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양자택일(兩者擇一) (2)
로만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을 음미하며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맞은편에 서 있던 루카스가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주군의 예상대로입니다. 블랙 문을 움직여 정보를 흘리자, 더글라스 백작이 동북쪽 연합회에 연락하여 전쟁 의사를 밝힌 모양입니다. 실제로 북부의 영주들을 부추겨서 병력을 모으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감정적인 대응으로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북부의 맹수는 극단적인 인물이다. 감정적으로 대응했더라도, 한번 뱉은 말을 무르진 않겠지.”
계획을 구상하며.
로만은 적절한 인물을 찾았다.
블랙 문을 하오문으로 흡수하면서 비자금에 관련한 정보를 얻었고, 더글라스 백작과 동북쪽 연합회의 관계는 매력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그때부터 로만은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동북쪽 일대의 서열 정리가 필요한 시점에,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다양한 방향으로 고민했다.
드미트리의 농민들을 만난 순간.
로만의 계획은 완성되었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하나가 되며, 로만은 동북쪽 연합회를 무너트릴 그림을 떠올렸다.
‘어느 것 하나,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언행은 없었다.’
사교 파티에서의 도발.
일부러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격적인 발언을 내뱉었고, 콘라드 자작이라면 발끈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오문의 보고가 그의 성향을 말해 주었다.
나름대로 ‘동북쪽 연합회’ 소속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 그는, 겨우 귀족의 장남 따위가 내뱉는 망언을 참을 리가 없었다.
사람의 성향을 파악했다.
콘라드 자작은 동북쪽 연합회의 핵심 인물이고, 그의 성향은 연합회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대로의 전개였다.
콘라드 자작이 도발에 반응하면서 동북쪽 연합회와 드미트리의 불화가 불거졌고, 로만이 대회를 선언하는 순간 동북쪽 연합회는 자연스레 함정에 발을 들였다.
더글라스 백작과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동북쪽 연합회가 시작부터 저자세로 고개를 숙였다면 더글라스 백작이 분노를 진정시킬 명분을 얻었겠지만, 어쭙잖게 이득을 보려다가 상황을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들은 알까?
단 한 사람의 성향이, 시간이 갈수록 동북쪽 연합회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로만이 말했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상황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콘라드 자작은 궁지에 몰렸을 때, 더글라스 백작과는 다르게 뒤를 보지 않고 들이받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교 파티에서 내게 사과를 했고, 대회가 끝나고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겠지. 이번에도 똑같을 것이다. 더글라스 백작이 강하게 나온다면,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백기를 들 확률이 높다.”
뻔했다.
강약약강(強弱弱強).
전형적인 유형의 귀족이었다.
상대가 북부의 맹수인데, 끝까지 얼굴을 붉히며 싸울 담력이 그에겐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계획대로 소문을 퍼트려라. 엎질러 버린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도록. 동북쪽 연합회가 상황을 무마하려고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더글라스 백작의 분노가 진정되지 않도록 상황을 만들어라. 더는 물러날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야말로, 그들은 같잖은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문득.
루카스는 상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목줄을 옥죄는 뱀처럼.
로만의 계획은, 상대가 도망칠 틈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 * *
소문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더글라스 영지.
그곳에서 장사하는 상인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면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아마 당분간은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긴요. 제가 물건을 동북쪽 일대에서 납품을 받는데, 이번에 더글라스 백작님과 동북쪽 연합회의 분위기가 매우 흉흉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불화인 줄 알았는데, 동북쪽 연합회가 전쟁 물자를 싹 쓸어 가면서 더글라스 영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장사를 접어야죠. 납품을 받을 수도 없거니와, 전쟁 도중에 장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손님이 화들짝 놀랐다.
전쟁 소식.
흘려들을 만한 얘기가 아니었고,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가족에게 들은 내용을 모두 말해 주었다.
남편의 말을 전해 들은 아내는 주변 아낙네들에게 소식을 전달했고, 그 아낙네들은 또 본인들의 가족들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더글라스가 위험하다고 말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소문은, 순식간에 더글라스 전역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글라스 성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일하는 와중에 은근한 목소리로 소문을 흘렸다.
“내가 콘라드에서 일하는 하인에게 들었는데, 콘라드 자작이 더글라스 백작님과 연락하고서는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대. 막 가구를 전부 때려 부수고 난리가 났다던데. 이건 확실한 얘기는 아닌데, 더글라스 백작님에게 복수하려고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는 모양이야.”
“콘라드 자작은 아주 뱀 같은 사람이야. 겉으로는 웃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지만, 분명히 더글라스 백작님에게 복수하려고 할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동북쪽 연합회가 병력을 소집한다는 소문이 돌 리가 없잖아. 들리는 바에 의하면, 더글라스 백작님을 짓밟아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다던데. 우리도 여기에 있다가 괜히 전쟁에 휘말리는 거 아니야?”
하인들의 말.
평소에는 별것 아니다.
그런데 더글라스 전역에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하인들이 떠드는 말은 결코 간과할 수가 없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부풀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전쟁을 예견하는 소문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동북쪽 연합회가 더글라스 백작에게 악의(惡意)를 가졌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시작이었던 상인.
소문에 불을 붙인 하인들.
그들은 모두 하오문의 소속이었다.
하오문(下汚門).
삶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들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결국 여론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렇게 부풀어 버린 소문은.
콰앙!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다고?! 당장 징집령을 내려라! 잘못을 인정하고 설설 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봐주려고 했건만, 그따위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라면 그에 마땅한 벌이 필요하겠지. 더글라스 가문의 이름을 걸고. 쥐새끼 같은 녀석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북부의 맹수.
그가 폭발하고 말았다.
* * *
처음 더글라스 백작과 연락한 직후.
동북쪽 연합회는 긴 언쟁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더글라스 백작과의 전쟁은 얻을 것이 없습니다. 당장 드미트리와 동북쪽 일대의 권력을 두고 다투는 상황에서, 괜히 전쟁으로 병력을 잃었다간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지 않습니까? 더글라스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고 금전적인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눈앞에 도사리는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힘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며칠만 기다리고 연락을 하시지요.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상대가 화를 냈다고 바로 꼬리를 말아 버린다면.
동북쪽 연합회는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 며칠 동안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리라고는, 동북쪽 연합회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글라스 백작님! 그건 모함입니다! 전쟁이라니요! 동북쪽 연합회는 전쟁을 치를 의사가 조금도 없으며, 이번 일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금전적인 보상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분노를 가라앉히십시오. 주변에 퍼지는 소문은 절대 저희의 진심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화면 너머.
더글라스 백작의 얼굴이 보였다.
콘라드 자작은 다급한 목소리로 해명을 해 보았지만, 더글라스 백작은 이미 귀를 막아 버린 상태였다.
[진심과는 다르다고? 콘라드 자작. 너는 내가 눈뜬장님으로 보이는 건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북쪽 연합회가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고, 너희가 무언가를 하고 있기에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겠지.]
약이 바짝 올랐다.
상대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이 변명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글라스 백작의 속을 뒤집었다.
[나는 원래부터 너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이득만을 따라 이리저리 빌붙어 대는 박쥐 같은 녀석들이라면, 언제고 내게도 그 이빨을 드러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내가 연락한 이유는 너와 타협하기 위함이 아니야. 그러니까 가식적인 얼굴은 버리라고. 너와 내가 직접 마주하는 날, 나는 네 얼굴을 짓밟고 더는 웃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릴 테니까.]
탁-
통신을 끊었다.
선전포고였다.
동북쪽 연합회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떻게든 전쟁을 무마하고 싶었지만, 더글라스 백작이 이렇게까지 말했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한 귀족이 말했다.
“큰일입니다. 더글라스 백작은 허언을 내뱉을 인물이 아니고, 소문에 의하면 북부의 영주들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희만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그들을 압도할 세력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중앙 정부! 그들에게 연락해 봅시다!”
방법이 없었다.
더글라스 백작처럼 주변 귀족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참 좋겠지만, 드미트리와의 불화로 동북쪽 연합회를 제외하고는 힘을 보태 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지난 연락이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파비우스 백작에게 연락을 넣었다.
[예예. 어려운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만, 중앙 정부에서 그런 문제까지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동북쪽 연합회가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 수습을 남에게 떠넘기지 마십시오.]
지난 연락 이후로.
파비우스 백작의 반응은 찬바람이 불었다.
명백히 선을 긋는 행동에, 통신을 끊은 콘라드 자작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끝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막막했다.
퇴로가 완전히 막혀 버린 상황에, 속이 얹힌 기분이었다.
더글라스 백작과의 전쟁.
동북쪽 연합회가 무조건 패배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전쟁으로 잃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현실은 그들에게 조금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영주님! 로만 드미트리가 연락을 요청했습니다!”
통신병의 말.
순간,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 * *
연락의 이유?
뻔했다.
동북쪽 연합회를 조롱하려는 의도일 터.
마음 같아서는 연락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콘라드 자작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연락을 받았다.
[더글라스 백작과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로만의 물음.
의외였다.
침착한 목소리에, 콘라드 자작은 자신도 모르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드미트리 가문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저를 비롯한 동북쪽 연합회 사람들은 바르코에게 받을 빚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글라스 백작이 독단적으로 바르코 가문의 비자금을 빼돌리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저희는 그것을 발견하고 저희의 몫을 챙겼습니다. 그뿐입니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 더글라스 백작이, 본인이 먼저 잘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저희의 책임이라면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저희는 억울합니다. 그들이 공정하게 비자금을 공개하고 적절하게 분배했다면, 절대 비자금을 빼돌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공감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다.
이해해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냥 답답한 마음에 자신들의 억울함을 말했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북부의 세력이, 동북쪽 일대로 넘어오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순간.
로만을 보았다.
로만의 말.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설마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 말입니까?”
[그건 동북쪽 연합회의 태도에 달렸습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관계였든 간에 드미트리는 동북쪽 일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방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은.
동북쪽 연합회가 생각지도 못했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였다.