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615)

158화 양방통행 (1)

펠릭스가 눈을 감았다 떴다.

수차례 예산안의 내용을 확인한 그는, 다소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감출 수 없었다.

“……이만큼이나 지원을 해 주겠다고?”

“저도 처음에는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저희가 처음 예상한 금액을 훨씬 상회하는 액수다 보니, 해당 담당자를 찾아가서 재차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상이 없답니다. 오히려 마탑의 운영비가 모자란다고 생각한다면, 예산안을 정리해서 건의하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문서 안에는.

매달 2천 골드, 매년 2만 4천 골드에 달하는 예산이 기록되어 있었다.

엄청난 액수였다.

문서상의 내용으로는 8천 명의 사람이 일 년간 먹고 살 금액을 매달 지원해 주겠다는데, 비현실적인 액수에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마법사’를 돈 먹는 괴물이라고 불렀다.

육체적인 단련으로 성장하는 오라 검사들과는 다르게, 마법사들은 높은 서클로 올라가기 위해서 마법서와 마나석 같은 고가의 물품들이 다량으로 필요하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3서클 마법사 하나를 육성하는 과정에서 최소 5천 골드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인즉.

서클이 상승할수록 필요한 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마탑들은 중립 세력인데도 불구하고 특정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국가 단위의 세력에게 기본적인 운영비를 지원받았고, 그 대가로 유사시에 힘을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귀족 가문에서도 마탑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은 가문일지라도 매달 나가는 운영비는 무시할 수 없었고, 또한 단순히 우호적인 관계만으로는 투자한 만큼의 이득을 볼 수 없었다.

결국.

줄줄이 마탑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렇게 마탑은 국력의 척도가 되었고, 크로노스 제국은 7개의 마탑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국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증명했다.

‘……어느 정도의 예산 감축은 각오하고 있었는데.’

프랑크를 떠나며.

드미트리의 지원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카이로의 대부호라고 불린다지만, 그렇다고 매달 수천 골드의 운영비를 지원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피닉스가 바라는 건 불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만으로도 드미트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고, 당분간은 마탑의 사정이 좋지 않더라도 버텨 볼 생각이었다.

사실 피닉스는 인원이 적어서 그나마 수천 골드로 끝나지, 대규모 마탑들은 매달 만 골드 이상의 돈이 깨졌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매달 예산으로 2천 골드를 제시했다.

앞으로 마법 물품 판매에 열을 올리려던 계획이, 예산 하나에 기분 좋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분은 우리를 즉흥적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심사숙고 끝에 피닉스를 드미트리로 들인 것이겠지. 매달 2천 골드면 충분히 마탑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펠릭스.

그는 진실을 몰랐다.

드미트리의 철광산 개혁 이후.

드미트리는 그야말로 카이로의 돈을 쓸어모았다.

비공식적으로 카이로 제일의 대부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남작 가문의 규모가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발렌티노 후작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허언을 내뱉는 사내가 아니었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 매달 엄청난 돈을 드미트리에 보냈다.

매달 2천 골드?

극히 일부였다.

드미트리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빠르게 규모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탑주님. 잠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드미트리 가문의 지원은, 돈뿐만이 아니었다.

* * *

넓은 부지였다.

그곳을 가리키며, 크리스가 말했다.

“일주일 후부터 공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설계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후일 피닉스 마탑이 세력을 확장할 것을 고려해 최소 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마탑에 필요한 시설들을 배치할 공간도 미리 확보했습니다. 저희가 나름대로 충분한 조사 끝에 설계도를 완성했지만,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지금 확인해 보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도 충분합니다. 아니, 과합니다.”

펠릭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게 펼쳐진 땅.

이곳에 피닉스의 터전을 일군다고 생각하자, 상상만으로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프랑크 왕국.

그들은 피닉스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약속들을 많이 어겼다.

처음에는 분명히 제국 못지않은 마탑을 세워 주기로 했지만, 마탑 건설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왕국 규모에서조차 해 주지 못했던 것을, 드미트리는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눈앞에 대령했다.

크리스가 건넨 설계도.

내용을 한번 슥 훑어본 것만으로도, 설계도 제작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조금 얼떨떨합니다. 주군이 저희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해 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한 말로 이건 귀족 가문이 감당하기에는 과한 스케일입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거액의 예산과 마탑 건설.

완벽했다.

큰 걸 바라지 않고 드미트리행을 택했는데, 이곳은 마치 피닉스를 위한 유토피아(Utopia)처럼 느껴졌다.

크리스가 말했다.

“제가 지켜본 바로는 주군의 호의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펠릭스 님 이전에,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주군의 도움으로 검사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케빈은 가족들 모두가 빈민가를 벗어나 성으로 입성했으며, 주군을 따르는 모두가 고생한 것만큼 이상의 풍족한 대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일.

로만의 수하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피닉스 마탑은 남남의 관계였지만, 지금부터 그들은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

말을 잃은 펠릭스.

그런 그를, 크리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충성을 맹세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주군은 사람을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겨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위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 *

그 시각.

한스는 아침 일찍부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없다고 해서 로만 도련님의 루틴이 조금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로만 도련님은 오전 업무를 끝내고 항상 1시간 정도 검술 훈련을 하시는데, 너는 그 시간에 맞춰 땀을 닦을 수건과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대령해야 한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드실 수 있도록 안내하고서는, 혹시라도 있을 스케줄을 정리해서 로만 도련님에게 보고해야만 한다. 그 이후에는…….”

한스의 설명에는 끝이 없었다.

한스의 후임.

머피라는 이름의 하인은, 정신없는 얼굴로 설명을 열심히 옮겨적었다.

사실 한스는 새로운 후임을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았지만, 로만의 업무가 많아지면서 본인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심혈을 기울여 후임을 선발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모시려는 사람들은 많았고,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머피가 새로운 후임으로 선택되었다.

아델리안 아카데미도 졸업한 수재.

머피는 나름 엘리트였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신입에 불과한 그는 처음부터 능숙하진 못했다.

‘대체 업무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한스의 일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두 로만 드미트리를 위한 하루였다.

평소라면 한스를 따라다니며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겠지만, 오늘은 한스가 자리를 비우는 날이었다.

한스의 외동아들.

해리슨이 낳은, 한스의 손녀가 생일을 맞이했다.

한스는 로만을 위한 업무를 모두 끝내고 아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로만이 강제로 떠미는 바람에 일찍 자리를 비우기로 약속했다.

사실 로만의 명령은 전날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고 완강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아침까지는 그가 업무를 맡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머피를 들들 볶고서야, 한스는 간단한 짐을 챙기고는 걸음을 옮겼다.

‘우리 예쁜 손녀가 관절 인형을 좋아해야 할 텐데.’

마음이 들떴다.

해리슨은 드미트리가 아니라 아델리안에 살았다.

한스의 지원으로 나름대로 아카데미도 졸업한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장사를 하겠다면서 아델리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10년. 해리슨은 식자재를 납품하는 업체를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이 되었다.

그리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델리안에서는 이름을 알아주었다.

그런 아들의 하나뿐인 손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보물이었다.

한스는 가벼운 걸음으로 성문으로 향했고, 미리 빌린 마차를 타고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스 님. 마차에 오르시지요.”

성문 앞.

예상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한스가 빌린 마차는 분명 싸구려였는데, 휘황찬란한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는 마차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드미트리의 병사들.

처음에는 자신과는 무관한 줄 알았던 한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보였다.

“……저를 태우려고 기다리신 겁니까?”

“예, 로만 도련님의 명령입니다.”

고집불통의 한스.

끝까지 업무를 마친 그를 위해, 로만 또한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 * *

한스와 마찬가지로.

해리슨도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오전까지 납품을 모두 끝내면, 점심에는 딸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겠지.’

딸의 생일일지라도.

자영업자에게 휴일은 없었다.

해리슨은 꼭두새벽부터 납품할 식자재를 정리했고, 직원들을 대동해 빠르게 고객들에게 납품했다.

그중 하나.

제일 중요한 거래처였다.

아델리안 백작 가문의 성에 도착한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관리자를 호출했다.

“식자재를 가져왔습니다.”

아델리안의 관리자.

집사 조르뎅은, 참으로 까탈스러운 인물이었다.

매번 툴툴거리는 어투로 지적하는 일이 많았고, 조금이라도 품질이 떨어지는 식자재를 가져가는 날에는 한바탕 난리를 피우는 걸 각오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아델리안 백작 가문에 납품할 때는 긴장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만약에라도 조르뎅의 눈 밖에 나는 날에는 아델리안에서 장사를 하기가 힘들 테니,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과할 정도로 최상품의 식자재를 납품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조르뎅의 반응이 이상했다.

“오늘 딸의 생일이라지? 바쁠 텐데, 그 앞에 놓고 얼른 가게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사람아. 하나뿐인 딸의 생일을 챙기겠다고 꼭두새벽부터 움직였다며. 나 조르뎅은 그리 야박한 사람이 아니야. 앞에 식자재를 놔두면,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뒷일을 걱정하지 말고 가게나.”

당혹스러웠다.

조르뎅은 절대 이럴 사람이 아니다.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오히려 무슨 나쁜 속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이 들었다.

‘설마 납품 업체를 바꾸려는 건가.’

확실했다.

식자재를 두고 떠난다면.

조르뎅은 본인이 가라고 말했으면서도, 안면을 몰수하고 책임을 물을 것이 뻔했다.

“아닙니다. 지금 바로 옮기겠습니다.”

“이 사람이!”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조르뎅 님을 고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귀를 막았다.

직원들을 불러, 황급히 식자재를 옮겼다.

당황하는 조르뎅.

그는 해리슨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황급히 가문의 하인들을 불렀다.

“지금 일하고 있는 하인들 모두 불러! 당장 해리슨을 도와서 식자재를 날라라!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끝내야, 우리 해리슨이 얼른 딸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나. 어서어서 도와줘!”

정말 이상했다.

조르뎅의 언행에는 나쁜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호의였고, 아델리안의 하인들이 도와준 덕분에 해리슨은 일찍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대체 뭐지?’

업무를 마무리하면서도.

해리슨은 찜찜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조르뎅은 이렇게 순순히 협조할 인물이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끝나 버렸는데.

업무를 모두 마무리한 해리슨은, 얼른 집으로 향했다.

하나뿐인 딸.

자신의 보물을 만날 차례였다.

* * *

이번 파티.

조촐한 자리였다.

주변 사람들을 초대해서 딸의 생일을 축하하고, 가볍게 선물을 개봉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해리슨의 계획에는 조금의 변수도 없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툭.

딸의 선물을 떨어트렸다.

집 앞에.

널찍한 공간을 확보해서 야외 파티장이 설치되었다.

난생처음 보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즐비했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파티장의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편에서 클래식 곡 연주를 위해서 준비하는 연주단까지.

눈으로 빨려 들어오는 일련의 광경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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