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615)

163화 공개 랭킹전 (2)

아침 9시경.

로만은 제이든을 상대했다.

승부는 1초 만에 결판이 났고, 정오가 되기도 전에 로만 드미트리는 98위의 상대를 마주했다.

‘제이든이 1초 만에 패배했다니.’

98위의 델리.

그가 신중한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외형은 소문처럼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자신과 비등한 실력을 보유한 제이든이 압도적으로 패배했다고 들었다.

생각해 보면 상대는 참으로 오만했다.

아침 9시에 제이든과의 대결을 예약해 놓고, 정오가 되기 전에 자신을 상대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니 말이다.

‘건방진 새끼.’

속이 뒤틀렸다.

패배하리라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나아가는 길에 재라도 뿌릴 목적으로, 그는 로만과의 대결을 받아들였다.

그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로만의 체력 소모.

어떻게든 최대한 길게 끌고 갈려는 목적이었기에, 델리는 윌라스의 대결 신호를 기다리며 최대한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마침내.

펄럭.

신호가 떨어졌다.

로만이 땅을 박찼다.

번개처럼 휘두르는 검을 막아서려던 델리는, 상대의 검이 기묘한 움직임을 그리는 것을 포착했다.

퍽-

“크억!”

고통에 찬 비명.

그것으로 끝이었다.

로만을 상대로는, 시간을 버는 행위도 최소한의 실력이 필요했다.

“……99위의 로만 드미트리가 98위의 델리를 쓰러트리면서, 98위에 랭크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경악하는 관중들.

로만은 이번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98위의 순위에 기뻐하기는커녕,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걸음을 서둘렀다.

4시간 뒤.

로만은 97위의 상대를 만났다.

하루 3번.

황당할 정도의 행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앞선 2명의 상대에게 발목이 붙잡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오로지 이동 시간만을 계산했다.

97위도 델리와 마찬가지로 분개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지간하면 로만을 위해 길을 열어 주겠는데, 제이든을 상대하기도 전에 자신과의 승부를 약속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또한.

단 3초 만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97위의 랭커는, 자신이 어떻게 패배했는지조차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3연속 승리.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하루 만에 무려 3명의 랭커를 쓰러트렸어. 아무리 최하위 랭커들이라지만, 저들은 모두 3성 이상의 경지에 오른 카이로의 실력자들이라고. 이게 말이 돼? 3명을 쓰러트리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니.”

두 눈을 의심했다.

로만은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96위를 상대하기 위해.

피로를 회복할 시간은 전혀 필요 없다는 듯이, 결과만 증명해 내고서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 버렸다.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디까지 하는지, 그들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겨우 이틀.

로만은 랭킹 91위까지 쓰러트렸다.

경악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그때, 가장 첫 제물이었던 제이든이 의식을 차렸다.

* * *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괴물에게 산 채로 씹어 먹히는 꿈을 꾼 제이든은, 식은땀이 흥건한 얼굴로 눈을 떴다.

벌떡.

“허억, 허억.”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꿈 안에서.

괴물은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했다.

어떻게든 이기려고 발악했던 제이든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목격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되었긴.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해 보겠다고 객기를 부렸다가, 단 일격도 버티지 못하고 뻗어 버린 거지. 너 그때 기절하고서 무려 하루 내내 기절해 있었어. 그나마 다행인 건 뭔지 알아? 너 이후로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한 사람들 모두가,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겨우 하루.

그런데 로마 드미트리를 상대한 사람들이라니.

제이든은 이상하다는 생각에 물었다.

“사람들이라니요. 로만 드미트리가 몇 명을 상대한 겁니까?”

우뚝.

치료사가 손을 멈추었다.

그는 제이든과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다.

제이든도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이었고, 치료사는 제이든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알았다.

로만과의 승부.

이해는 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결과에, 제이든의 선택을 옹호할 수가 없었다.

“너를 상대한 직후. 로만 드미트리는 그 하루 만에 너를 포함해서 총 5명의 랭커를 쓰러트렸어. 아침에는 99위인 너를 쓰러트리고 점심에는 98위, 해가 저물어 가기 전에 97위와 96위를, 그리고 저녁에는 95위를 쓰러트려 버렸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로만 드미트리는 5번의 대결을 위해 이동 시간만을 소모했을 뿐, 너희들을 상대로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어. 애초에 상대가 아니었던 거지.”

“……미친.”

욕이 절로 나왔다.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단단히 미쳤다.

사람들은 당연히 99위와의 승부가 몸을 사리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행보라면 정말 밑바닥에서부터 최정상을 차지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괴물이 존재하다니.

과감한 판단부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실력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천외의 존재였다.

그때였다.

따끔-

“……?!”

몸을 움직이자 통증이 일었다.

제이든이 당황한 얼굴로 치료사를 보자, 그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이 말하더군. 자신의 주군은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너, 앞으로 한 달간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거야.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부의 근육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 달.

객기의 대가였다.

로만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히는 악몽이 떠오른 그는, 심장이 쿵쿵 뛰고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다른 녀석들을 말려야 해.”

90위 이상의 랭커.

그들은 로만을 상대하려 할 것이다.

자신이 그랬듯, 그들도 상식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의 상태에, 제이든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황급히 편지를 썼다.

그 대상은, 상위권을 제외한 모든 랭커였다.

[한때 99위였던, 지금은 100위로 밀려난 제가 여러분들에게 경고합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괴물입니다. 저는 그를 상대로 단 1초도 버티지 못했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대가로 한 달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와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길 바란다면, 부디 로만 드미트리의 앞길을 막지 마십시오.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은 절대 값진 경험이 아니라 공포만을 남길 것입니다. 제발, 제가 하는 말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편지를 보냈다.

자신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며.

카이로의 하위 랭커들은, 로만이라는 괴물을 상대로 지금은 숨을 죽이고 주제를 알아야 할 때였다.

* * *

로만이 85위를 쓰러트렸을 때.

사람들은 이상함을 느꼈다.

제이든을 1초 만에 쓰러트린 것은 인정했다.

그런데 계속되는 일정에 피로가 분명히 쌓일 텐데도, 85위의 강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압도적인 승부.

사람들은 현실을 보았다.

로만이 얼마나 괴물인지, 앞선 대결을 통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쯤.

카이로의 랭커들에게 편지가 도착했다.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제이든이 보낸 편지를 보십시오! 그 무식한 놈이, 로만 드미트리를 한번 상대했다고 겁에 질린 애새끼처럼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건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경고가 아닙니다. 85위의 랭커조차도 99위처럼 허무하게 쓰러진 지금, 우리가 80대 초반의 랭커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간의 소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로만은 밑바닥에서부터, 모든 랭커들을 쓰러트릴 속셈이야.”

84위부터.

랭커들이 차례로 포기했다.

겨우 공개 랭킹전을 시작한 지 3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로만이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겁이 났다.

제이든을 비롯해 로만을 상대한 랭커들은 객기의 대가를 말해 주었고, 한 달간 몸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페널티에 다들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의 앞선 대결로 로만의 실력은 증명되지 않았던가.

혹시라도 소문이 허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압도적인 실력 앞에서 처참하게 짓밟혀 버렸고, 로만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나팔수가 되어 로만의 실력을 세상에 알렸다.

간혹.

사람들의 경고에도 로만을 상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80위의 랭커가 그러했으나, 그는 객기의 대가를 확실하게 치렀다.

콰직!

“쿨럭.”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피와 뒤섞인 침이 진득하게 딸려 나왔고, 초점을 잃어버린 눈은 로만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끝났다.

이번에도.

로만은 압도적으로 상대를 쓰러트렸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개 랭킹전.

로만은 단순히 명예만을 바라지 않았다.

랭킹전을 모두 마무리하고 나면, 베네딕트 후작을 비롯한 카이로의 실세들이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공개 랭킹전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의도였다.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만약 카이로의 실세들과 싸우는 상황이 온다면,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부여하도록. 이건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애초에 순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할라가 오로지 호승심에 랭킹에 도전하듯, 로만은 자신의 이름이 제일 위에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밑바닥에서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99명의 강자.

그들을 모두 발아래에 꿇릴 것이다.

그때는, 드미트리가 야욕을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감히 적대하지 못할 것이다.

‘공개 랭킹전은 앞으로를 위한 신호탄일 뿐이다. 샐러맨더 대륙은 언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나는 그 전에. 카이로 왕국을 완전히 내 통제 안에 넣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간과했다.

로만이 어떤 사내인지를.

겨우 변방 출신에 불과한 사내가, 설마 카이로 전체를 욕심내고 있다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그렇기에.

귀족파들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로만이 이번 행보를 통해 지치기를.

그리고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무너진다면, 그때는 로만에게 선택을 강요할 생각이었다.

아직은.

로만 드미트리가 카이로 제일의 검사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 *

정확히 일주일.

로만을 의심하던 소문들이 쏙 들어갔다.

압도적인 실력과 속출하는 포기 선언으로 인해, 로만 드미트리는 순식간에 상위 랭킹에 도달했다.

31위부터 39위까지.

30위 대의 실력자들은 모두 포기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최소 10위 이상의 실력자라고 확신했기에, 그들은 단합이라도 하듯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30위의 랭커는 로만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페르난도. 대체 무슨 짓이야!”

“너도 소문을 들었잖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했다간 몸이 성치 않다는 걸. 그 녀석은 최소 5성의 경지고, 카이로 왕국에서 10위 이상의 실력자가 아니고서는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할 수 없어. 그래서 그 밑으로는 전부 항복 선언을 하기로 했는데, 넌 대체 왜 그렇게 무모한 선택을 하는 거야!”

“진짜 말 좀 들으라고.”

같은 랭커들이 찾아와 쏘아붙였다.

그들의 말처럼.

랭커들은 단합을 했다.

누구는 항복하고 누구는 대결을 선택하는 모습에, 항복하는 사람들이 구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 같이 행복을 택했다.

어차피 1분도 버티지 못할 대결이라면, 굳이 싸울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선택이야.”

페르난도가 단호한 표정을 보였다.

30위의 수문장.

그의 별명이었다.

사람들은 30위의 랭크만으로도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페르난도는 자신의 별명이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일종의 조롱이었다.

진즉에 30위에 랭크되었으면서도, 새로운 실력자가 나타나면 순위가 하나씩 밀릴 수밖에 없는 현실.

크로노스와의 전투에서 상위 랭커 한 명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은 31위에 있었을 것이다.

“멍청한 새끼. 우리의 명성을 먹칠하면서까지 싸워야겠어?”

“말은 똑바로 하지. 너희의 명성을 먹칠한 건, 단합에 동의하지 않은 내가 아니라 지레 겁을 먹고 패배를 시인한 너희들의 나약함이야. 나 또한, 너희처럼 패배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마.”

“씨발.”

“아오, 꽉 막힌 새끼.”

다른 랭커들이 답답한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생각?

무엇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살면서 그 어떤 도전도 거부한 적이 없었다.

‘저들과 나는 다르다. 태생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이들은 목숨을 걸고 노력하지 않아도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향상되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퇴보할 수밖에 없다.’

페르난도.

사람들은 항상 의문을 표했다.

검술 실력은 대단한데, 대체 왜 만년 30위일까.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인데, 페르난도는 태생부터 마나의 분출이 원활하지 않았다.

4성의 경지에 오르고도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문제점.

그게 바로 만년 30위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고, 마나의 한계에 봉착한 그로서는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바로 경험이었다.

수많은 강자와의 싸움.

그것을 토대로 경험을 쌓았고, 자신만의 실전 검법을 만들었다.

마나로는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검술 실력으로 상대보다 우위를 점하려고 했다.

그 결과가.

30위라는 순위였다.

4성 아래의 실력자들은 검술 실력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었지만, 오라의 위력에서부터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는 강자들을 상대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천재가 나타날 때마다 페르난도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한결같이 그 순위에 머무르냐면서 조롱하지만, 페르난도로서는 이를 악물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사실.

도전을 회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모든 도전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경험에 뭐라도 하나 추가되기를 바랐다.

‘소문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의 검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도가 대단하다고 했다. 내 실력으로는 상대의 공격을 몇 번 막아 내지 못하겠지만, 나는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면서 조금이라도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뿐이다. 랭커로서의 명성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랭킹은 허울일 뿐이다.

결국, 검사는 실력으로 말했다.

동료들이 물러나고.

페르난도는 검술을 훈련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해가 저물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페르난도의 정체성이었다.

나무늘보.

정체되는 실력에 붙은 별명이지만, 그는 나무늘보처럼 게으르지도, 그렇다고 정체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상상 속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에 빠진 페르난도는,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검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후우.”

폐부 가득히 맑은 공기가 들어왔다.

밤을 지새웠지만, 피로한 느낌은 없었다.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는, 진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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