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4화 (264/615)

264화 제1차 대륙 전쟁 (2)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벰포드 공작의 긴급 호출에, 전초 기지에서 대기 중이던 베헤모스의 마법사들이 모두 소집되었다.

제1 방어 진지에 모인 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의 독’이라는 정보는, 한때 베헤모스 마탑의 근간을 흔들었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

마테오가 말했다.

“현재 제1 방어 진지를 비롯한 크로노스 동부 여덟 개의 방어 진지에서 모두 중독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만 드미트리가 사용하는 독은 큐어 포이즌으로도 해독이 쉽지 않기에,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피해가 급속도로 발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에도 로만 드미트리, 그 빌어먹을 녀석이라니.”

베헤모스 마탑주였다.

잦은 실험으로 거멓게 변한 피부에, 양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은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실제로도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찰튼 남작의 의뢰로 받았던 로만 드미트리의 독을 해독하는 동안, 사람들은 베헤모스가 독도 해독하지 못한다면 존재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엄청난 굴욕이었다.

독을 강점으로 내세운 세력이기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베헤모스 마탑주가 말했다.

“이번 임무에 사활을 걸어라. 불가능하다는 말은 허락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해독을 시작한다.”

마탑주를 포함, 총 서른두 명의 마법사.

그들이 베헤모스의 전력(全力)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독을 사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마법사를 동원하였고, 그들이 뱀포드 공작이 만들어 준 실험실에서 해독을 시작했다.

참으로 기괴한 장면이었다.

서른두 명의 마법사들 앞에는 독에 중독되어 있는 병사와 이미 죽어 버린 시체가, 실험을 위해 하나씩 누워 있었다.

“큐어 포이즌.”

화악.

베헤모스 마탑주가 마나를 일으켰다.

살아 있는 병사와 시체 각각에 마나를 불어넣었고, 능숙한 컨트롤로 독의 근원(根源)을 찾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기존의 체계를 완전히 부정하는 생소한 독이다. 보통 새로운 독을 하나 개발하기 위해서는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떻게 이런 독을 보유하고 있는 거지? 그 어린 나이에 6성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모든 시간을 검술 훈련에 매진해야 할 텐데, 독을 개발할 여유가 있었다는 건가.’

짜증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직접 개발했든, 아니면 기술자를 보유했든.

베헤모스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존재가, 베헤모스가 범접하기 힘들 정도의 기술력을 갖추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해독에 전념했다.

머릿속의 지식을 동원해 독의 성분을 분석했고, 큐어 포이즌의 기운을 활용해서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독이 분해되는지를 찾았다.

그 과정은 느리지만, 차근히 진행되었다.

대륙에서 독의 정점이라 불리는 베헤모스의 마탑주기에, 그동안의 지식은 새로운 영역을 차츰 허물었다.

그런데.

양쪽의 기운을 동시에 다루던 그의 얼굴에, 순간 균열이 일었다.

“이, 이게 무슨.”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해독을 진행할수록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보였다.

당황한 베헤모스의 마탑주가 수차례 사실 여부를 확인했는데도, 쌓여 가는 정보는 더욱 강력한 확신을 부여할 뿐이었다.

‘독이 하나가 아니다. 최소 두 개. 살아 있는 병사와 시체가, 서로 다른 독에 중독되어 있다.’

소름이 돋았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당황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의 독 모두 본인이 아는 상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한두 개까지는 새로운 것을 개발했다고 어떻게 넘어갈 수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처음 보는 종류의 독을 연속해서 선보였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일었다.

머릿속으로 번져 나가는 하나의 상상에, 베헤모스 마탑주는 해독을 중단하고 황급히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켜라!”

“마, 마탑주님?!”

베헤모스의 마법사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마탑주는 금방 독의 차이를 알아냈지만, 그는 아직 독이 여러 개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화악.

마나를 일으켰다.

그렇게 한참을 매달리던 베헤모스 마탑주가, 충격으로 얼룩진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마테오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베헤모스의 마법사들도, 마탑주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해독 작업을 마치고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보며.

베헤모스 마탑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독의 종류가 모두 달라. 로만 드미트리, 이 미친 새끼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을 한두 개 사용한 것이 아니라고!”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음성.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마법사들이, 창백한 안색을 보였다.

* * *

한참을 해독에 매달린 끝에.

베헤모스 마탑주가 상부에 포고했다.

“여덟 개의 방어 진지에서 32종류의 독이 발견되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해독을 방지하기 위해 영악하게도 다양한 종류의 독을 사용했는데, 문제는 32종류의 독 전부가 샐러맨더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방식의 독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찾아올지는 몰랐습니다만, 단언컨대 로만 드미트리는 ‘독’이라는 영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주신다면 어떻게 하나씩 해독에 성공하겠지만, 당장 전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32종류의 독을 모두 해결할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독 불가.

그의 판단이었다.

절망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뱀포드 공작은 표정이 굳었다.

‘자존심이 강한 베헤모스의 마탑주가 패배를 시인하다니. 해독을 닦달한다고 한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빠르게 판단했다.

로만 드미트리.

과물 같은 녀석이었다.

라스칼을 공격해 일만의 병력을 몰살시키더니, 몰래 독을 살포해 수만의 병력을 사지에 몰아넣었다.

게다가 ‘독’이라는 수단은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리 전쟁이 반인륜적인 행위라지만, 대륙법에는 엄연히 다수를 살상하는 독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그렇기에.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화가 미친 듯이 났지만, 지금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였다.

뱀포드 공작은 부관을 불러 명했다.

“독에 중독되어 있는 병사들을 모두 격리하고, 시체들은 화장해서 문제의 여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차단해라. 그리고 지금부터 제국의 병사들은 방어 진지에 있는 식수와 같은 모든 것들의 사용할 철저히 금할 것이며, 번거롭더라도 식수는 멀리 흐르는 강에서 조달해야 한다. 또한. 병사들이 이와 관련해 혼란에 빠질 수도 있으니, 백인장(百人將)들을 불러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문제가 잘 해결되고 있다는 확신을 주어라. 진실은 달라도 좋다. 그들의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갈지라도, 누군가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명령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시선을 돌렸다.

빠르고 명확한 판단이었다.

전장에서 지휘관의 망설임은, 단 1초의 시간이 명령이 전달되는 동안 얼마나 큰 혼란으로 돌아오는지를 그간의 경험이 말해 주었다.

그렇기에 매번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 않았다.

과감하더라도, 포기해야 할 것들은 확실하게 버릴 필요가 있었다.

독의 전문가.

베헤모스 마탑주의 판단이었다.

뱀포드 공작은 자신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에, 베헤모스 마탑주와 같은 전문가들의 판단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이야말로 지휘관의 본분이었다.

수많은 전쟁을 경험하며, 뱀포드 공작이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만의 능력이 아니었다.

판단은 옳았다.

독으로 인해 약 십만에 달하는 병사가 죽었다.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로 엄청난 피해였지만,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매우 다행인 상황이었다.

방어 진지는 수만의 병력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다.

일부는 외부에 진지를 설치해서 식수를 인근에 있는 강에서 조달했기에, 병력 전체에 독이 퍼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베헤모스의 마법사들이 빠르게 격리하고 정화 마법을 사용하면서, 전염을 통한 전파도 최소한으로 막아 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들의 역할이 아예 소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확한 대응은, 수십만이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그나마 이 정도로 해결했다.

상황을 정리하고.

상부에 보고를 끝낸 뱀포드 공작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 드미트리에 연락해서 만남을 주선하라. 그들에게 물어야겠다. 대륙법에서는 엄연히 전장에서 독의 사용을 금하고 있건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만약 그들의 해명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 * *

크로노스의 대응.

예상대로였다.

서부의 지휘관, 반덴버그 후작이 말했다.

“크로노스가 대화를 요청했다. 참으로 재밌는 상황이지. 그동안 대륙법의 존재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만행을 벌여 왔던 그들이, 막상 본인들의 문제에는 대화를 통한 책임을 묻겠다니.”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크로노스 제국입니다.”

참모진의 수장, 노엘 남작이었다.

독.

참 난감한 문제였다.

전쟁이라는 것은 보통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지만, 만약 대량 살상을 유발할 수 있는 독의 사용을 허락한다면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대륙법에는 독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만약 그와 같은 사항들에 대한 제재가 없다면,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무분별한 독의 사용으로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들의 학살이 이루어질 것이다.

최소한의 선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드미트리가 넘었다.

플로라 로렌스가 말했다.

“독의 사용이 문제가 되리라는 사실을 저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번 일은 발할라와 같은 제3국의 참전을 유발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저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문제는 눈앞의 상황입니다. 크로노스가 뭐라고 떠들든, 저희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부 전선.

이곳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없었다.

그는 그만의 계획을 이행하러 떠났고, 서부에 남은 병력은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독을 사용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이탈은 엄청난 전력의 상실이고, 사실 그가 있다고 할지라도 정면에서 부닥친다면 이번 전쟁의 승산은 희박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도박이 필요했다.

드래곤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라스칼을 기습 공격.

전초 기지를 함락시킴으로써 기선을 제압하고, 로만 드미트리가 시선을 집중시킨 사이에 크리스를 비롯한 병력은 여덟 개의 방어 진지에 침투했다.

양동작전(陽動作戰)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로만 드미트리의 추격에 열을 올리는 덕분에, 침투와 독의 살포는 어렵지 않게 성공시켰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플로라 로렌스는, 자신의 발언을 이어 갔다.

“크로노스 제국의 대응은 저희의 예상보다 빠릅니다. 겨우 며칠 만에 문제를 수습했고, 의도적으로 대화를 요청해 독이라는 명분을 빌미로 삼아 왕국 연합의 참전을 막으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의 대화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적어도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계획을 구상하며.

적들의 대응에 따른 선택지를 마련했고, 이는 그중 하나였다.

반덴버그 후작이 말했다.

“그렇다면 며칠 뒤. 그들과의 대화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 * *

며칠 뒤.

대화는 국경에서 이루어졌다.

뱀포드 공작은, 호위 한 명 대동하지 않고 홀로 나타났다.

누구도 그가 무모하다고 여기진 않았다.

전쟁 도중에 국가 간의 대화를 진행할 때, 대표의 목숨은 반드시 보장되어야만 한다.

독의 사용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무분별한 학살을 유발할 수 있는 독의 금지는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망이라면, 대표자의 목숨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안위 자체가 걸린 문제였다.

만약 전쟁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휴전(休戰)을 원하는 경우, 적어도 대표자는 안전하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뱀포드 공작은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장한 체격에, 당당한 태도는 서부 전선의 병력을 압도할 만큼 강렬한 기세를 풍겼다.

크로노스의 백전노장은 허명이 아니었다.

산전수전을 경험하며 지금의 자리에 오른 그는, 저 멀리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도 사람이 걸어왔다.

시선을 즐기듯 느릿느릿하게 걸어온 그는, 뱀포드 공작을 마주하는 상황에 먼저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파비우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익살스러운 웃음을 보이는 얼굴.

그 또한.

전쟁의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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