 힘들지만, 혹시라도 제3의 세력을 형성할지도 모르는 존재들은 미리 싹을 잘라 버렸다.

그렇게 국왕파를 궁지에 몰았다.

카이로 왕국에서는, 귀족파를 따르지 않는다면 절대 살아갈 수 없도록 환경을 만들었다.

재밌었다.

눈앞의 랭커들.

국왕파가 한 명도 없기에, 그들은 각기 다른 세력을 따르면서도 서로 힘을 합치는 결정을 내렸다.

이게 현실이다.

국왕파가 아니라면.

귀족들은 언제든 하나가 되었다.

‘카이로의 권력 체계는 내게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막다른 길이다. 저들을 집어삼키느냐, 잡아먹히느냐.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씰룩.

웃었다.

이 순간을.

지난 1년간 애타게 기다렸다.

평화는 너무나도 길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평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피날레(finale)를 위한 첫 시작으로.

탁.

로만이 무대에 올랐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지금부터는, 직접 현실을 보여 줄 차례였다.

* * *

처음에는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작부터 빠르게 승부를 보려고 할 것이다. 8명의 랭커를 차례로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장기전은 되도록 피하고 싶겠지. 오만한 녀석. 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가 단합하지 않았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불나방처럼 달려들다가 줄줄이 나가떨어져 주었겠지.’

브루노의 목적은 하나였다.

오로지 방어.

오라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한 뒤에,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었다.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작정하고 버틴다면, 아무리 실력의 차이가 크더라도 체력 정도는 소모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서걱-

‘……?!’

첫 공방.

로만의 공격을 막는 순간, 브루노는 눈을 부릅떴다.

예상과는 다른 소리였다.

오라를 일으킨 검은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을 막았어야 했는데, 오라가 불타오르는 채로 자신의 검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시작부터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공격에, 브루노는 어떻게 대항할 새도 없이 자신의 가슴팍을 파고드는 감촉을 느꼈다.

푸확.

피가 튀었다.

죽이진 않았다.

하지만 가슴팍을 가르는 검에, 브루노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

정적이 내려앉았다.

격렬한 승부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제론과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끝난 승부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아직은 첫 대결이었다.

브루노야 그렇다 치더라도, 랭킹 8위부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카앙-!

검이 튕겨 나갔다.

8위의 검사는 전력을 다해서 로만의 공격을 막았지만, 브루노처럼 검이 잘리지만 않았을 뿐 제대로 막아 내지는 못했다.

그것이 8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로만의 주먹이 복부를 파고들자, 그는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는 내장을 모두 쏟아 낼 것처럼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 냈다.

“다음.”

겨우 1분 만에.

세 번째 차례에 도달했다.

7위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무대에 올랐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정신줄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퍽-

압도적이었다.

로만의 오라는 5성의 오라로도 막아 낼 수 없는 파괴력을 보였고, 그걸 어떻게 막아 낸다고 한들 후속 공격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랭킹 7위도 한 시대를 풍미한 사내였다.

흔하디흔한 무명 검사처럼 쓰러질 존재가 아니건만, 피를 흩뿌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말을 잃어 갔다.

“다음.”

네 번째 차례.

다섯 번째 차례.

여섯 번째 차례.

대결이 진행되었다.

밤새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던 계획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무대에 올라오는 족족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느 정도 상식에 부합하는 결과여야 감탄하는 반응을 보이겠는데, 이건 너무 압도적이어서 지켜보는 이들도 겁을 먹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로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천마 백중혁은 로만 드미트리의 몸을 차지하고서, 단시간 만에 버틀러를 쓰러트릴 무력을 갖추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될까?

겨우 1년도 되지 않는다.

사람들을 경악시킨 행보는, 그 짧은 시간에 이루어 낸 결과였다.

그리고.

지난 1년을 보냈다.

사람들은 1년 전의 로만을 기억하겠지만, 현재의 로만은 아주 많은 변화를 맞이한 상태였다.

애초에 이번 계획을 구상하면서, 오스카를 비롯한 검사들은 특별한 계획도 필요하지 않은 잔챙이에 불과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대륙 랭킹에는 이름도 올리지 못한,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었다.

퍽-

3위의 랭커.

그가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모습에, 그 뒤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그중에는.

창백한 얼굴의 오스카가 있었다.

앞선 차례들이 체력을 빼 준다면 무조건 승리하겠다고 단언했던 그는, 중천(中天)에 떠오른 해를 바라보며 넋을 잃어버렸다.

정오에 시작한 대결이다. 아직 해는 그대로인데, 무대는 피로 흥건했다.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다음.”

사형 선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오스카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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