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양방통행 (3)
문제는 경비대장의 보고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성문을 개방한 경비대장은, 유의해야 할 인물이 입성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입성했단 말이지?”
“예.”
“입성 목적은?”
“드미트리 가문의 하인 중에 한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전담해서 맡는 인물인데, 아델리안 영지에 거주하는 그의 손녀가 오늘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생일 파티를 위해서 여러 물품을 바리바리 준비한 것으로 봐서는, 그들의 말처럼 손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흐음.”
아델리안 백작이 의심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스는 하인일 뿐이다.
그런데 하인의 손녀를 챙기겠다고 사람을 보낸다는 것이, 귀족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인데.’
로만 드미트리.
동북쪽 일대의 실세다.
드미트리 가문에 대항하던 동북쪽 연합회를 흡수하면서, 드미트리 가문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세력을 갖추었다.
특히 로만 드미트리는 최근에 영주 대행으로 나서는 일이 많았다.
사람들은 권력의 흐름을 몰라볼 리가 없었고, 관심이 없는 척을 하면서도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집중했다.
그런 그가.
사람을 보냈단다.
아델리안 백작은, 무언가 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동북쪽 일대는 드미트리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카이로에서 소외되는 지방의 귀족들이 서로를 보호하자는 의미를 지닌 것은 맞으나, 동맹은 일종의 구속력(拘束力)을 발휘한다. 드미트리 가문 눈 밖에 난 세력들. 그들은 동맹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을 수가 없다.’
아델리안.
그들은 동북쪽 일대 가장 바깥에 있었고, 지리적인 이점 덕분에 상업의 중심지라고 불릴 수 있었다.
반대로 그것은 내란이 발발할 시에 가장 취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부분이었고, 아델리안 백작은 그 사실을 알기에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항상 신경 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부분을, 그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30분 뒤.
경비대장이 한스에 대해 자세히 알아 왔다.
“한스는 어렸을 때부터 로만 드미트리를 거의 키우다시피 한 인물입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시절에도 곁을 지켰고, 그렇게 쌓인 세월 때문인지 드미트리 가문 안에서 나름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정말 순수하게 한스를 챙기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간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확실하게 베푸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한스를 챙기는 그림은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옳거니!”
머릿속이 밝아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귀하게 여기는 인물이라면.
아델리안 가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챙겨 주는 그림은,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인의 신분?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로만이 한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때부터 한스는 하인 따위로 취급당할 인물이 아니다.
“지금 당장 가문의 가신들을 불러들여라. 우리는 지금부터 한스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할 것이다. 한스가 불편하지 않도록, 한스의 아들인 해리슨이 기뻐할 수 있도록. 그들의 행복이 드미트리 가문에 닿아, 로만 드미트리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다!”
파티 5시간 전.
아델리안 가문은 가장 빠르게 기회를 포착했다.
* * *
드미트리를 주시하는 가문은 아델리안뿐만이 아니었다.
로렌스.
그들은, 아델리안 백작보다 한발 느리게 정보를 들었다.
“영주님! 드미트리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전해 들은 내용인데, 하인 한스가 오늘 손녀의 생일로 인해서 일찍 드미트리를 떠나기로 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영주님이 드미트리 가문과 관련한 대소사를 모두 보고하려고 하셨지만, 하인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보는 완벽하지 않았다.
아델리안은 경비대장으로부터 방문 목적을 확인했지만, 로렌스로서는 그것까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로렌스 자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스라면 로만 드미트리를 전담해서 맡는 인물이다. 로만이 한스의 존재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단 세심하게 로만의 사람들을 관리해 줄 필요가 있겠지. 원래 사람의 감정이란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법. 로만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로렌스 가문에 긍정적인 감정을 가진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것은 언젠가 가장 위까지 도달하게 되겠지.’
지난 1년.
로렌스 자작은 드미트리의 대소사를 모조리 챙겼다.
처음에는 한스와 같은 사람들까지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지만, 로메로 남작을 비롯해 리한나, 조나단 기사단장과 같은 핵심 인물의 경조사에는 항상 얼굴을 비추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관심의 범위를 넓혔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사람들을 애지중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한스는 겨우 하인에 불과하지만 로렌스 자작으로서는 그걸 놓칠 생각이 없었다.
생일을 챙겨 준다는 것.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드미트리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그런 사소한 노력에서부터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한스는 경조사를 챙길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의 손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아보고, 손녀에게 전해 줄 선물을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시작은 아델리안.
그다음은 로렌스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움직인다고 생각했지만, 동북쪽 일대의 여우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귀족들. 그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로렌스 자작처럼 세심하게 챙기지 못한 그들로서는, 그래도 남들에게 뒤처지기 싫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선물을 준비했다.
선물 열풍이 열병처럼 번졌다.
생일 2시간 전.
전날의 과음으로 늘어지게 자던 콘라드 자작은, 가장 늦게 드미트리의 소식을 들었다.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영주님께서 주무시고 계셔서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에라이, 멍청한 것아. 내가 항상 말했잖아. 드미트리와 관련한 일이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무조건 보고하라고. 우리가 행한 업보가 있어서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남들보다 뒤떨어지면 어쩌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질책할 시간도 없었다.
콘라드 자작은 창백해진 얼굴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어떤 선물을 줘야 하지?’
시간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손녀를 위한 맞춤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2시간이면 선물을 전할 시간도 촉박했다.
결국.
그는 황급히 아내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내가 방긋 웃음을 보이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녀의 보석함을 덮쳤다.
“여,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며칠 전.
아내의 선물로 고가의 루비 반지를 선물했다.
그것이라면 완벽한 선물이라는 생각에, 루비 반지를 꺼내 든 콘라드 자작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그 모습에.
“이런 미친 남편네가!”
아내가 뒤에서 물건을 던져 댔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가문의 미래가 걸렸는데.
한스의 손녀가 6살인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성인 사이즈의 루비 반지를 훔친 콘라드 자작의 얼굴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가득했다.
‘이거면 생일 파티를 완전히 평정할 수 있겠지.’
이번 생일 파티.
귀족들의 선물 세례의 진실은, 바로 드미트리를 향한 과한 충성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 * *
눈앞의 선물들.
휘황찬란했다.
아내가 사용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루비 반지와 각종 사치품에, 해리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게 대체.’
선물을 준비한 마음은 감사하다.
하지만.
해리슨은 어렸을 때부터 주제를 알고 살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해리슨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의 사람들이라면 뼈에 새길 수 있을 정도로 듣는 말이었다.
괜한 욕심은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모르는 일.
순수한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어떤 의도로 귀족들이 선물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몇 선물을 제외하고는 내 딸을 위한 것들이 아니다. 이런 물건들에 욕심을 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일단 선물을 해 주셨으니 앞에서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고, 나중에 따로 전부 돌려드리자.’
생각을 정리했다.
아버지가 하인의 삶을 살았기에, 귀족의 것을 탐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잘 알았다.
“마지막 선물을 개봉하겠습니다.”
작은 봉투였다.
사이즈가 무척 작았기에, 이번만큼은 귀족의 선물이 아닌 것 같았다.
우편과 같은 소소한 선물을 기대하던 해리슨은,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헉.”
한 장의 종이.
그 안에 적힌 내용이 눈에 빨려들어 왔다.
[글로리 아카데미(Glory academy) 입학 추천서]
손이 벌벌 떨렸다.
글로리 아카데미.
명망 높은 귀족 자제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를 제외하고, 평민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교육 기관이었다.
돈이 있어도 쉽게 입학할 수 없는 곳.
해리슨은 한때 딸이 글로리 아카데미에 입학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지만, 그게 쉽지 않음을 알았다.
그런데.
글로리 아카데미의 입학 추천서를 받았다.
다른 선물과는 다른 감동이었고, 그것을 보낸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는 사실을 확인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제 딸 아이를 위해 글로리 아카데미의 입학 추천서를 써 주셨습니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이전의 선물도 대단했지만, 글로리 아카데미 추천서는 그보다 더한 영역임을 그들도 잘 알았다.
‘설마.’
해리슨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한 달 전.
아버지에게 딸의 미래에 대해서 말했었다.
그때 글로리 아카데미를 스치듯 언급했는데, 어쩌면 아버지가 입김을 불어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
아버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선물은, 한스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서프라이즈였다.
* * *
그날.
파티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로만이 걱정된다면서 일찍 드미트리로 돌아온 한스는, 곧바로 로만을 찾아가서 말했다.
“……너무 과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저는 도련님에게 특별한 선물을 바라지 않습니다. 도련님이 저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인정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제 일에 크나큰 보람을 느낍니다.”
목소리가 촉촉했다.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한스는 로만의 정성에 적잖은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로만은 한스를 보았다.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가 남긴 인연이다.’
그와의 관계.
로만이 의도해서 형성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린 시절부터 한스는 로만의 곁을 지켰고,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로만을 챙기는 걸 가장 우선으로 두었다.
그 기억을 물려받았기에. 로만은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한스라는 사람의 정성을 받아들였다.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면서 가장 처음으로 자신의 울타리에 들인 존재기에, 로만은 한스를 단순히 하인의 관계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한스.”
“예.”
“지금은 흐릿한 기억들이지만, 어렸을 때의 추억을 돌아보면 나는 아버지보다도 너와 같이 한 시간이 많다. 그때의 아버지는 막 귀족의 작위를 받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셨고, 어머니는 좋은 분이시지만 출산과 주변의 사건들로 인해 나를 세심하게 챙겨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에게 ‘한스’라는 사람은 각별하다. 단순히 신분의 차이를 떠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도련님.”
한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번 사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로만은 자신의 사람을 챙겼을 뿐이고, 힘이 생겼기에 귀족들이 선물을 보내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러한 상황을.
로만은 내버려 두었다.
자신의 후광이, 자신의 사람들을 밝게 빛내 주길 바랐다.
“사람의 감정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한스, 너는 나의 사람이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맹목적으로 순수한 감정을 주었듯, 너 또한 내가 주는 것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받아들일 자격이 있다.”
한스가 로만을 보았다.
그런 한스를 마주 보며.
로만은 웃었다.
“손녀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