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공개 랭킹전 (4)
이번 공개 랭킹전.
단순히 자신을 증명하려는 의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할라 제국은 랭킹이라는 시스템을 옥석(玉石)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남들보다 먼저 알려지지 않은 인재를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은, 발할라 제국으로서는 엄청난 이득이 되겠지.’
발할라의 목적.
자신의 경험이 증명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직 저평가되었을 때, 그들은 발할라 신전을 통해 로만의 가치를 알아보고 접근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발할라 제국은 ‘랭킹’이라는 자국만의 문화를 대륙에 널리 퍼트렸고, 사람들의 명예욕을 자극해서 완전히 자리를 잡도록 판을 깔았다.
그 결과.
랭킹은 대륙의 문화가 되었다.
실력이 있는 검사들은, 너도나도 랭킹 순위에 이름을 올리길 바랐다.
생각해 보라.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무명의 실력자들이 알아서 본인을 드러내는 장치라니.
발할라 제국으로서는 먼저 랭킹 시스템을 선점했기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신전의 문들 두드리는 인재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발할라 제국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대륙 곳곳의 인재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크로노스 제국에 버금가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
현재 자리 잡은 체계를 로만 또한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카이로 랭킹에 올라와 있는 랭커들은, 이미 검증을 끝마친 아주 매력적인 매물들이었다.
‘랭커들은 소속이 있는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다. 나는 이번 랭킹전을 통해서 그들의 가능성을 판단할 것이다. 99위부터 1위까지. 그들 중에는 반드시 드미트리에 필요한 인재가 존재할 것이다. 나는 공개 랭킹전이라는 명분을 통해 그들을 내 앞으로 불러들이고, 또 실력을 확인할 자리를 가질 수 있다.’
일거양득(一擧兩得).
매력적인 계획이었다.
로만은 일부러 판을 키웠고, 자신을 상대하는 랭커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면서 포기를 종용했다.
앞으로.
드미트리는 카이로의 권력자들을 비롯해 외세의 세력들에 맞서야만 한다.
상식적으로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판을 이겨 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명성에 겁을 먹고 뒤로 빠지는 녀석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도 자신을 마주하는 존재들.
그들 중에서 옥석을 가릴 생각이었고, 30위의 수문장이라고 불리는 페르난도는 로만의 흥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페르난도를 노력의 한계라고 표현한다지.’
약점에 대해서는 들었다.
오라의 분출.
신체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 봐야 알겠지만, 로만의 관심을 끈 것은 페르난도의 스토리였다.
번번이 벽에 막히는 상황에도 페르난도는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베르토프에게 패배한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텐데도, 페르난도는 여전히 30위의 수문장을 자처했다.
처음에는 의구심이 있었다.
현실을 인정한 패배자가 아닐까.
그런데 직접 만나 보니, 열등감이 끓어오르는 페르난도의 눈빛은 절대 패배자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열등감을 좋지 않은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열등감은 자신의 부족함을 이겨 내려는 욕구에서부터 시작되고,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따라잡기 위해서 끊임없이 갈망한다. 열등감은 인간으로서 솔직한 감정이다.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마음에 들었다.
끝까지 발악하는 페르난도를 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마음속에서 합격점을 매겼다.
그래서 전음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알려 주었고, 대결이 끝나고 그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페르난도,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페르난도의 외침.
그것은, 로만이 바라던 그림이었다.
* * *
자리를 옮겼다.
페르난도의 태도는 공손했다.
막막했던 현실에 내려온 한 줄기의 희망에, 그는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제 문제점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제가 오라의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그것이 오라의 분출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문이었다.
상대는 겨우 20대 중반이다.
그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론의 영역은 연륜이 녹아들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로만이 말했다.
“단순한 문제다. 네가 4성의 오라를 사용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그만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오라의 위력과는 다르게 분출되는 힘은 비정상적으로 약했다. 오라의 파괴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라의 분출이 미약했고, 그렇다면 분출하는 과정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겠지. 나 또한 확신하고 말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높은 확률로 오라의 통로가 문제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대단하시군요.”
순수하게 감탄했다.
카이로의 영웅.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떤 삶았던 것일까.
자신보다 살아온 날이 짧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는 경험이라는 단어가 방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로만의 하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페르난도는 한참을 망설이다,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방식에서 저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라의 분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지만,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모릅니다. 만약 완벽한 해결책을 알고 있는 것이라면. 제게 그 방법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50대의 나이.
상대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렸다.
그런데도 고개를 숙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방법을 알려 주는 호의를 보였고, 페르난도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검사로서 욕심이었다.
부와 명예를 바랐다면 진즉에 귀족파와 같은 권력자에 붙었겠지만, 검사로서 발전하길 바라기에 그는 항상 30위의 수문장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로만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페르난도는 로만을 바라보았고, 무엇이든 대가를 치르겠다는 눈빛을 보였다.
“다만, 나는 대가 없는 거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너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겠지.”
“원하는 것을 말씀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명확하다. 페르난도라는 사내가, 나를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목적을 밝혔다.
페르난도라는 이름의 검을.
로만이 탐냈다.
발할라 제국이 남들 몰래 로만 드미트리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 페르난도를 향한 욕심을 드러냈다.
거절한다면 주저 없이 걸음을 돌릴 것이다.
충성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로만의 방식이었지만, 로만의 제안을 받은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 페르난도,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크리스.
케빈.
그리고, 로만을 따르겠다고 말하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존재다.’
흔들림 없는 음성.
자신을 내려다보는 확고한 눈빛은, 로만을 믿어도 된다는 확신을 부여했다.
그날.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의 실세들이 끊임없이 구애하던 페르난도를 얻었다.
공개 랭킹전 과정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
카이로의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로만의 계획은 점점 절정의 단계로 향하고 있었다.
* * *
지난 며칠.
카이로가 들썩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페르난도에 이어 상위 랭커들을 하나씩 무너트리자, 귀족파가 한자리에 모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러다 정말, 니콜라스 백작을 이기는 거 아닙니까?”
니콜라스.
로열 나이트이자 카이로 제일의 검.
사람들은 니콜라스 백작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지만, 로만의 행보는 그간 상상치도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히 랭킹전에서 몇 번 승리한 것이 아니다.
99위부터 차례로 쓰러트리며 상위 레벨까지 올라왔으며, 상위 랭커라고 불리는 검사들도 로만을 상대로는 일방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의 정상에서 군림하는 니콜라스 백작에게 도전할 자질을 갖추었다.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다. 니콜라스 백작은 대륙 랭킹에서도 무려 80위 해당하는 강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버틀러를 쓰러트린 전적이 있다지만, 니콜라스 백작을 상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대륙 랭킹.
끝자락과 80위는 천지 차이였다.
그리고.
“사실 그간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행보는 큰 의미가 없다. 버틀러를 쓰러트리며 5성 검사라는 사실을 입증했기에, 11위권 밖의 검사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공개 랭킹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10위부터는 전혀 다른 수준의 검사들이 버티고 있기에, 그들마저도 쓰러트린다면 그제야 로만이 니콜라스 백작에게 도전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지. 20대의 나이에 10위권이라. 우리는 공개 랭킹전이 끝나는 대로, 로만 드미트리의 영입에 사활을 걸 것이다.”
“……만약에 말입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니콜라스의 패배.
엄청난 이변이었다.
그건 단순히 새로운 정점의 출몰이 아니라, 권력의 체계가 완전히 붕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베네딕트 후작이 싸늘한 표정을 보였다.
“국왕파가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니콜라스 백작의 존재가 크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린다면,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카이로 제일의 검. 강력한 재력을 자랑하는 가문. 동북쪽 일대의 연합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세력을 구축할 완벽한 환경을 갖추었으니, 카이로 왕국의 새로운 권력 구도를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결과다. 로만 드미트리가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리고도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최악의 가능성.
모든 경우를 계산에 두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로 돌아가는 순간, 허수아비 국왕을 상대하는 것보다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지난 1년.
수많은 고민 끝에, 베네딕트 후작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만 드미트리를 제거해야만 한다.”
국가의 인재?
사람들의 시선?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전에, 반드시 그 싹을 잘라 버릴 필요가 있었다.
귀족파가 다들 심각한 표정을 보였다.
이번 공개 랭킹전.
그 결말이 로만 드미트리의 제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물론.
최악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들은 아직,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리기는커녕 10위부터는 고전하리라고 확신했다.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다들 각 가문의 병력을 비밀리에 수도로 불러들여라. 우리가 로만 드미트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그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우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야 할 것이다.”
귀족파가 음모를 꾸미는 그 시각.
로만 드미트리는, 10위의 랭커를 상대했다.
* * *
랭킹 10위와의 대결.
사람들이 떠들었다.
“과연 누가 이기려나.”
“제론은 5성의 검사야.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해도, 제론을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제론의 노련미와 로만 드미트리의 패기의 대결인가. 나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한 표. 로만 드미트리가 니콜라스 백작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제론 정도는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제론에게 한 표. 제론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처음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제론은 20년 전부터 카이로에서 활약하던 검사다.
로만 드미트리가 압도적인 행보를 보여 주었다 할지라도, 제론을 상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제론도 자신감을 보였다.
그레고리 백작을 따르는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섰다.
“정말 대단한 놈이네. 99위부터 시작해서 내 앞까지 도달하다니.”
그는 로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뿐.
로만의 대결을 지켜보고도 본인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산전수전을 경험했고, 로만 드미트리처럼 사람들이 강하다고 떠들어 대는 존재들의 목을 수도 없이 베었다.
10위의 위치는 허명(虛名)이 아니다.
사람들은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관문이라 말했고, 처음으로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승패를 고민했다.
사람들의 기대감이 차올랐다.
얼마나 대단한 승부일까.
과연 누가 승리할까.
어떻게 결과가 나오든, 이건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임을 확신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털썩.
“쿨럭.”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당당하게 무대로 올라가던 제론이.
처참한 몰골로 무릎을 꿇었다.
로만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진득한 피를 토해 냈다.
“더 하시겠습니까?”
승부를 끝내지 않았다.
로만은 벌써 세 번의 기회를 주었다.
검으로 복부를 가격했을 때.
로만이 한발 물러나자 제론은 분개했다.
얼굴을 가격당했을 때는.
이게 현실인지를 의심했다.
그리고 지금.
제론은 겁에 질렸다.
분명히 본인의 승리를 확신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자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고 말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제껏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귀족파를 비롯한 카이로의 사람들.
그들은 모두 10위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맞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이 승패를 의심하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힘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항복하겠습니다.”
고개를 떨구는 제론.
충격적인 결과에,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