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학살의 밤 (5)
사방이 불이었다.
파블로 백작이 호흡을 들이킬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밀려들었고, 사방을 둘러봐도 살아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차라리 다른 이들처럼 단칼에 죽었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가 남기고 간 두 가지의 선택지에 그는 혼란에 빠졌다.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아니.
가능할지라도, 그 선택의 대가는 처참했다.
크로노스 제국은 상벌이 확실한 나라고, 전공을 이루면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대신에 패배의 대가는 죽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일만의 병력을 잃은 패장이다.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만 라스칼을 잘 관리했으면 됐는데, 그 짧은 시간에 이곳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고 무사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아마 연대 책임을 물을 것이다.
파블로 가문의 핏줄 모두가 처형대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실을 부정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라스칼의 일을 제국에 알려야만 한다.’
로만 드미트리.
잔인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예상하고, 그는 마법 통신기를 눈앞에서 부숴 버렸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크로노스 제국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성문에서 멀어지는 일임을 알면서도 파블로 백작은 뜨거운 열기 속으로 뛰어들었고, 한참을 뛰어 자신이 머무르던 건물 앞에 도달했다.
화르르륵.
건물이 불타올랐다.
일부는 무너지며 섬뜩한 모습을 보였으나, 파블로 백작으로서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옷에 붙는 불길을 손으로 털어 내며, 불길에 휩싸인 건물 속에서 고정식 마법 통신기를 찾았다.
그리고 곧바로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라스칼의 지휘관인 파블로 백작입니다. 급히, 라스칼의 상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시간 전, 로만 드미트리가 라스칼에 불을 질렀습니다. 저는 지휘관으로서 로만 드미트리를 제압하고자 했으나, 일만의 병력이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숨을 한번 골랐다.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라스칼의 병력이 전멸한 이유는 특별한 작전도, 적의 함정에 당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 개인의 무력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죽음을 통해 이번 일의 심각성을 알았으면 합니다. 그동안 크로노스 제국을 위해 충성하면서,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괴물은 단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크로노스 제일검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승산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화륵.
화르르르륵.
불길이 들이닥쳤다.
뜨거운 열기에 신음을 삼킨 파블로 백작이, 죽음을 각오하고 소리쳤다.
“로만 드미트리를 반드시 처리하십시오. 이번 기회에 드미트리를 무너트리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드미트리는 제국의 앞날을 방해할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천장이 무너졌다.
파블로 백작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불타오르는 잔해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진 사이.
크로노스의 전초 기지인 라스칼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 * *
사건 발생 1시간 전.
크로노스 제국의 실세 중 하나인 멤피스 후작은, 왕실 기사단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라스칼을 공격했습니다. 많은 병력을 대동한 것 같지는 않지만, 불을 지르고 라스칼의 혼란을 유도하는 상황에 파블로 백작이 로만 드미트리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탁.
멤피스 후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드미트리의 기습적인 공격에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참 대담한 녀석이야.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먼저 병력을 움직여 공격할 생각을 하다니. 그가 어떤 의도로 이번 일을 행했든, 이제껏 우리가 상대했던 존재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
“……황제 폐하에게 보고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크로노스는 대국(大國)이다.
이만한 일에 호들갑을 떨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황제 폐하가 침소에 드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황제 폐하는 잠을 방해받는 것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으시니, 이번 일은 내 선에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라스칼에 병력을 보내라. 그림자들과 3기사단을 동원하고, 방어 진지에 있는 이들에 명령해 로만 드미트리가 도망칠 퇴로를 모두 차단하라. 크로노스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감히 크로노스 제국의 영토에 발을 들인 녀석들을, 살려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명을 받듭니다.”
기사가 물러났다.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약 6시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면 그 안에 라스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의도한 바를 이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라스칼에 집결해 있는 병력은 무려 일만.
그리고 방어 진지에도 그만한 병력이 대기하고 있기에, 순식간에 로만 드미트리를 집어삼킬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형성될 것이다.
그런데.
겨우 1시간 만에, 명령을 받았던 기사가 창백해진 몰골로 나타났다.
“멤피스 후작님! 파블로 백작이 음성 메시지를 보냈는데, 라스칼의 병력이 모두 전멸당했다고 합니다!”
전멸.
예상치도 못한 결과에, 여유를 부리던 멤피스 후작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 * *
일만.
압도적인 숫자다.
실제로 그만한 숫자가 눈앞에 나타나면,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에 일만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멤피스 후작은 황제를 깨우면서까지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전면전도 아니고, 6시간 안에 일만의 병력을 모두 처리할 방법은 없었다.
겨우 1시간.
파블로 백작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라스칼의 병력이 전멸되었다는 말에, 멤피스 후작으로서는 더는 차나 마시면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멤피스 후작이 말했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라스칼의 전멸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현재 라스칼은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으며, 방어 진지의 병력이 로만 드미트리를 붙잡기 위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빠르게 보고했어야 했는데, 일만의 병력이 이렇게 빨리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크로노스 황제.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단잠을 방해받은 황제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무심한 표정으로 멤피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멤피스 후작.”
“말씀하십시오.”
“로만 드미트리의 이번 행보를 어떻게 생각하나. 전쟁을 선포했기에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나, 나는 로만 드미트리가 내게 명확한 메시지를 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대륙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듯. 제국을 상대로는 먼저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드미트리는 대담하게 라스칼을 공격했다. 그리고, 전멸이라는 결과로 확실한 성과 또한 보여 주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제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일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매번 파격적이었다.
드미트리가 남작 가문일 시절에도 크로노스 제국의 회유를 거절했고, 베네딕트 후작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성문을 열어 반격까지 시도했다.
그때의 일로 크로노스 황제는 로만 드미트리의 암살을 공표했다.
보통은 겁에 질려서 성벽 뒤에 숨는 것이 옳은 일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역으로 암살자들을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발할라행을 떠나는 대담함을 보였다.
단 한 번도.
물러섬이 없었다.
오히려 치고 나가며, 크로노스 제국의 의도를 박살 냈다.
“드미트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스벤이 죽었다. 문제는,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데도 6성의 검사가 당했다는 것이다. 크로노스 제국은 그동안 승리의 역사를 썼던 나라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난 이후로, 우리의 역사가 더럽혀지고 있다.”
담담한 음성과는 다르게.
멤피스 후작은 감히 올려다볼 수 없었다.
굳이 분노를 표출하지 않아도, 크로노스 황제의 말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미스틱.”
“예.”
구석 한편에서.
로브를 눌러쓴 존재가 나타났다.
몸이 불편한 듯 걸음이 어색했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며 황제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병력을 집결시키고 저희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드미트리와의 전쟁을 시작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병력을 일으킬 것입니다. 드미트리를 공격한 일에 ‘그 존재’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그들은 저희의 계획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그들.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그동안 완벽한 대륙 정벌을 위해 때를 기다렸지만,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나타나면서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분노가 일었다. 감히 크로노스 제국에 적의를 드러낸 존재가, 본인이 승리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드미트리로 돌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고로.
“전쟁을 준비하라. 심연의 악마들을 불러들이고, 우리는 이번 기회에 ‘그들’마저 쓸어버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결단을 내렸다.
로브 속 미스틱은 환한 표정을 보이며,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크로노스 황제가 멤피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대륙이 ‘왕국 연합’과 같은 같잖은 존재들 때문에 간신히 균형이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들에게 잔인한 현실을 보여 줄 것이다. 1기사단을 제외한, 크로노스의 모든 기사단을 소집하라. 그리고 제국의 마탑들에게도 강제 소집령(召集令)을 선포하라. 전쟁이다. 드미트리를 시작으로, 대륙의 모든 왕국을 크로노스의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멤피스 후작의 음성이 격정적으로 들끓었다.
마침내.
대륙의 괴물이,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 * *
어둠으로 물든 복도였다.
한 사내가 홀로 그곳을 걸어,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는 철문을 힘껏 열었다.
끼익.
안은 음산했다.
사내는 익숙한 걸음으로 들어섰고, 한편에 놓여 있는 초에 불을 붙이자 어둠이 밀려나며 주변의 공간이 보였다.
크지만 휑한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잘 관리된 양피지(羊皮紙)가 하나 있었는데, 사내는 다소 덤덤한 얼굴로 양피지의 내용을 읽었다.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의 문(門)이 열렸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차가운 기운은 세상을 얼어붙게 했고, 세상에 남겨진 재앙은 영원토록 지속되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언제고 신의 뜻을 대신할 자가 나타나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놓친다면, 세상은 영원토록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끝없는 산맥 너머.
대대로 내려오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사내.
크로노스 황제는 사나운 표정을 보였다.
“그동안 신탁을 받은 자들에 의해 대륙 정벌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두 번째 문이 열리고, 우리는 그들에 대항할 힘을 얻었다. 악착같이 버티는 것도 이제는 끝이다.”
오랜 옛날.
크로노스 황실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규율이 있었다.
성인식(成人式)을 치르는 날, 크로노스 황제는 자신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을 깨우쳤다.
성스러운 힘을 사용하는 존재.
신탁의 주인공이 나타난다고 한들, 드미트리가 날뛰는 지금의 상황을 더는 어중간한 대처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대륙의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크로노스는 힘이 부족해서 대륙을 정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미지의 존재들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제국의 전력.
사람들은 경악할 것이다.
라스칼의 일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드미트리 따위는 단번에 쓸려 나갈 것을 확신했다.
크로노스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비밀스러운 공간을 빠져나와, 자신의 침소로 가서 몸을 뉘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날이 밝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을 뜨자마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의 전초 기지인 라스칼을 공격해 일만의 병력을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드미트리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고, 크로노스 제국은 분노해 소집령을 선포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식이었다.
드미트리가 수성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공격해서 일만의 병력을 학살했다니.
그 소식에.
왕국 연합이 난리가 났다.
드미트리의 패배를 확신했던 그들로서는, 드미트리의 파격적인 행보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오델리아 국왕은, 흥분한 목소리로 통신을 보냈다.
“지금 당장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합니다!”
이른 아침.
레드포드를 제외한.
왕국 연합 삼국(三國)의 제3차 국제회의가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