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양자택일(兩者擇一) (3)
동북쪽 연합회.
그들은 벼랑 끝에 몰렸다.
웬만해서는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에 의구심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 그럴듯한 얘기로 본인의 의도를 포장하고 있다. 단순히 동북쪽 일대의 일이라서 방관할 수가 없다고? 말도 안 돼! 만약 더글라스 백작과 동북쪽 연합회가 부딪치면 제일 큰 이득을 볼 세력이 드미트리일 텐데, 굳이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다.’
상식적인 의심이었다.
그간의 분란이 없었으면 모르되, 당장 며칠 전만 하더라도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마음 같아서는 의도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혹시 모를 가능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섣부른 실수는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의구심을 삼켰다.
콘라드 자작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간 동북쪽 연합회와 드미트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실 드미트리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동북쪽 일대에서 분란이 생길 때마다 동북쪽 연합회는 바르코의 편을 들었고, 그렇게 서로의 악감정이 켜켜이 쌓여 갔습니다. 특히 최근에 드미트리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지금 도움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면목이 없는 부탁일지라도, 만약에 그간의 악연을 잊고 저희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면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복잡한 계산은 버렸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더글라스 백작과 전쟁을 벌인다면.
어차피 그 이후의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드미트리 가문을 끌어들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로만의 진심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떤 이유든 간에 우리의 손을 잡아 준다면, 더글라스 백작과의 전쟁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전쟁 직후에 드미트리의 공격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버틸 여력이 있다. 지금은 자존심을 운운할 때가 아니다.’
손익을 따졌다.
괜히 큰소리를 치는 것보다, 고개를 숙이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과연 로만 드미트리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직 나이가 어리기에, 괜히 승리했다는 기분에 취해서 같잖은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로만의 대답은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간의 관계를 인정하신다니 저도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드미트리는 동북쪽 연합회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실리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저는 작은 승리를 위해 큰 그림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드미트리, 나아가 동북쪽 일대는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는 카이로의 정세를 생각해서라도 하나로 힘을 합쳐야 합니다. 콘라드 자작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동북쪽 일대의 지리적 특성은, 서로 힘을 합쳤을 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로만은 지금.
순수한 호의를 말했다.
당연히 비웃는 반응을 보일 줄 알았던 콘라드 자작으로서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우리도 이 선택으로 유리한 위치를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도 북부의 세력이, 동북쪽 일대를 공격하는 것을 방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간의 관계가 어땠든 간에. 우리는 ‘동북쪽 일대’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적대적인 세력이라고 해서 울타리 안의 세력이 무너지는 걸 방관한다면, 동북쪽 일대는 언제고 똑같이 나락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요구는 명확합니다. 당신들에게 실질적인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일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앞으로 같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 약속 하나면, 그간의 악연은 잊어버리고 같은 울타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신들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순간.
콘라드 자작은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상대가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콘라드 자작은 미련 없이 호의를 이용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순수한 호의라니.
마음이 복잡했다.
다른 세력도 아니고 드미트리가, 벼랑 끝에 몰린 동북쪽 연합회에 손을 내밀 줄은 몰랐다.
‘……대체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입이 선뜻 떨어지질 않았다.
편견의 시선이 벗겨졌다.
평민 태생이라 고깝게만 보았던 드미트리가, 지금은 동북쪽 일대를 이끌 훌륭한 지도자로 보였다.
참 웃겼다.
도움이 필요한 때가 되어야 드미트리의 가치를 알아보다니.
‘확실하다. 드미트리는 동북쪽 일대를 이끌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단 한 번의 대화에.
켜켜이 쌓인 악감정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연합회 사람들과 충분히 상의한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덥석 받아들일 만한 제안인데도, 콘라드 자작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 * *
통신을 끝냈다.
상의해 보겠다는 콘라드 자작의 대답.
나름대로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이었지만, 로만은 그들의 진심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동북쪽 연합회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들로서는 내 제안을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는 순간 동북쪽 연합회의 근본을 잃는다.’
동북쪽 연합회.
박쥐 같은 작자들이다.
그건 단순히 비겁한 부류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
드미트리는 같은 동북쪽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받아 주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동북쪽 연합회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다. 어차피 세상 모든 사람의 진심을 받아 낼 수 없다면, 동북쪽 연합회와 같은 존재를 일부러 방관함으로써 분란 세력을 간단하게 걸러 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전처럼 힘을 합쳐서 대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일로 드미트리에게 순수한 호의를 가지기 시작한 부류들. 그들은 동북쪽 연합회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도록 만들 테고, 박쥐와 같은 작자들은 예전과 같은 행동력을 보여 줄 수 없다. 근본을 잃어버린다는 것. 실질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데도,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힘을 잃어 갈 것이다.’
백중혁의 방식이었다.
천마 백중혁은.
항상 충직한 신하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중혁을 따르는 신하 중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물도 있었고, 집단을 형성해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부류도 있었다.
백중혁은 그런 다양한 인간을 모두 품었다. 수천, 수만, 수십 만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인간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인정했다.
다만.
완벽하게 통제했다.
숨구멍은 열어 주되 허튼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무력과 통치로, 마교는 백중혁이 죽는 그 날까지 무림의 지배자로 남았다.
‘딱 한 번 호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드미트리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동북쪽 일대를 집어삼킬 수 있다.’
로만은 욕심쟁이였다.
동북쪽 일대의 전부를 원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앞으로 중앙 정부와의 분쟁에서도 드미트리가 건재할 수 있음을 알았다.
‘드미트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북쪽 일대의 다른 세력들을 거쳐야만 한다. 드미트리가 아직 민심을 얻지 못했을 때는 중앙 정부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지금부터는 얘기가 다르다. 동북쪽 연합회를 집어삼키는 순간. 그들은 드미트리에 도달할 때까지 수많은 벽을 넘어서야만 한다. 우리는 전장을 드미트리 밖으로 옮길 수 있고, 그들을 도와 중앙 정부에 대항할수록 동북쪽 일대의 결속력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동북쪽 일대로 묶인 세력들은, 드미트리를 배신하는 선택지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먼 미래를 보았다.
드미트리의 농민들로부터 시작된 계획은, 소름이 돋도록 완벽한 통치 구조를 형성했다.
그렇기에.
진심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충성을 바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딱 한 번의 굴복.
그것이면 충분했다.
끼익.
의자에 몸을 뉘었다.
때를 기다렸다.
동북쪽 연합회가 연락을 보내온다면.
그때는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이다.
* * *
며칠 뒤.
결전의 날이 밝았다.
더글라스 백작은 정말 병력을 소집했고, 북부의 영주들을 선동해서 그들과 같이 동북쪽 일대로 넘어갔다.
북부의 귀족이 말했다.
“더글라스 백작님. 동북쪽 연합회를 무너트린다면 계산은 확실히 해 주셔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제가 왜 북부의 영주님들을 모셔 놓고 허튼소리를 하겠습니까. 이번 전쟁은 절호의 기회입니다. 바르코가 무너진 이후로 동북쪽 일대는 결속력을 잃었고, 그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런 노다지 같은 땅을 누군가는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하하하,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군요.”
북부의 영주들.
그들은 인간적인 관계로 병력을 보탠 것이 아니었다.
더글라스 백작은 실질적인 이득을 제시했고, 그것은 바로 승리 후에 얻는 전리품의 분할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앞뒤가 없는 짐승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나도 무턱대고 상대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부딪칠 싸움이라면, 최대한 승산을 높이는 것이 내가 그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식이지.’
그는 영악했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를, 실질적인 이득으로 직결시켰다.
동북쪽 일대.
그야말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화를 낼 때는 일단 내뱉고 봤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니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동북쪽 연합회를 시작으로.
잘만 하면 주변 일대를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한 녀석들. 바르코가 중앙 정부의 비호를 받을 때는 나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동북쪽 연합회는 끈 떨어진 신세다. 동북쪽 세력들이 그들을 도와줄 리가 없을 테니, 그들을 무너트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피가 끓었다.
곧 벌어질 살육의 무대.
기대감에 차오른 얼굴로 걸음을 서둘렀고, 어느새 저 멀리 동북쪽 연합회의 병력이 눈에 보였다.
귀족들의 전쟁은 질서가 있다.
공성전을 벌였던 바르코와 로렌스는 특이 케이스고, 보통은 언제 어디서 만날지를 정한 뒤에 정면으로 부딪쳐 서로의 힘을 겨루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중앙 정부에 전쟁 의사를 밝히면서 동북쪽 연합회에 선택지를 주었고, 그들은 오늘 이곳 평야에서 싸우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마침내.
현장에 도착했다.
말을 몰고 앞으로 나간 더글라스 백작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더글라스 백작이다. 지휘관은 나와 내 말에 답하라.”
그 말에.
콘라드 자작이 나섰다.
당장에라도 공격을 명령할 것 같은 더글라스 백작과는 다르게, 그는 조금 곤란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아직 예정된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보아하니 올 사람들은 얼추 다 온 것 같은데, 바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나. 아니면 지금 바로 항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어차피 질 싸움에 굳이 힘을 뺄 이유가 없지 않겠나.”
오만한 발언이었다.
더글라스 백작은 이미 승리를 확신했고, 뒤에 있는 북부의 영주들도 그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콘라드 자작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상대의 도발에도,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되면, 그때는 저희도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콘라드 자작이 물러났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일까.
더글라스 백작은 살짝 화난 기색을 보였다.
‘건방진 새끼들.’
역시나.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 순간, 그들을 씹어 먹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도 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유로운 표정으로 수다를 떨던 북부의 영주들은, 저 멀리서 이상한 무리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했다.
“누가 오고 있습니다.”
“동북쪽 연합회가 지원군을 불러들인 건가?”
처음에는 여유로웠다.
그러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드미트리?”
“이런 미친.”
그건 정말이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 * *
이번 전쟁.
드미트리가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최근에 그렇게 얼굴을 붉혔는데, 설마 동북쪽 연합회를 도와주겠다고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드미트리의 선두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그가 현장에 도착하자, 더글라스 백작은 공격적인 어투로 물었다.
“……드미트리가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전장에 나타난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더글라스 백작님이 북부의 영주들을 불러들인 것처럼, 저는 동북쪽 연합회를 위해 병력을 이끌고 왔을 뿐입니다.”
반발을 차단하는 답변이었다.
이번 사건.
더글라스 백작과 동북쪽 연합만의 문제로 엮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글라스 백작은 확실한 승리를 위해 북부의 영주들을 불러들였고, 그것은 드미트리 가문이 참전할 명분을 주었다.
만약 드미트리가 이렇게 나설 줄 알았더라면.
더글라스 백작은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그들이 참전할 명분을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북부의 영주들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였다.
“우리는 준비를 끝냈습니다.”
콘라드 자작이었다.
며칠 전.
동북쪽 연합회는 회의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입니다.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아 더글라스를 물리친다면, 모든 면에서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를 짓밟으려는 북부의 세력보다는, 그래도 타협의 여지가 있는 드미트리를 아군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들은 로만의 손을 맞잡았다.
실질적으로 이득이라는 판단도 있었지만, 콘라드 자작과 같은 몇몇 인물들은 드미트리의 행보에 진심으로 감격한 기색을 보였다.
어떤 이유든 간에. 드미트리가 같은 동북쪽 일대의 울타리로 받아들여 주었다는 사실은, 드미트리 가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콘라드 자작은 로만의 뒤에 섰다.
강력한 보호자 뒤에 모습을 감춘 그 모습에, 로만은 동북쪽 일대를 대표해서 말했다.
“지금부터 선택하십시오. 백병전(白兵戰), 혹은 대전사 전투. 어떤 방식으로 우리와 싸우길 바라십니까?”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
동북쪽 일대의 지배자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