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 (1)
덜그럭덜그럭.
드미트리로 향하는 마차 안.
펠릭스는 미리 준비한 문서를 확인했다.
‘드미트리. 카이로 왕국에서 대장장이들의 성지라 불리는 곳.’
소문으로는 들었다.
카이로 철제의 품질이 매우 우수한데, 그것들 대부분이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사실 펠릭스로서는 그리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이 아니었다.
검을 다루는 검사들은 성지순례라도 하듯 드미트리에서 검을 맞추는 경우가 있으나, 마법사들은 대부분 크로노스로 향했다.
대륙 13개의 마탑.
그중 천공을 비롯한 7개가 크로노스에 있었다.
마탑은 엄연히 중립의 세력으로 분류하지만, 과반수의 마탑을 제국에 유치하면서 크로노스는 마법사들의 성지라고 평가받았다.
피닉스만 해도 크로노스에 자리 잡기를 바랐다.
세력이 약해 프랑크로 선택지를 바꾸었을 뿐, 크로노스가 구성한 마법 인프라는 대륙 제일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에 반해.
카이로 왕국은 아무런 메리트도 없었다.
왕국 내에 마탑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고, 왕국 자체적으로 마법사를 육성하는 기관의 수준도 매우 떨어졌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장담하는데, 펠릭스가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용무로 카이로 왕국의 땅을 밟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 왕국에 나타난 천재 검사이자, 버틀러를 쓰러트리며 최연소 대륙 랭킹에 오른 인물이지. 아직 제대로 랭킹전을 치르지 않았지만, 그의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문의 주인공.
로만 드미트리의 명성은 프랑크에서도 엄청난 이슈였다.
보통 약소국들은 왕국에서 2~3명 정도를 간신히 대륙 랭킹에 올리는 편인데, 로만 드미트리는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에 버틀러를 쓰러트렸다.
보통 사람들이 떠드는 말이 있다.
마(魔)의 50위부터는 감히 제국을 제외한 약소국에서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고. 어쩌면 처음으로 그 경계를 무너트릴 수도 있는 천재의 등장에, 프랑크 사람들도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만은 기억했다.
펠릭스도 마찬가지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초대장이라면.
신뢰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따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드미트리 가문은 카이로에서도 알아주는 대부호이지 않은가.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과 대련하는 조건으로 한 달에 1000골드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머나먼 타국에 있는 내게 연락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피닉스 마탑으로서는 딱 반년간 6000골드의 보상만 확보하면 그만이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당분간은 생계를 유지할 여력은 되겠지.’
마음이 복잡했다.
드미트리행.
마탑주가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펠릭스는 먼 걸음을 하면서까지 고생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슥.
커튼을 걷었다.
때마침.
창밖으로,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사실 처음에는 드미트리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변방의 영지.
카이로 자체도 그리 대단하지 않기에, 그곳에서도 변방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허술할 게 뻔했다.
그런데 웬걸?
시작부터 거대한 성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게 드미트리라고?”
외벽.
드미트리는 가문의 장인들을 동원해 카이로에서 가장 탄탄하고 높은 성벽을 쌓았다.
회색으로 번들거리는 성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해 버렸고, 곳곳에 보이는 마법 문양은 마법 공격에 대한 대비도 끝냈음을 보여 주었다.
변방의 영지라기에는 너무 과한 준비성이었다. 카이로의 명망 높은 가문의 영지라고 했어도, 이질감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멈추시오.”
거대한 강철 성문 위로.
드미트리의 경비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활을 조준했다.
전시도 아니고 일반적인 상황인데도, 그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으로 용건을 물었다.
“방문 목적을 밝히시오.”
“피닉스 마탑의 펠릭스라고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님의 초대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확인하겠습니다.”
펠릭스가 마차에서 나와 신분을 밝혔다.
기다림은 짧았다.
경비병들은 사전에 손님 명부를 전달받은 상태였고, 멀리서 펠릭스의 외관을 확인한 그들은 이중으로 만들어진 성문중 바깥의 성문을 열었다.
만약 불상사가 발생할지라도. 경비병 몇 명을 공격할 수 있을 뿐, 안으로 들어와 드미트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끼익.
성문이 열렸다.
경비병들은 체계 잡힌 움직임으로 검문을 진행했다.
일부는 펠릭스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며, 마차 안에 불순한 의도를 포함한 물건이 있는지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새삼 감탄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일반적인 변방의 영지들은 체계는커녕 해이한 근무 태도를 보이기 마련인데, 드미트리의 경비병들은 조금도 방심하질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비병들의 걸음걸이에, 펠릭스의 눈빛이 빛났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다. 적어도 충분한 훈련을 받아, 본인들만의 확실한 체계가 잡혀 있다.’
의외였
다.
드미트리는 대장간 기술로 유명하다.
가문 자체의 힘은 그리 고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예상과는 다른 상황의 연속에 드미트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짧지만 굵은 검문을 끝내고. 안으로 들어선 펠릭스를 반긴 것은, 깔끔하게 쭉 뻗은 도로와 양옆으로 올라간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이었다.
‘확실하다. 드미트리는, 변방에서 썩어 가는 그런 가문이 아니다. 경비병들의 각 잡힌 움직임과 단단한 성벽은 언제든 전쟁을 대비하고 있고, 내부의 모습은 드미트리 가문에서 좋은 환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가문이 변방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평가를 받다니. 역시 세간의 소문은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
문득.
성벽에 도달하기 전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불과 1년 전에는 빈민가의 초라한 환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면, 지금은 그곳도 깔끔하게 변했다.
철광산의 대대적인 투자 이후.
로메로 남작은 로만의 의견을 반영해 적극적으로 내부 개선에 돌입했다.
혹시 모를 전쟁을 대비해 병사들의 훈련과 성벽을 보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지민들의 생활 환경 자체를 완전히 바꾸었다.
예전에도 로메로 남작은 좋은 영주였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세심하게 챙겨 주기에는 그리 경험이 많지 않았고, 로만의 조언은 앞으로 드미트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겨우 1년.
드미트리가 변해 갔다.
이제 막 드미트리에 발을 들인 펠릭스로서는, 눈앞의 드미트리가 원래의 모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드미트리를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르겠군.’
내성으로 향할수록.
펠릭스의 기대감도 같이 부풀어 올랐다.
* * *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만난 순간.
드미트리 초입에서부터 부풀어 오른 기대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훤칠한 외모에 힘 있는 목소리.
단순히 악수를 청했을 뿐인데, 펠릭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기세에 압도되었다.
‘예사 인물이 아니다.’
표정을 감추었다.
이번 만남은 목적이 있다.
아직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기에, 벌써 들뜬 기색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괜히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편지에서 말한 조건이 진실인지를 확실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을 약속한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세부 조항을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내뱉은 발언이었다.
달마다 1000골드.
펠릭스의 걸음을 끌어낸 조건이다.
만약 조금의 과장이라도 있다면, 어떤 말을 내뱉든 간에 펠릭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다.
로만이 말했다.
“편지에서 말한 대로 저희의 조건은 명확합니다. 매일 제 대련 상대를 해 주는 조건으로 매달 1000골드, 6개월간 총 6000골드를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달마다 첫날에 먼저 지급해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1000골드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신뢰의 표시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정말 좋은 조건이군요.”
선지급.
신뢰를 형성하는 단어였다.
먼저 돈을 주겠다는데, 거짓일 리가 없지 않은가.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다.
거금을 들여서 보상해 주겠다는 것은 알겠는데, 문제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대련이 목적이라면 이런 거금을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백 골드 정도만 사용해도 대련 상대를 자처하는 마법사들은 많을 테니까요. 그런데 대체 왜, 피닉스 마탑에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까? 그것도 1000골드라는 거금을 보상으로 내걸면서까지 저를 지목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로만은.
명확히 펠릭스를 바랐다.
정답을 바라는 눈빛에, 로만은 진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물어보신다면 저도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피닉스 마탑이 최근에 흔들리고 있다고는 하나, 마탑주가 건재할 때만 하더라도 펠릭스 님은 대륙 최고의 재능 중 하나라고 불렸습니다. 30대의 나이에 5서클. 특히 피닉스 마탑 특유의 화염 마법은 공격적으로 제일 강력하다고 들었습니다. 1000골드. 마탑의 기준에서는 그리 대단한 돈이 아니지만, 피닉스 마탑은 사정이 좋지 않기에 펠릭스 님의 시간을 살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뿐입니다. 적정한 금액으로 제일 뛰어난 마법사를 바랐고, 그게 바로 펠릭스 님이었습니다.”
솔직한 발언이었다.
뛰어나다는 평가는 좋은 말이었지만.
흔들리는 마탑의 현실을 직시하는 발언은, 차마 웃지 못하게 만들었다.
“저는 펠릭스 님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 과정에서 제가 다치든, 죽든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매 순간 전력을 다하는 것. 그 하나만 약속해주신다면, 드미트리가 펠릭스 님과의 거래를 어기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펠릭스는 묘한 표정을 보였다.
전력을 다해 달라는 말.
그것이 왠지, 로만 드미트리 본인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일까.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도발적인 발언.
펠릭스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 * *
장소를 옮겼다.
드미트리의 연무장.
이동하는 과정에 로만에게 다시 한번 물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달라고 말했다.
‘로만의 진심은 둘 중 하나겠지. 정말 진심이든가, 아니면 마법사를 만만히 보는 것이든가.’
어떤 선택이든.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마법은, 6개월간 매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로만이 말했다.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먼저 공격하십시오.”
심지에 불을 붙이는 발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에, 선공마저 양보한다고 말하자 펠릭스가 서늘한 웃음을 보였다.
“뭐, 마다하지는 않겠습니다.”
마나를 끌어올렸다.
6000골드.
마탑에 필요한 돈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비위를 맞춰 가며, 피닉스 마탑의 자존심을 싸구려로 팔고 싶지는 않았다.
‘첫 대결은 로만 드미트리의 콧대를 꺾고 시작해 주지.’
화륵.
화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펠릭스가 일으킨 마나의 파동이, 이윽고 강력한 불길로 변했다.
“파이어 랜스(Fire Lance).”
3서클 화염 마법.
창의 형태를 한 불길이 폭발했다.
강력한 화염이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를 덮쳤고, 로만은 예상했다는 듯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해 버렸다.
일부러 버린 공격이었다.
선공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파이어 랜스로 상대의 회피를 유도하고는 본격적으로 공격을 펼쳤다.
“인페르노(inferno).”
화르르르르륵.
주변의 불길이 거세졌다.
타오르는 불길을 빨아들이며 사방으로 분출했고, 이번에는 섣불리 피할 수 없을 만큼 주변을 덮쳤다.
서클이 팽팽 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불길을 피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에, 펠릭스는 ‘화염’을 조종해 로만의 움직임을 악착같이 쫓았다.
사방에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불길.
한쪽 머리로는 로만의 움직임을 압박하면서도, 또 다른 머리로는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다.
“파이어 웨이브(Fire Wave).”
화륵.
화르르르륵.
화염이 폭발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화염이, 이번만큼은 로만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 같았다.
타닥.
간발의 차이로.
로만은 불길에서 벗어났다.
경악스러울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신기할 정도로 한발 빠르게 마법을 피해 버렸지만, 그것조차도 계산에 포함되었다.
‘끝이다.’
메모라이즈.
미리 저장해 두었던 마법이 분출되었다.
“룬플레어(Rune flare).”
4서클 마법.
강력한 한 방이었다.
도망칠 길을 잃어버린 로만 드미트리를, 이 한 방에 완전히 끝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사실 5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위력을 조금 낮춰 주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마법이 작렬했다.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불길에, 로만이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았다.
끝났다.
제아무리 오라 검사라고 할지라도, 이 정도 마법을 정통으로 맞았다면 무사하지 못할 터.
자존심의 대가였다.
자신을 대련의 상대로 선택했다면, 적어도 본인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말해서는 안 됐다.
그런데 그때.
확-
불길이 요동쳤다.
이글거리는 화염을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불길에 휩싸인 채로 펠릭스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